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책 - 휴가없이 떠나는 어느 완벽한 세계일주에 관하여
박준 지음 / 엘도라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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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를 꿈꾼다. 하지만 떠나기는 쉽지 않다. 처음에 마음먹기가 힘들 뿐 한번만 떠나 보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느 여행기라도 등장할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잠깐이라도 해 봤다면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현실성 없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어린 학생들이라고 다를까?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쓰지 않아야 그나마 여행을 떠나는 것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그 마음먹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젊었을 땐 돈이 없었고 돈이 생기니 시간이 없더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4박 5일 패키지로 여행을 떠나 유명 장소만 들러 사진만 찍고 허겁지겁 돌아오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즐거울 때가 있다. 책 속에서 다른 책의 이야기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책 속의 등장인물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기억해 두었다가 언급한 그 책을 찾아 읽게 되고 음악을 듣게 된다. 영화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 속에서 언급된 영화를 직접 보거나 책의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싶은 사람 역시 많을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대학 시절 심상대의 『묵호를 아는가』를 읽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어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박준의 『책여행책』에서는 이처럼 책 속을 따라 여행한다. 미국의 프로빈스타운을 시작으로 책을 통해 세계를 여행한다. 개인적으로는 에릭 파이의 『야간열차』 편에서 소개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거의 일주일간의 열차 여행 이야기가 흥미롭다. 다만 자신의 책 『온 더 로드』의 카오산 로드를 다시 언급하며 그곳에 가보고 실망했다는 독자 이야기를 꺼내며 억울하다는 투로 이야기한 것은 아쉽다. 자신의 지난 대한 이야기를 꼭 이 책에서 해야만 했을까?

작가의 말은 위험하다. 『온 더 로드』에서 박준은 자신을 위해 몇 달의 시간을 내라고 독자를 유혹했지만 현실의 퍽퍽함을 인정한 것일까? 『책여행책』에서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세상은 책으로 통하니 꼭 떠나지 않고 ‘책여행’을 떠나도 세계를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찌 세상뿐일까. ‘책여행’을 통해서라면 히치하이킹을 통해 은하수를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책여행’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저자는 다음 여행기에서 또 어떤 말로 사람들을 유혹할까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여행기를 읽으며 꿈을 꾼다. 나 역시 언젠가 떠날 수 있음을 꿈꾸며 여행기를 읽는다. ‘책여행’은 꿈을 꾸는 다른 방법일 뿐, 진지하게 떠나는 여행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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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지마 하우스의 소동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9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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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타케 나나미라면 데뷔작인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 여자 탐정 하무라 아키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네 탓이야』, 『의뢰인은 죽었다』, 『나쁜 토끼』 같은 시리즈와 가상의 해안 도시인 하자키를 무대로 한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시리즈인 『빌라 매그놀리아의 살인』,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같은 코지 미스터리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하드보일드, 본격 미스터리는 물론 호러 같은 다양한 장르를 구사하는 작가이지만, 역시 작가가 즐기는 테마인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악의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다루는 코지 미스터리일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네코지마 하우스의 소동』은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시리즈의 세 번째이며 마지막 작품이다.

네코지마는 그 이름처럼 하자키 반도 서쪽에 있는 웅크린 고양이를 닮은 섬이다. 직경이 500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고 볼품없는 섬이지만 역시나 그 이름답게 백여 마리 고양이가 서른 명의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실제 고양이는 물론 캣츠 앤드 북스, 고양이 카페, 캣 아일랜드 리조트는 물론 고양이를 모시는 신사까지 존재하는 고양이 천지인 이 섬의 해변가에서 고양이의 시체―칼에 찔린 고양이 박제―가 발견되고 때 마침 휴가로 섬에 놀러 와 있던 고양이 알레르기를 가진 고마지 형사반장과 임시파출소에 근무하던 게으르고 엉뚱한 나나세 순경이 이 사건에 투입된다. 곧이어 발생한 바이크를 타던 마약상이 벼랑에서 떨어진 사람과 부딪혀 두 사람이 함께 죽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과거 현금수송차 강탈 사건과 관련되어 3억 엔이라는 엄청난 현금이 네코지마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며 말 그대로 떠들썩한 소동이 발생한다.

하자키 시리즈의 탐정 격이기도 한 고마지 형사반장은 불운―또는 당연하게도―하게도 휴가차 놀러온 곳에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시리즈 작품마다 새로운 파트너를 맞이한다. 네코지마 섬에서 맞이한 파트너는 나나세 순경으로 망할 걱정도 없는 직장을 찾다가 경찰이 된 야망 제로에 게으른 데다가 엉뚱한 인물이다. 날카롭지만 또 허술하기도 한 고마지 형사반장과 게으르고 엉뚱하지만 의외로 준비성 있는 나나세 콤비의 활약상이 가장 볼 만하다. 파트너를 바꾸는 방법으로 각 작품마다 새로운 재미를 주려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시도는 부하 부리기의 일인자라는 고마지의 성격과 엉뚱한 나나세라는 인물 덕분에 이번 작품에서도 잘 맞아 떨어졌다. 시리즈물의 마지막을 잊지 말라는 듯 전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카메오 형식으로 등장하는데 이들 인물을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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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에트가 웃는다
엘자 샤브롤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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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키보드 위로 열 손가락을 놀리기만 하면, 모니터 너머의 ‘인터넷’이라는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시대다. 끝없이 확장되는 그 세계에는 우리가 양산해 낸 무수한 환영들이 떠돌아다닌다. 모니터 밖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는 자기 자신 위에 달콤한 환상을 덧씌워 현실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 양 가상의 인격을 내세운다. 완전히 가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는 아닌, 완전히 거짓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실은 아닌, ‘과장’이라는 편리한 감투를 뒤집어쓴 허깨비 같은. 이제 그 세계에서 완전한 진짜, 혹은 진실을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은 희귀하지 않을까. 대부분은 과장에 대비하여 어느 정도 감안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난생처음 인터넷 접속으로 소통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바로 철저한 소통 부재의 프랑스 오지 마을 풀리주악의 노인들이다. 엘자 샤브롤은 『쥘리에트가 웃는다』에서, 인터넷 소통의 허무한 환영을 알 리 없는 노인들이 생애 첫 ‘인터넷 접속’이라는 해프닝을 통해 어떻게 진정한 소통을 회복해 가는지를 귀엽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풀리주악은 산송장들의 죽어가는 마을이나 다름없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간 자리에는 가장 많게는 자그마치 백 년을 꽉꽉 살아내고 한 살을 더 보태고 있는 최고령자 쥘리에트부터 가장 적게는 마흔일곱 노총각인 피에로까지 평균 연령 70~80대에 육박하는 노인들만 열 명 남짓 남아 있다. 그들 사이에서 피에로는 마흔일곱 장년의 거한으로 나이를 좀먹어도 여전히 ‘꼬맹이’이고, 오렐리의 예순여섯은 앞으로도 한참은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거뜬히 할 수 있는 짱짱한 나이다. 자동차 사고로 아들을 잃고서 세상과 동떨어진 곳을 찾아 숨어든 50대 후반의 프란츠와 마르틴 부부도 “막 은퇴한 ‘젊은’ 부부”로 불린다.

그렇다면 풀리주악이라는 산골 마을은 얼마나 세상과 동떨어져 있을까? 세벤 지역의 고산지대에 있는 이 산촌은 로제르 산의 고봉과 막장 주변을 둘러싼 높은 암벽에 가려 볕이 잘 들지 않는 데다가 비도 눈도 많아 화창하게 갠 날들은 일 년 중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풀리주악으로 통하는 길은 딱 하나뿐인데 한겨울 동파로 갈라지고 움푹움푹 파여 웬만한 자동차로는 도중에 퍼져버린다. 오로지 풀리주악 노인들의 생필품 구입과 잔심부름을 도맡은 피에로와 우체부, 가끔 의사 정도만 이 길을 오갈 뿐 대부분은 텅 비어 있다. 그나마도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그들조차 옴짝달싹 못하고, 풀리주악은 전기가 끊겨 전화는 물론 TV(!)조차 볼 수 없다.

TV는 풀리주악 노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나이가 들면서 골목길을 나서는 일조차 성가셔지자 노인들은 온종일 혼자서 TV 앞에만 앉아 있게 되었는데, 내 기분이나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듣고 싶은 말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홀로 떠들어댈 뿐인 그 무생물은 고독감을 더욱 짙게 드리우고 외로움에 사무치게 한다. 가끔은 이웃의 동태를 살피려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지만 그조차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피에로와 오렐리를 제외하면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인적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꼬맹이’ 피에로는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산송장인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그것도 살아 있는 연결 고리다. 그러니 피에로가 “너무 늦기 전에 삶다운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든, “갑자기 사타구니에 불이 붙어”서든 풀리주악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이 노인들은 피에로의 여자를 구하기 위해 드디어 TV 앞에서 일어나 골목길을 다시 나서기 시작한다. 골목을 오가는 부산한 움직임이 살아나자, 생기 없이 괴괴하게 고여 있던 마을의 공기가 달라진다. 거의 멎어 있던 마을의 심장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에서 ‘인터넷’이 등장한다. 산간벽지인 줄 뻔히 알면서 풀리주악에서 살고 싶어 할, 제정신 박힌 프랑스 여자를 구하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 프란츠의 소개로 ‘인터넷’이라는 별천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인들은 프랑스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피에로의 짝으로 프랑스 여자와 별다르지 않은 외모를 지녔으되 프랑스 파리에 대한 동경을 가진 러시아 여자를 낙점한다. 그리하여 이 노인들은 최고령자 쥘리에트의 집에 컴퓨터와 ADSL 일체를 갖춘 ‘피에로의 짝 구하기’ 사령부를 설치하고 피에로인 척 러시아 여자 타티아나에게 구애한다.

그런데 인터넷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이 노인들도 타티아나 앞이 아니라 모니터 앞에서는 반드시 진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노인들은 타티아나를 풀리주악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피에로를 귀족 혈통의 유능하고 부유한 사내로 포장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타티아나도 물론 자신의 프로필에 진실만을 담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노인들이나 타티아나나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거짓에서 시작된 이 만남에는 처음부터 행복한 결실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피에로와 타티아나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건 작가가 너무나 순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환상은 현실에서 “원시인 같은 머슴”과 “찬녀(창녀)”로 만난다. 한마디로 서로에게 제대로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착하다. 그 와중에도 오래도록 여자 구경을 못 한 피에로와 다른 “피앙세들”과는 한 번도 자지 않았다는 타티아나 사이에 알콩달콩한 호감이 싹트긴 한다. 물론 그 호감이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풀리주악 노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넷은 현실의 소통을 되살렸다. 서로를 방문하는 일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노인들은 컴퓨터 안의 일을 위해 쥘리에트의 집에 모여들어 컴퓨터 밖에서 공모하느라 살을 맞대고 앉아 얼굴을 들이밀고 서로의 입김을 느끼며 두런대기 시작한 것이다. 피에로는 “아직 삶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그 숨 막히도록 음습한 느낌에 따뜻한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세월이 조금씩 갉아먹고 공동화, 고립, 소외가 단절시켜버린 그 끈끈한 관계”가 부활한 것이다. 쥘리에트는 그것을 “행복한 기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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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클럽 -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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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에 가슴 설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이나 웃음 3부작, 가가형사 시리즈 등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대담한 상상력과 탁월한 스토리 전개 능력에 감탄한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붉은 띠지에 눈에 띄게 인쇄된 “~ 지금까지 이런 탐정은 없었다!” 라던가 “‘탐정 갈릴레오’보다 ‘가가 형사’보다 매력적이다”라는 광고 문구를 본 본격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불가능해 보이는 트릭이나 모순을 해결해 가는 탐정 갈릴레오(유카와 마나부)나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인간적인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보다 매력적이라니 대체 어떤 탐정이 등장할까 기대를 하게 된다.

『탐정 클럽』에는 VIP들의 의뢰만 받는 수수께끼의 조사기관 탐정클럽 소속의 탐정이 등장해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에 도전해 그 트릭을 풀어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눈 씻고 찾아보아도 매력적인 탐정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분명히 탐정은 등장한다. 사무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자료를 제시하고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두 남녀 탐정이 그들이다. ‘남자도 조각상처럼 잘 생겼고 여자도 길게 찢어져 올라간 눈매가 예쁜 미녀였지만 어딘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 탐정을 알 수 있는 단서의 끝이다. 분명 『탐정 클럽』>의 탐정은 기존의 탐정들과는 다르다. 코카인을 흡입하거나 깔끔을 떨거나 수다쟁이도 아니고 잘난 척도 하지 않는다. VIP만 상대하고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친다는 설정 탓인지 사무적이고 철저히 직업적인 두 탐정에게 도저히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이후 작품에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탐정의 매력은 제로다.

『탐정 클럽』에는 다섯 가지 사건이 등장한다.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트릭이 존재하지만 탐정이 등장해 이것을 해결한다는 기본 구조는 여느 추리소설과 다르지 않다. 범죄가 발생하는 대상이 부자들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사건 자체도 평범한 편이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참신하게 설정되어 있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궁금증을 주지만 또 한 번 실망을 맛보게 된다. 딱히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독자에게 도전’을 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사건의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너무 숨기고 마지막에 탐정의 보고서만을 통해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단편이 가진 한계라고 하기에는 작가의 능력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제일 돋보인 이야기는 <탐정 활용법>이다. VIP도 아닌 의뢰인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탐정의 이야기로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탐정들이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 속편이 등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무적이고 도도한 무색무취의 탐정이지만 숨겨진 매력을 끌어내려면 다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손을 거쳐 다시 등장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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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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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군림하는 서양고전문학의 세계에서 제인 오스틴은 독보적인 여성 작가다. 소위 고전문학에 많이 언급되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여성 작가들은 기원전 612년 무렵의 고대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18~19세기에 활동했던 여성들이 최고(最古) 작가다. 그나마 제인 오스틴(1775~1817), 브론테 자매(1816~1855), 조지 엘리엇(1819~1880),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이디스 워튼(1862~1937) 정도로 몇몇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거의 모든 작품들이 고전의 반열에 들고, 그 작품들이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무수히 변주되어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여성 작가는 제인 오스틴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그녀가 태어난 영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BBC의 설문조사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인도를 다 준다고 해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던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어 제인 오스틴이 ‘지난 천 년 동안 최고의 문학가’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설득』은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완성작이다. 남자와 여자, 그 가족과 가문, 사랑과 오해, 결혼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다른 소설들처럼 『설득』도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18~19세기에 여자로 태어나 그녀가 가장 가깝게 관찰할 수 있었던 세계였기 때문이다. 분명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을 사회적 담론과 역사적 고찰 같은 거대한 이야기 대신, 제인 오스틴은 자신도 살아내어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던 세계를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섬세하게 그려내어 당대의 사회 풍경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회, 국가, 세계 같은 이야기에 비해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가족은 집단의 가장 작은 단위이지만 다른 모든 집단을 이루는 본질이다.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더 크고 넓게 나아가 거대해질 수 있다.

『설득』은 주로 준남작 엘리엇 경의 둘째 딸 앤 엘리엇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앤은 8년 전에 어머니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레이디 러셀의 ‘설득’으로 신분도 재산도 보잘것없었던 남자 프레더릭 웬트워스와의 약혼을 깨뜨렸다. 그 프레더릭이 8년이 지난 후 가세가 기울어 자기 영지마저 내준 준남작의 스물일곱 노처녀 딸 앤 앞에 신분도 재산도 빠지지 않는 웬트워스 대령으로 돌아온다. 8년 전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설득을 당해 웬트워스에게 상처를 준 것이 너무나 미안한 앤과, 8년 후에도 고작 설득 때문에 앤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너무나 쓰라린 웬트워스. 이후의 이야기는 앤과 웬트워스가 미안한 마음과 쓰라린 마음 사이의 그 머나먼 거리를,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좁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빛나는 것은 웬트워스의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 기뻐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앤의 심경이다. 그 심경의 섬세한 변화를 제인 오스틴은 끈질기다 싶을 만큼 치밀하게 묘사한다. 앤과 웬트워스의 로맨스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은 시쳇말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일희일비하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그 마음이다. 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웬트워스 대령의 속내는 좀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마지막에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편지는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와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같다.

『설득』에서 ‘8년’이라는 세월은 어떤 시간일까? 가세가 기울건 말건 그 알량한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화려한 생활을 하기 위해 허영심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스스로 가린 귀족이 몰락해 가는 시간이자, 전쟁에 해군으로 참전해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쟁취한 웬트워스가 부유한 대령으로 변모하는 시간이다. 앤과 웬트워스가 재회하는 1814년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군인들이 전쟁 영웅으로 금의환향했던 시기로, 새로운 계층이 급부상해 기존 신분 체제의 지각변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웬트워스 대령은 그 같은 사회 변화를 여실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바로 결혼 시장에서 사회적 지위와 재산, 직업, 특히 여자의 경우는 나이에 따라 매겨지는 몸값! 8년 전에는 누구나 못마땅해했던 웬트워스가 8년 후에는 누구나 환영하는 일등 신랑감이 되었다. 단지 미래가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해 재산을 축적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또한 그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중하고 사려 깊고 현명하고 강인한 품성을 지켜왔음에도 앤은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꽃띠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 시장에서 배제된다.

앤은 제인 오스틴을 닮았다. 존 스펜스의 『제인 오스틴』에서 만난 제인 오스틴은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제인 오스틴』에 따르면 18~19세기 영국에서 딸로 태어난다는 것은, 게다가 명성은 있으되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여자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여자가 직업을 갖기 어려웠던 그때 여성은 아버지에게, 결혼하면 남편에게 생계를 의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도 변변치 않고 남편마저 없다면 남자 형제의 자선을 바랄 도리밖에 없었다. 제인 오스틴은 그런 시대에 유산도 전혀 물려받지 못한 독신 여성이었다. 그녀는 제 처지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는데도 다른 여자들처럼 자기 생계를 책임져줄 남편감을 조건에 맞춰 찾아 나서는 대신, 자신의 소설적 재능을 신뢰하고 전업 작가로 자립하기로 결심했다.

『설득』에서 앤은 제인 오스틴만큼 적극적으로 자립의 의지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웬트워스와 헤어진 8년 동안 더 이상 남의 설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는 정신적 독립을 이루었다. 앤과 웬트워스의 해피엔드는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내리겠다는 앤의 의지 덕분이다. ‘8년’이라는 세월은 앤이 제 생각조차 남에게 의지하던 ‘설득’에서 벗어나 이제 제 생각으로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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