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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갑이나 수첩 사이에 끼워놓고서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서 손때로 다 닳은 빛바랜 사진 한 장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종잇장처럼 대수롭지 않은 그 낡은 사진이 그토록 소중하고 애틋한 것은 그 사진에 ‘추억’이 영원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시절이라 자꾸 뒤돌아본들 별 소용없지만, 그럼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은 좀더 힘을 내어 고달픈 현재를 견뎌낼 수 있도록,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가 되어준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산다고 했던가. 1980년대 중반, 로즈 테라스 요양원의 여든여섯 노부인 니니 스레드굿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곱씹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반짝였던 시절로 돌아가 현재에서 활짝 웃는다. 그 추억 여행으로 삶의 위안을 얻고 힘과 용기를 재충전하는 이는 비단 니니 자신뿐만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놓친 채 초콜릿, 사탕, 쿠키,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먹을거리들에만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던 에벌린 카우치의 심장도 뜨겁게 달군다.
40대 중년 여인인 에벌린 카우치는 이제껏 ‘착한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행실 나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순결을 지키고, 노처녀 소리를 들을까 봐 결혼을 하고, 불감증이라고 남편을 실망시킬까 봐 오르가슴을 연기하고,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자식을 가지고, 괴상한 남성 혐오자 취급을 당할까 봐 페미니스트도 되지 않고, 남편에게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언성 한 번 높이지 못하며’ 살아온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최대한 착하고 바르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지만, 남편은 자기혐오증에 시달리는 에벌린의 깊은 우울에 무감각하고 아이들은 그녀의 시간을 앞질러 낯선 타인으로 그녀를 떠나버렸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 없이 남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급급했던 반평생의 인생에는 그녀 자신마저 남아 있지 않다.
에벌린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과 함께 로즈 테라스 요양원으로 시어머니를 찾아오는데, 이 일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편의 뜻을 차마 거스를 수 없어 억지로 동행하고 있다. 그런 에벌린에게 니니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자신의 추억을 살갑게, 그리고 거침없이 꺼내 보인다. 에벌린은 이제 니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역이었던 시간을 남편보다 더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의 작은 마을, 휘슬스톱Whistle Stop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1980년대 중반 여든여섯 노부인 니니의 명랑한 입술 사이로 활기차게 흘러나오길 고대한다. ‘휘슬스톱을 아시우? 그럼 스레드굿 집안은 알겠지. 휘슬스톱 카페를 연 이지 스레드굿도…….’
휘슬스톱은 마을 가운데 기찻길을 지척에 두고 백인들이 사는 구역과 흑인들이 사는 구역인 트라우트빌로 나누어져 있다. 그 두 구역을 모두 포용해 화합하는 곳이 바로 이지 스레드굿이 루스 제이미슨과 함께 연 휘슬스톱 카페다. 니니의 추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따뜻한 기운을 퍼뜨리는 주인공들은 모두 휘슬스톱 카페를 떠들썩하게 채운다.
에벌린 카우치의 ‘토완다’는 그 주인공들 중에서도 특히 이지다. 에벌린이 니니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자기 삶에서 사라진 자신을 찾아가는 동안, ‘토완다’는 ‘사회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착한 여자’상에 대한 선입관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에벌린’ 대신 에벌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거침없이 해내는 또 하나의 분신이다.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로 성장한 이지에게는 에벌린을 옥죄었던 사회적 편견 따위가 아무런 용도 쓰지 못했다. 카드놀이나 허풍은 말할 것도 없이 남자와 겨루어 무엇에도 뒤지는 법이 없었던 이지는 사랑과 우정과 불의 앞에 열정적으로 용감하고 담대하고 정의로웠다.
쿠 클럭스 클랜(KKK)이 여전히 활보하던 시절, 이지의 카페가 내건 제1원칙은 누구의 심장인들 뜨겁게 데우지 않겠는가. 누구의 가슴인들 통쾌하지 않겠는가. 누구의 마음인들 열리지 않겠는가.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이라면 흑인, 떠돌이 부랑자, 백인 그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고 소박한 음식을 제공한다. (인종차별이 아직 남아 있던 시대이므로 카페 안이 아니라 뒤꼍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러 와야 했던) 흑인에게는 자릿세를 빼고 저렴하게, 돈이 한 푼도 없는 떠돌이에게는 공짜로, 백인에게는 자릿세가 포함된 정가 그대로!’
무엇보다 소설 속에 이지와 루스의 사랑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진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동성애는 아직도 낯설게 다가와 이성애보다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동성애의 당사자인 이지와 루스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가족과 친구들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다. 그건 어쩌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 작가 패니 플래그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닐까. 루스를 위해 벌집에서 맨몸으로 꿀을 따다 주는 이지의 고백은 내 생애 최고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법이었다. 꿀벌을 매혹시키는 꿀벌 조련사가 아니라면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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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는 나직이 콧노래를 부르며 살금살금 떡갈나무를 타고 올라가더니 나무 중간에 뚫린 구멍 속으로 유리병을 든 손을 집어넣었다. 갑자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난 벌 떼들이 구멍에서 떼 지어 나오면서 하늘이 새카매졌다. 순식간에 이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천 마리 벌들로 뒤덮였다. 이지는 1분 정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손을 빼내고는 다시 루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루스가 있는 곳까지 왔을 즈음, 벌들은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고 그 새카맣던 물체는 다시 이지가 되어 서 있었다. 자연산 벌꿀이 담긴 병을 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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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스톱을 가로질러 놓인 철로 위로 기차가 달리는 동안, 그들은 사람 사이에 가장 진실하게 나눌 수 있는 뜨거운 사랑과 뭉클한 우정으로 서로를 감동시키며 추억을 쌓아간다. 그래서일까, 휘슬스톱을 분주하게 오가던 기차들이 점차 운행을 멈추면서 휘슬스톱의 심장도 서서히 멎어가는 풍경은 너무도 쓸쓸하다. 휘슬스톱의 전성기를 누린 사람들은 세월을 따라가고 그들의 아이들은 기차를 따라 도시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고 카페도 문을 닫는다. 사고로 오빠 버디 스레드굿의 생명을 앗아가 이지를 절망 속에 빠뜨리고 이지와 루스의 아들 스텀프를 외팔이로 만들었어도, 기차는 분명 휘슬스톱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었음이 틀림없다. 니니는 아련한 향수 속에서 휘슬스톱을 분주히 오가던 기차 소리를 그리워한다. 그 그리움은 어쩌면 기차가 달리던 시절 휘슬스톱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아닐까. 그곳에서라면 에벌린도 애초에 자기 자신을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