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날 먹어요
아녜스 드자르트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무결점의 완벽한 사람에게는 정나미가 지레 달아난다. 홀로 완전한 사람 곁에서는 내 존재의 의미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설혹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그건 그의 완벽한 삶을 장식해 주는 인형에 불과하다. 인형이 장식의 효과를 다하지 못한다면 가차 없이 버려질 것이다. 흠집, 오점, 결점 같은 것들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그 자신도 아니고 인형이 뒤집어쓴 오물이라면 더더욱 참아줄 수 없으니까.
아녜스 드자르트의 『날 먹어요』는 그렇게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아들에 대한 모성애를 상실한 미리암이 간판도 없는 ‘셰 무아(Chez Moi, 나의 집)’라는 식당을 열고 요리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철저하게 미리암 자신의 시선과 내면으로 보여준다.
미리암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의 남편은 허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인간미 없는 남자다. 미리암의 그 완벽한 남편은 막 아들을 낳고 모성애를 주체할 수 없어 감정이 격앙된 아내의 뺨을 냉정하게 갈긴다. 하지만 대체 남편이 왜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식을 낳아준 부인에게 폭력을 가했는지 공감할 수 있도록 충분히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미리암의 이야기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아내의 유난한 감정이 정상적인 자신까지 비정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그러니까 병실의 다른 산모들과 간호사를 보기가 창피해서. 그렇다 해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마치 다른 한쪽의 말을 꼭 들어봐야 할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 순간 미리암에게서 (그때껏 남아 있었다면) 남편에 대한 사랑도, 아들을 향한 모성애도 싹 달아나버린다. 이후 미리암은 위고를 키우면서, 그토록 충만했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서 메말라버린 사랑, 더 정확히는 모성애를 호시탐탐 찾아본다. ‘엄마’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살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 완벽하게 아름답고 총명하고 의젓한 아이, 남편만큼 완전한 아이 앞에서 미리암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모성애를 기다리며 가짜 엄마를 연기한다.
모성애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식에 대해서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콩깍지가 천만 겹쯤 덧씌워져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가. 그 숭고한 희생으로 빛나는 모성애는 자식을 품은 여자라면 본능처럼 유전자에 각인되어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엄마의 가슴속에서 샘솟는 모성애는 도저히 말라버려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내 엄마를 보면서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런 줄 알았다. 나 또한 그럴 줄 알았다. 뱃속의 아기가 무사한지보다 내 몸이 망가지는 아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았을 때는 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몸부림쳤다. 나는 끝내 아기 대신 죽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홀로 살아남은, 그럼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가는 죄책감뿐이었다. 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하는 모성애가 정말 본능인지 의심스러웠다.
임신거부증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 자체를 부정하는 일종의 병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모체가 아기를 가졌는데도 임신하지 않았다고 믿어버리면, 태아는 최대한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자신을 감추며 태동도 없이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도 애초에 모성애를 상실한 엄마에게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채 버려진다. 참혹한 비극이 예정된 원하지 않는 임신의 상황에 이르러서는 절대 안 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자기 깊숙이 숨겨져 있던 모성애를 느끼고 엄마가 되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나 자신에게, 미리암에게 끔찍한 연민을 느낀다.
그런 미리암도 남편과 아들 위고에게서 찾지 못한 여자의 사랑과 엄마의 모성애를 아들의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친구 옥타브에게서 찾은 죄책감까지는 차마 내려놓지 못한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끔찍하게 노력해야 했던, 그러나 끝내 그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미리암이 내내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 보면, 어쩌면 미리암이 그토록 기다리던 모성애는 처음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샘솟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리암이 엄마로서 자연스럽게 모성애를 느끼고 자식을 품을 순간을 위해.
이 책의 번역자는 “가족을 이루는 삼각형에서 꼭짓점 두 개를 동시에 점하는 것, 다시 말해 엄마인 동시에 여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와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가지면 남자가 여자의 남자인 동시에 아이의 아빠인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여자인 동시에 아이의 엄마가 된다. 미리암의 잘못은 단 한 사람에게 그 모든 역할을 다하려 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제 아들이나 다를 바 없는 아이를 꾀어낸 파렴치한 불륜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미리암이 연기하던 인형의 역할은 깨어졌다. 그리고 남편은 “사라져! 나는 당신이 파놓은 진창에 발끝 하나 더럽히고 싶지 않아”라고 미리암을 매몰차게 단죄했다. 그런데 인형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인형이 제 의지로 그 오물을 뒤집어썼다면, 그것은 그가 인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인형이 그를 버린 것이다. 인형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고 일탈을 꿈꾸는 것은 자신도 심장이 세차게 박동하고 피가 뜨겁게 흐르는 인간임을, 그가 허락하지 않은 것까지 욕망할 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이름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사랑.
미리암이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 사랑하며 어떡하든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요리였다. 맛있는 음식은 허기를 채워주는 동시에 슬프고 아프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마법 같은 위안이 되어준다. 세상에 상처 입어 힘들 때마다 엄마의 밥상이 그리워지는 것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위안 때문이 아닐까. 참으로 고마운 것은 위고가 결국 엄마의 식당 ‘셰 무아’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미리암은 아들 위고를 위한 ‘엄마의 밥상’을 온 마음을 다해 차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