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 열개의 목소리, 하나의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5
닉 혼비.데이비드 알몬드 외 지음, 이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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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에서 이야기 만들기 같은 놀이를 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뒷사람이 이야기를 이어 가는 것인데 어린 시절답게 엉뚱한 이야기를 만들어 삼천포로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 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낸 『클릭』이 어떤 모습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작가가 연작소설과 같은 형태의 작업을 하거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작가들이 각자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꽤 흔하지만 『클릭』처럼 모자이크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명의 작가가 풀어 나가는 방식은 찾아보기 힘들기에 그만큼 독특하게 다가온다. 여러 장의 사진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 『클릭』은 그런 이야기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평생을 사진작가로 활동했던 조지 킨은 ‘지’라고 불리며 세계 곳곳의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왔다. 조지 킨은 죽으면서 손자 제이슨에게는 유명 인사들의 사인이 담긴 사진과 손녀 매기에게는 일곱 개의 조개껍데기가 든 상자와 모든 것을 되돌려주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다. 유난히 할아버지를 좋아 했던 매기는 상자와 할아버지의 말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게 된 제이슨은 친아버지를 찾아 가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팔릴 만한 유품을 정리하다가 자신에게 남긴 할아버지의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매기는 할아버지가 남긴 조개껍데기를 돌려놓기 위해 할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여행을 시작하고, 제이슨은 유품이 된 오래된 카메라로 할아버지처럼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할아버지이자 사진작가의 삶이 남겨 놓은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인연이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과거가 현재의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

린다 수 박, 데이비드 알몬드, 이오인 콜퍼, 데보라 엘리스, 닉 혼비, 로디 도일, 팀 위니 존스, 루스 오제키, 마고 래너건, 그레고리 맥과이어 이렇게 열 명의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인 『클릭』은 서로 다른 개성이 충돌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큰 줄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각 작가의 개성이 표출된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도 든다. ‘열 개의 목소리, 하나의 이야기’라는 책의 부제는 연작 형태로 구성된 열 가지의 이야기가 모여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할아버지와 그가 찍은 사진이 얽혀 있는 사람들, 과거의 기억과 미래는 그 중심에 인연이 있다고 말한다. 세상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는 것, 그 인연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열 명의 작가들은 서로 다른 개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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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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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한정해서라면 내가 아편에 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셜록 홈즈다. 정확히는 모르핀과 코카인이었지만 셜록 홈즈가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게다가 우울증 환자―였다는 사실은, 어린이용으로 접한 이야기 덕분에 신기에 가까운 추리로 범죄를 해결하는 명탐정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나에게는 큰 문화충격이기도 했다. 홈즈 자신뿐 아니라 아편굴에서 정보를 얻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코넌 도일이 이야기를 쓸 당시의 영국의 아편은 매우 흔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말 그대로 아편과 함께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극심한 치통을 견뎌내기 위해 아편을 시작하게 되어 그에 따르는 쾌락과 환상을 경험하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통과 노력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아편이 금기가 아니었고 쉽게 구할 수 있던 시대에 진통제의 목적으로 사용되던 아편이 극한 환상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으니 당시 예술사조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쾌락이라 불릴 정도로 영감을 주는 유혹적인 매개였다.

아편이라면 양귀비로 만든다는 것과 청나라와 영국 간에 벌어진 아편전쟁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모르핀이라면 그다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핀은 아편을 정제한 것으로 아직도 최후의 진통제로 사용되고 예전 우리나라에서 기적의 주사로 불리며 오용되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에서도 아편은 아스피린처럼 흔하디흔한 가정상비약이었다. 토머스 드 퀸시 역시 진통제의 목적으로 아편을 시작해 중독되고 평생을 아편과 살아온 그의 고백은 그의 일생만큼이나 솔직하고 담담하다. 아편의 쾌락과 환상은 고통과 함께 자신마저도 집어삼켰지만 자신의 솔직한 고백은 낭만주의 문화의 미학적 추상화로 불렸다. 이 책을 놓고 퇴폐의 본보기를 세울지 모른다는 도덕론자들의 우려와 함께 보들레르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인생의 강렬한 아름다움의 일부로 생각했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영국인 낭만주의자가 아편과 함께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다. 오히려 낭만주의자를 짐어삼킨 아편의 이야기라고 불려도 할지도 모르겠다. 고전주의와 대립된 19세기 낭만주의의 가치와 당시 영국의 사회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애드거 앨런 포, 샤를 보들레르 같은 당대의 문인은 물론 장 콕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편의 환상과 고통,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편이 없었다면 쓰여지지 못할 이야기라는 이유 때문에 이 책의 존재는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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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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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들어도 학교 문집에라도 실리지 않는다면 상자에 처박아 두던 때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그만큼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많지도 않았고 쉽지도 않았다. 지금은 어떠한가? 글을 써서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컴퓨터 전원을 넣고 키보드를 두드린 후 그것을 포스팅하면 그걸로 끝이다. 1인 미디어의 시대다. 읽지 않아도 고민하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그런 시대. 그럴 듯한 사진이 있다면 금상첨화, 지나칠 정도로 경쾌하고 가볍다. 모니터를 보는 사람들 역시 진지하고 긴 이야기보다 짧고 감수성 충만한 이야기를 더 사랑한다.

싱글맘이며 평생 ‘작가 지망생’인 김 작가와 딸 인영은 묘한 동거를 하고 있다. 등단도 하지 못한 김 작가는 동네에 글짓기 교실을 열어 초등학생부터 주부들까지 가르치며 아무런 보상도 없는 글쓰기라는 행복을 함께 느끼고 있다. 엄마를 ‘김 작가’라고 부르는 딸 인영은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장난 같은 글짓기 교실 놀이에서 써내는 글을 쓰레기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있다. 모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김 작가 밑에서 자란 인영은 홀로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하며 엄마와는 달리 ‘진정한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J작가의 혹독한 비평과 지도를 통해 나아진 모습을 보여 주지만 작가의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간 인영은 글을 쓸 만한 여유조차 없는 현실에 좌절해 이혼 후 네일아트를 하며 엄마 김 작가처럼 라이팅 클럽을 열게 된다. 결국 김 작가는 ‘작가 지망생’에서 작가가 되고 인영은 엄마처럼 글짓기 교실의 주인이 된다.

강영숙의 『라이팅 클럽』은 구시대의 이야기다. 표지의 타자기 그림처럼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인생 이야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글을 쓰고 있고 스마트폰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초단문의 시대에 글쓰기에 대한 진지함이라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테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하건 가볍건 무언가를 써서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즐거움은 원초적인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도구가 변한다고 해서 글쓰기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표현하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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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먹어요
아녜스 드자르트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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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결점의 완벽한 사람에게는 정나미가 지레 달아난다. 홀로 완전한 사람 곁에서는 내 존재의 의미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설혹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그건 그의 완벽한 삶을 장식해 주는 인형에 불과하다. 인형이 장식의 효과를 다하지 못한다면 가차 없이 버려질 것이다. 흠집, 오점, 결점 같은 것들은 용납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그 자신도 아니고 인형이 뒤집어쓴 오물이라면 더더욱 참아줄 수 없으니까.

아녜스 드자르트의 『날 먹어요』는 그렇게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아들에 대한 모성애를 상실한 미리암이 간판도 없는 ‘셰 무아(Chez Moi, 나의 집)’라는 식당을 열고 요리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철저하게 미리암 자신의 시선과 내면으로 보여준다.

미리암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의 남편은 허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인간미 없는 남자다. 미리암의 그 완벽한 남편은 막 아들을 낳고 모성애를 주체할 수 없어 감정이 격앙된 아내의 뺨을 냉정하게 갈긴다. 하지만 대체 남편이 왜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식을 낳아준 부인에게 폭력을 가했는지 공감할 수 있도록 충분히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미리암의 이야기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아내의 유난한 감정이 정상적인 자신까지 비정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그러니까 병실의 다른 산모들과 간호사를 보기가 창피해서. 그렇다 해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마치 다른 한쪽의 말을 꼭 들어봐야 할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 순간 미리암에게서 (그때껏 남아 있었다면) 남편에 대한 사랑도, 아들을 향한 모성애도 싹 달아나버린다. 이후 미리암은 위고를 키우면서, 그토록 충만했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서 메말라버린 사랑, 더 정확히는 모성애를 호시탐탐 찾아본다. ‘엄마’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살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 완벽하게 아름답고 총명하고 의젓한 아이, 남편만큼 완전한 아이 앞에서 미리암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모성애를 기다리며 가짜 엄마를 연기한다.

모성애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식에 대해서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콩깍지가 천만 겹쯤 덧씌워져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가. 그 숭고한 희생으로 빛나는 모성애는 자식을 품은 여자라면 본능처럼 유전자에 각인되어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엄마의 가슴속에서 샘솟는 모성애는 도저히 말라버려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내 엄마를 보면서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런 줄 알았다. 나 또한 그럴 줄 알았다. 뱃속의 아기가 무사한지보다 내 몸이 망가지는 아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았을 때는 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몸부림쳤다. 나는 끝내 아기 대신 죽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홀로 살아남은, 그럼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가는 죄책감뿐이었다. 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하는 모성애가 정말 본능인지 의심스러웠다.

임신거부증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 자체를 부정하는 일종의 병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모체가 아기를 가졌는데도 임신하지 않았다고 믿어버리면, 태아는 최대한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자신을 감추며 태동도 없이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도 애초에 모성애를 상실한 엄마에게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채 버려진다. 참혹한 비극이 예정된 원하지 않는 임신의 상황에 이르러서는 절대 안 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자기 깊숙이 숨겨져 있던 모성애를 느끼고 엄마가 되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나 자신에게, 미리암에게 끔찍한 연민을 느낀다.

그런 미리암도 남편과 아들 위고에게서 찾지 못한 여자의 사랑과 엄마의 모성애를 아들의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친구 옥타브에게서 찾은 죄책감까지는 차마 내려놓지 못한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끔찍하게 노력해야 했던, 그러나 끝내 그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미리암이 내내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 보면, 어쩌면 미리암이 그토록 기다리던 모성애는 처음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샘솟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리암이 엄마로서 자연스럽게 모성애를 느끼고 자식을 품을 순간을 위해.

이 책의 번역자는 “가족을 이루는 삼각형에서 꼭짓점 두 개를 동시에 점하는 것, 다시 말해 엄마인 동시에 여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와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가지면 남자가 여자의 남자인 동시에 아이의 아빠인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여자인 동시에 아이의 엄마가 된다. 미리암의 잘못은 단 한 사람에게 그 모든 역할을 다하려 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제 아들이나 다를 바 없는 아이를 꾀어낸 파렴치한 불륜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미리암이 연기하던 인형의 역할은 깨어졌다. 그리고 남편은 “사라져! 나는 당신이 파놓은 진창에 발끝 하나 더럽히고 싶지 않아”라고 미리암을 매몰차게 단죄했다. 그런데 인형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인형이 제 의지로 그 오물을 뒤집어썼다면, 그것은 그가 인형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인형이 그를 버린 것이다. 인형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고 일탈을 꿈꾸는 것은 자신도 심장이 세차게 박동하고 피가 뜨겁게 흐르는 인간임을, 그가 허락하지 않은 것까지 욕망할 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이름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사랑.

미리암이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 사랑하며 어떡하든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요리였다. 맛있는 음식은 허기를 채워주는 동시에 슬프고 아프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마법 같은 위안이 되어준다. 세상에 상처 입어 힘들 때마다 엄마의 밥상이 그리워지는 것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위안 때문이 아닐까. 참으로 고마운 것은 위고가 결국 엄마의 식당 ‘셰 무아’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미리암은 아들 위고를 위한 ‘엄마의 밥상’을 온 마음을 다해 차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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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다 햄버튼의 겨울 - 제1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김유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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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회의 분위기를 잴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그리고 그 저울이 ‘진지하다’와 ‘자유롭다’라는 추를 가지고 있다면, ‘진지하다’ 쪽으로 치우쳐 있던 저울이 점점 ‘자유롭다’ 쪽과 무게중심을 맞추려고 시작한 시기가 바로 70년대 생들이 20대가 되던 때 정도라고 생각한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도 점점 줄어들고, 자기들에게 X세대라는 꼬리표가 붙고, 하루키가 유행하고, 젊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때가 9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이념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는 젊은 작가들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 2010년 말, 시대는 다시 우울해졌고, X세대는 개그 소재로나 써먹을 말이 되고, 하루키는 여전히 책을 쓰고, 젊은 작가들은 40대가 되었다. 나 역시 나이를 먹었지만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젊은 작가들을 여전히 좋아한다. 김유철은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 이 이야기를 써냈다.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은 이 시대 젊은이의 일상을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뭐랄까 굉장히 심심한 이야기다. 흐릿하고 아련한 그런 이야기.

K는 함께 살던 애인 S와 이별했다. 그녀를 사랑했던 K는 방사선 기사로 일하던 병원도 무단결근하며 그만두게 된다. 이혼한 어머니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나 철저하게 혼자가 된 K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온다. 울버햄튼의 축구 경기를 보던 도중 샐러드를 주니 맛나게 먹었던 고양이, 그래서 부르기 편하게 이름 지은 것이 사라다 햄버튼이었다. 고양이와의 생활 이후 K에게는 이런저런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김유철의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은 술술 읽히지만 이야기 자체는 진부하다. 갑자기 떠나버린 애인, 유방암에 걸린 엄마, 숨겨진 가족사 같은 소재들이야말로 닳고 닳아버린 소재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야기 구조에 하루키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아닌가 하는 편혜영의 의심이 납득은 간다. 하지만 하루키의 카피품이라는 악의적으로까지 보이는 평가는, 특히 고양이 탐정이나 재즈를 대신한 최신가요 같은 문화적 취향을 이야기 속에 끼워넣은 이유 때문인 듯하지만 문화적 취향이 없이 최신가요를 듣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닥치는 대로 소비한다는 이유로 캐릭터의 위치를 격하시켰다는 편혜영도 이해할 수 없다. 설마 마일즈 데이비스를 듣는 주인공 정도는 돼야 캐릭터 위치가 격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주인공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닳고 닳은 이별’이나 ‘무기력’한 주인공이 카피품이고 진부할 뿐이라면 대신 불타오르거나 좌충우돌 청춘이 개성적인 것인가? 요컨대 취향의 문제다. 나는 열혈 청춘보다 무기력한 청춘이 더 자연스럽다.

김유철의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좋은 소설은 아니다. 진지하거나 무언가 남는 것이 있는 뚜렷한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들이라면 더더욱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긴장감 없고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라 더욱 그렇다. 자신은 진지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나이를 먹고 돌이켜보는 청춘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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