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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책에 한정해서라면 내가 아편에 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셜록 홈즈다. 정확히는 모르핀과 코카인이었지만 셜록 홈즈가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게다가 우울증 환자―였다는 사실은, 어린이용으로 접한 이야기 덕분에 신기에 가까운 추리로 범죄를 해결하는 명탐정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나에게는 큰 문화충격이기도 했다. 홈즈 자신뿐 아니라 아편굴에서 정보를 얻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코넌 도일이 이야기를 쓸 당시의 영국의 아편은 매우 흔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말 그대로 아편과 함께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극심한 치통을 견뎌내기 위해 아편을 시작하게 되어 그에 따르는 쾌락과 환상을 경험하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통과 노력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아편이 금기가 아니었고 쉽게 구할 수 있던 시대에 진통제의 목적으로 사용되던 아편이 극한 환상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으니 당시 예술사조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쾌락이라 불릴 정도로 영감을 주는 유혹적인 매개였다.
아편이라면 양귀비로 만든다는 것과 청나라와 영국 간에 벌어진 아편전쟁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모르핀이라면 그다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핀은 아편을 정제한 것으로 아직도 최후의 진통제로 사용되고 예전 우리나라에서 기적의 주사로 불리며 오용되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에서도 아편은 아스피린처럼 흔하디흔한 가정상비약이었다. 토머스 드 퀸시 역시 진통제의 목적으로 아편을 시작해 중독되고 평생을 아편과 살아온 그의 고백은 그의 일생만큼이나 솔직하고 담담하다. 아편의 쾌락과 환상은 고통과 함께 자신마저도 집어삼켰지만 자신의 솔직한 고백은 낭만주의 문화의 미학적 추상화로 불렸다. 이 책을 놓고 퇴폐의 본보기를 세울지 모른다는 도덕론자들의 우려와 함께 보들레르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인생의 강렬한 아름다움의 일부로 생각했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영국인 낭만주의자가 아편과 함께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다. 오히려 낭만주의자를 짐어삼킨 아편의 이야기라고 불려도 할지도 모르겠다. 고전주의와 대립된 19세기 낭만주의의 가치와 당시 영국의 사회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애드거 앨런 포, 샤를 보들레르 같은 당대의 문인은 물론 장 콕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편의 환상과 고통,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편이 없었다면 쓰여지지 못할 이야기라는 이유 때문에 이 책의 존재는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