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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남성들이 군림하는 서양고전문학의 세계에서 제인 오스틴은 독보적인 여성 작가다. 소위 고전문학에 많이 언급되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여성 작가들은 기원전 612년 무렵의 고대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18~19세기에 활동했던 여성들이 최고(最古) 작가다. 그나마 제인 오스틴(1775~1817), 브론테 자매(1816~1855), 조지 엘리엇(1819~1880),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이디스 워튼(1862~1937) 정도로 몇몇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거의 모든 작품들이 고전의 반열에 들고, 그 작품들이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무수히 변주되어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여성 작가는 제인 오스틴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그녀가 태어난 영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BBC의 설문조사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인도를 다 준다고 해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던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어 제인 오스틴이 ‘지난 천 년 동안 최고의 문학가’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설득』은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완성작이다. 남자와 여자, 그 가족과 가문, 사랑과 오해, 결혼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다른 소설들처럼 『설득』도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18~19세기에 여자로 태어나 그녀가 가장 가깝게 관찰할 수 있었던 세계였기 때문이다. 분명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을 사회적 담론과 역사적 고찰 같은 거대한 이야기 대신, 제인 오스틴은 자신도 살아내어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던 세계를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섬세하게 그려내어 당대의 사회 풍경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회, 국가, 세계 같은 이야기에 비해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가족은 집단의 가장 작은 단위이지만 다른 모든 집단을 이루는 본질이다.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더 크고 넓게 나아가 거대해질 수 있다.
『설득』은 주로 준남작 엘리엇 경의 둘째 딸 앤 엘리엇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앤은 8년 전에 어머니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레이디 러셀의 ‘설득’으로 신분도 재산도 보잘것없었던 남자 프레더릭 웬트워스와의 약혼을 깨뜨렸다. 그 프레더릭이 8년이 지난 후 가세가 기울어 자기 영지마저 내준 준남작의 스물일곱 노처녀 딸 앤 앞에 신분도 재산도 빠지지 않는 웬트워스 대령으로 돌아온다. 8년 전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설득을 당해 웬트워스에게 상처를 준 것이 너무나 미안한 앤과, 8년 후에도 고작 설득 때문에 앤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너무나 쓰라린 웬트워스. 이후의 이야기는 앤과 웬트워스가 미안한 마음과 쓰라린 마음 사이의 그 머나먼 거리를,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좁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빛나는 것은 웬트워스의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 기뻐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앤의 심경이다. 그 심경의 섬세한 변화를 제인 오스틴은 끈질기다 싶을 만큼 치밀하게 묘사한다. 앤과 웬트워스의 로맨스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은 시쳇말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일희일비하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그 마음이다. 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웬트워스 대령의 속내는 좀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마지막에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편지는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와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다.
『설득』에서 ‘8년’이라는 세월은 어떤 시간일까? 가세가 기울건 말건 그 알량한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화려한 생활을 하기 위해 허영심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스스로 가린 귀족이 몰락해 가는 시간이자, 전쟁에 해군으로 참전해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쟁취한 웬트워스가 부유한 대령으로 변모하는 시간이다. 앤과 웬트워스가 재회하는 1814년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군인들이 전쟁 영웅으로 금의환향했던 시기로, 새로운 계층이 급부상해 기존 신분 체제의 지각변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웬트워스 대령은 그 같은 사회 변화를 여실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바로 결혼 시장에서 사회적 지위와 재산, 직업, 특히 여자의 경우는 나이에 따라 매겨지는 몸값! 8년 전에는 누구나 못마땅해했던 웬트워스가 8년 후에는 누구나 환영하는 일등 신랑감이 되었다. 단지 미래가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해 재산을 축적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또한 그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중하고 사려 깊고 현명하고 강인한 품성을 지켜왔음에도 앤은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꽃띠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 시장에서 배제된다.
앤은 제인 오스틴을 닮았다. 존 스펜스의 『제인 오스틴』에서 만난 제인 오스틴은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제인 오스틴』에 따르면 18~19세기 영국에서 딸로 태어난다는 것은, 게다가 명성은 있으되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여자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여자가 직업을 갖기 어려웠던 그때 여성은 아버지에게, 결혼하면 남편에게 생계를 의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도 변변치 않고 남편마저 없다면 남자 형제의 자선을 바랄 도리밖에 없었다. 제인 오스틴은 그런 시대에 유산도 전혀 물려받지 못한 독신 여성이었다. 그녀는 제 처지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는데도 다른 여자들처럼 자기 생계를 책임져줄 남편감을 조건에 맞춰 찾아 나서는 대신, 자신의 소설적 재능을 신뢰하고 전업 작가로 자립하기로 결심했다.
『설득』에서 앤은 제인 오스틴만큼 적극적으로 자립의 의지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웬트워스와 헤어진 8년 동안 더 이상 남의 설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는 정신적 독립을 이루었다. 앤과 웬트워스의 해피엔드는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내리겠다는 앤의 의지 덕분이다. ‘8년’이라는 세월은 앤이 제 생각조차 남에게 의지하던 ‘설득’에서 벗어나 이제 제 생각으로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