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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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에도 클래식이 존재한다. 꼭 에드거 앨런 포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에게 익숙한 코넌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이 그렇다. 일본 쪽이라면 바로 떠오르는 작가라면 역시 에도가와 란포가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아유카와 데쓰와의 작품 역시 클래식이라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아유카와 데쓰야 『리라장 사건』의 경우 신본격의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한 작품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에는 사회파 추리소설―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이 사회와 인간의 모순, 갈등에 있다고 보고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들을 말한다―득세하고 있던 시기여서 추리소설 본연의 임무라고도 할 수 있는 순수하게 범죄자의 트릭 대 탐정의 두뇌라는 대결을 그렸던 본격소설이 침체된 상태에서 등장한 이 작품은 이후 새로운 본격소설―이를 신본격이라 부른다―들이 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개성들 강하고 자만심과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예술대학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라일락장으로 휴양을 온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증오와 사랑으로 뒤섞인 복잡한 관계를 가진 사이로 사사건건 트러블이 생긴다. 리라장에서 약혼을 발표한 선남선녀 커플, 하지만 이들을 보는 주위 학생들이 시선은 곱지 않다. 다음 날 근처 마을에 사는 숯쟁이가 시체로 발견되고 전날 학생 중 한명이 잃어버렸던 우비와 트럼프 카드 중 스페이드 에이스 한 장이 시체 옆에서 발견된다.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내지만 연이어 학생들이 중독사와 나이프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살해된 시체 옆에는 잃어버린 트럼프 카드―연속된 스페이드카드―가 발견되고 살인은 연이어 계속 일어난다.

개인적으로는 본격파 추리소설을 더 좋아하는 터라 즐겁게 집어든 책인데 의외로 쉽게 쑥쑥 읽히지는 않았다. 더욱이 어느 정도는 한정된 공간의 살인 사건―섬이나 폭설로 갇힌 산장은 아니지만―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첫째 이유로는 사람들이 너무 급하게 많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살인이 발생하고 다음 살인이 발생하려면 첫 번째 살인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에서 다음 사건이 발생해야 할 텐데 리라장의 경우 너무 급하게 자주 죽으니 읽는 독자의 호흡을 정리할 틈을 주지 못한다. 둘째로는 탐정이 너무 늦게 등장한다. 나는 뒤치다꺼리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데 리라장의 경우 매력적인 탐정인 호시카케 류조를 만들어두고도 이야기 말미에 등장시켜 살인 사건을 정리하는 역할로만 맡겨버렸다. 이것은 무능한 경찰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범인 대 탐정이라는 구도를 볼 수가 없어 굉장히 아쉬웠다. 살인 사건마다 등장하는 트럼프 카드를 두고 고민하는 탐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즐거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은 것은 작가에 대한 평가―요코미조 세이시와 에도가와 란포와 동급의 평가라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와 더불어 호시카케 류조라는 탐정을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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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세계문학의 숲 7
마크 트웨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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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아무리 책에 관심이 없어서 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아이였더라도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아동을 위한 작가로만 알려진 마크 트웨인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 중에서도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반기의 낙관주의적 관점이나 후반기의 비관적인 작품 성향의 경계선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유럽의 예술과 문화에 대해 마땅찮은 시선을 보여줬던 것에서 자국의 국내외적인 문제를 주목하게 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내며 그의 작품 경향이 변화하게 되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는 이런 작가의 두 성향이 녹아 있으면서도 마크 트웨인 특유의 유머와 풍자로 가득한 작품이다.

19세기 코네티컷 주의 기술자이자 양키 중의 양키인 행크 모건은 어느 날 기계에 머리를 부딪혀 다치게 되고 기절한다. 다시 깨어나 보니 자신에게 친숙한 미국이 아닌 기사들이 설쳐대는 아서왕 시대의 영국이었다. 행크 모건은 기사에게 잡혀 화형을 당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당시에 개기일식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대 마법사로 속여 위기를 넘길 뿐 아니라 왕국의 2인자 자리마저 차지하게 된다. 이후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동원해 영국사회를 자신이 살던 미국처럼 개조하기로 마음먹고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다. 행크 모건은 여러 모험과 사건을 겪으며 결국 자신의 꿈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는데…….

해설에도 언급한 것처럼 책의 제목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코네티컷 양키와 아서 왕 궁전이라니! 신대륙의 기술 발달이 이루어진 개척지의 기술자 미국인과 신화적이지만 고리타분하고 미신이 가득한 구 영국의 아서 왕 궁전은 묘한 대비를 이룸과 동시에 작품 곳곳에 보이는 경멸적인 농담처럼 보이는 유머는 혹시 미국이 영국에 가지고 있던 미묘한 감정에 대한 표출이 아닌가 싶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정치, 사회적 기반을 만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미국인들에게는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느낌이 강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영국에서 가장 전설적이며 환상적인 판타지라 할 수 있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등장하는 시대를 무대―게다가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는 거의 들러리 수준일 뿐 아니라 기사도는커녕 추문에 휩싸이기까지 한다―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 것은 자국의 독자적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처럼 계급과 관습, 미신이 지배하던 영국을 실용주의의 극한을 추구하는 미국인 기술자가 워프해 영국의 사회 자체를 개조한다는 내용은 그런 의심을 더욱 확실하게 해 준다. 물론 마크 트웨인은 영국 사회를 비꼬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당시 영국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들어 자국의 노예 제도나 정치, 종교적 문제점을 마크 트웨인 특유의 풍자적인 유머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을 아동 소설가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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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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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이나 수첩 사이에 끼워놓고서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서 손때로 다 닳은 빛바랜 사진 한 장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종잇장처럼 대수롭지 않은 그 낡은 사진이 그토록 소중하고 애틋한 것은 그 사진에 ‘추억’이 영원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시절이라 자꾸 뒤돌아본들 별 소용없지만, 그럼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은 좀더 힘을 내어 고달픈 현재를 견뎌낼 수 있도록,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가 되어준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산다고 했던가. 1980년대 중반, 로즈 테라스 요양원의 여든여섯 노부인 니니 스레드굿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곱씹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반짝였던 시절로 돌아가 현재에서 활짝 웃는다. 그 추억 여행으로 삶의 위안을 얻고 힘과 용기를 재충전하는 이는 비단 니니 자신뿐만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놓친 채 초콜릿, 사탕, 쿠키,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먹을거리들에만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던 에벌린 카우치의 심장도 뜨겁게 달군다.

40대 중년 여인인 에벌린 카우치는 이제껏 ‘착한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행실 나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순결을 지키고, 노처녀 소리를 들을까 봐 결혼을 하고, 불감증이라고 남편을 실망시킬까 봐 오르가슴을 연기하고,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자식을 가지고, 괴상한 남성 혐오자 취급을 당할까 봐 페미니스트도 되지 않고, 남편에게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언성 한 번 높이지 못하며’ 살아온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최대한 착하고 바르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지만, 남편은 자기혐오증에 시달리는 에벌린의 깊은 우울에 무감각하고 아이들은 그녀의 시간을 앞질러 낯선 타인으로 그녀를 떠나버렸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 없이 남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급급했던 반평생의 인생에는 그녀 자신마저 남아 있지 않다.

에벌린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과 함께 로즈 테라스 요양원으로 시어머니를 찾아오는데, 이 일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편의 뜻을 차마 거스를 수 없어 억지로 동행하고 있다. 그런 에벌린에게 니니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자신의 추억을 살갑게, 그리고 거침없이 꺼내 보인다. 에벌린은 이제 니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역이었던 시간을 남편보다 더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의 작은 마을, 휘슬스톱Whistle Stop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1980년대 중반 여든여섯 노부인 니니의 명랑한 입술 사이로 활기차게 흘러나오길 고대한다. ‘휘슬스톱을 아시우? 그럼 스레드굿 집안은 알겠지. 휘슬스톱 카페를 연 이지 스레드굿도…….’

휘슬스톱은 마을 가운데 기찻길을 지척에 두고 백인들이 사는 구역과 흑인들이 사는 구역인 트라우트빌로 나누어져 있다. 그 두 구역을 모두 포용해 화합하는 곳이 바로 이지 스레드굿이 루스 제이미슨과 함께 연 휘슬스톱 카페다. 니니의 추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따뜻한 기운을 퍼뜨리는 주인공들은 모두 휘슬스톱 카페를 떠들썩하게 채운다.

에벌린 카우치의 ‘토완다’는 그 주인공들 중에서도 특히 이지다. 에벌린이 니니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자기 삶에서 사라진 자신을 찾아가는 동안, ‘토완다’는 ‘사회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착한 여자’상에 대한 선입관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에벌린’ 대신 에벌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거침없이 해내는 또 하나의 분신이다.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로 성장한 이지에게는 에벌린을 옥죄었던 사회적 편견 따위가 아무런 용도 쓰지 못했다. 카드놀이나 허풍은 말할 것도 없이 남자와 겨루어 무엇에도 뒤지는 법이 없었던 이지는 사랑과 우정과 불의 앞에 열정적으로 용감하고 담대하고 정의로웠다.

쿠 클럭스 클랜(KKK)이 여전히 활보하던 시절, 이지의 카페가 내건 제1원칙은 누구의 심장인들 뜨겁게 데우지 않겠는가. 누구의 가슴인들 통쾌하지 않겠는가. 누구의 마음인들 열리지 않겠는가.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이라면 흑인, 떠돌이 부랑자, 백인 그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고 소박한 음식을 제공한다. (인종차별이 아직 남아 있던 시대이므로 카페 안이 아니라 뒤꼍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러 와야 했던) 흑인에게는 자릿세를 빼고 저렴하게, 돈이 한 푼도 없는 떠돌이에게는 공짜로, 백인에게는 자릿세가 포함된 정가 그대로!’

무엇보다 소설 속에 이지와 루스의 사랑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진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동성애는 아직도 낯설게 다가와 이성애보다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동성애의 당사자인 이지와 루스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가족과 친구들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다. 그건 어쩌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 작가 패니 플래그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닐까. 루스를 위해 벌집에서 맨몸으로 꿀을 따다 주는 이지의 고백은 내 생애 최고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법이었다. 꿀벌을 매혹시키는 꿀벌 조련사가 아니라면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이지는 나직이 콧노래를 부르며 살금살금 떡갈나무를 타고 올라가더니 나무 중간에 뚫린 구멍 속으로 유리병을 든 손을 집어넣었다. 갑자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난 벌 떼들이 구멍에서 떼 지어 나오면서 하늘이 새카매졌다. 순식간에 이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천 마리 벌들로 뒤덮였다. 이지는 1분 정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손을 빼내고는 다시 루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루스가 있는 곳까지 왔을 즈음, 벌들은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고 그 새카맣던 물체는 다시 이지가 되어 서 있었다. 자연산 벌꿀이 담긴 병을 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면서.

 
   

휘슬스톱을 가로질러 놓인 철로 위로 기차가 달리는 동안, 그들은 사람 사이에 가장 진실하게 나눌 수 있는 뜨거운 사랑과 뭉클한 우정으로 서로를 감동시키며 추억을 쌓아간다. 그래서일까, 휘슬스톱을 분주하게 오가던 기차들이 점차 운행을 멈추면서 휘슬스톱의 심장도 서서히 멎어가는 풍경은 너무도 쓸쓸하다. 휘슬스톱의 전성기를 누린 사람들은 세월을 따라가고 그들의 아이들은 기차를 따라 도시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고 카페도 문을 닫는다. 사고로 오빠 버디 스레드굿의 생명을 앗아가 이지를 절망 속에 빠뜨리고 이지와 루스의 아들 스텀프를 외팔이로 만들었어도, 기차는 분명 휘슬스톱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었음이 틀림없다. 니니는 아련한 향수 속에서 휘슬스톱을 분주히 오가던 기차 소리를 그리워한다. 그 그리움은 어쩌면 기차가 달리던 시절 휘슬스톱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아닐까. 그곳에서라면 에벌린도 애초에 자기 자신을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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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탑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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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다 기대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바로 일본 최고의 명탐정인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일 터,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날카로운 추리를 선보이는 그의 모습은 서양 쪽의 여러 명탐정들과 비교해 보아도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이름보다 소년 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의 띠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출판사에서도 이 점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애처로워 보인다).

또다시 띠지 이야기를 하자. 『삼수탑』의 띠지에 실린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최고의 이색작’이라는 문구가 심상치 않다. 다행히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작품을 모두 읽어본 관계로 띠지에 실린 글도 한 번씩 보며 웃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그것은 미묘하게 다르다. ‘불멸의 화제작’, ‘최고의 작품’ 등등의 문구만 보다가 ‘이색작’이라는 문구를 보게 되니 어떤 이야기일지 더 궁금해진다.

부모님을 여의고 이모부의 양녀가 되어 자란 오토네에게 어느 날 변호사가 증조부인 겐조의 유언장을 가지고 찾아온다. 겐조가 지정하는 남자와 결혼하면 무려 백억엔이라는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이 유언장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토네는 얼마 후 열린 백부의 회갑연에서 한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고 자신에게 백억 엔을 가져다줄 정혼자였던 남자가 살해를 당한다. 결국 유언장의 첫 번째 조항은 사라지고 두 번째 조항으로 변경되는데, 그것은 사타케 가문의 사람들이 유산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경쟁자가 줄어들면 자신의 몫이 늘어나는 게 당연한 이치. 사타케 가문에는 피바람이 불어닥치게 되고 오토네는 자신이 첫눈에 반했던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시작하게 된다.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읽기에도 무척 즐거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든다. 왜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앞서 이야기했던 띠지와 관련이 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최고의 이색작’이라는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삼수탑』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역할이나 등장하는 장면이 다른 작품에 비해서 드물다. 첫 사건이 발생하는 부분에 잠깐 등장했다가 마지막에 정리를 하러 나타나는 것뿐, 중간중간 긴다이치 코스케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토네라는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사다케 가문의 이야기가 주는 매력이 워낙 큰 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출판사 리뷰에서는 압박감을 주는 명탐정의 모습이라고 했지만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나마 탐정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야기 초반부에 나타난 오토네의 짧은 묘사가 전부다.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사다케 가문의 이야기에 억지로 긴다이치 코스케를 해결사 역으로 밀어넣었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케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삼수탑』은 재미가 있다. 굳이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지 않아도 로맨스와 스릴러가 잘 버무려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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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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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이야기들을 읽어왔지만,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무엇(작가의 의도, 혹은 진의, 교훈이나 깨달음 등등)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들이밀어 독자를 사로잡고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만나기란 그리 쉬운 경험이 아니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야기 자체에 함몰되어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만 알 수 있을 뿐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막막해진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서 ‘감동’을 ‘감상’이라는 문장으로 술술 엮어내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구태의연한 단어들로 기록하여 실체화하려 애쓰는 순간 ‘감동’은 진부해진다. 케이트 모튼의 『리버튼』이 그런 이야기였다.

아흔여덟 할머니 그레이스 리브스의 시점으로 회상하는 『리버튼』은 젊은 시절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대저택 ‘리버튼’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그녀가 모셨던 영국 귀족인 하트포드 가족과 특히 해너 하트포드의 이야기이자, 시인 로비 헌터의 석연치 않은 자살과 소설 속의 어느 파티에 등장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답 “살인은 대부분 서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지요”에 관한 이야기이며, 너무나 작은 오해가 불러들인 엄청난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쟁과 신세기의 사회적 변혁 속에서도 여전히 구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몰락해 가는 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레이스의 그 모든 이야기는 그녀가 엄마처럼 리버튼 저택의 하녀로 들어간 1914년 여름부터 담담하게 기억하기 시작해서, 리버튼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마지막 파티에서 로비 헌터가 죽은 1924년 6월 21일 한여름 밤으로 치닫는다.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네 번째 이야기 『공포의 계곡』을 막 출간하고, 파티에 가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여성 추리소설가의 명성을 쌓기 시작한 애거서 크리스티를 만날 수 있고, 지금은 너무나 위대해진 “화가들의 그림이 집집마다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던” 이 매혹적인 때는, 빅토리아 여왕의 19세기가 구세기로 물러난 후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20세기가 신세기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리버튼』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트포드 가문에게는 안타깝게도 에드워드 시대는 기술이 진보하면서 귀족과 남성 중심의 사회가 해체와 변화의 급물살을 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남겼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은 이야기 곳곳에 스며 있다.

하트포드 가문의 마지막 상속자인 프레더릭 하트포드는 자동차 사업을 벌이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비행기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는 듯하지만,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한 ‘대량생산’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고 옛 생산 방식을 고수하면서 실패와 좌절과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의 딸들인 해너와 에멀린은 온갖 특권을 누리는 귀족 아가씨이면서도 집안과 아버지로부터의 독립과 모험을 소망하며 여비서를 꿈꾸고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그의 아들인 데이비드와 로비는,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변화하는 세상’ 속으로 모험을 떠나기 위해, 오만한 공명심으로 들뜬 전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너도나도 스스로 참전했던 수많은 청년들을 따라 전쟁터로 나선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리버튼 저택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알프레드는 더 이상 귀족들에게 착취당하는 ‘노예’이길 거부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전쟁’을 대하는 자세다. 리버튼 저택의 화려한 홀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가며 지루한 시간을 죽인다. “솔직히 전 전쟁이 났으면 좋겠어요. (…) 신사들이 군복을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거든요. (…)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선물을 열어볼 생각으로 잔뜩 들뜨는 기분이요.” “(전쟁은) 스포츠와 비슷한 면이 있지. (…) 남자와 소년을 가르는 데는 전쟁만 한 게 없지.” “(전쟁은) 기가 막힌 모험을 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라던데.” 전쟁의 참혹한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그들은 전쟁을 앞두고 묘하게 흥분되어 있다. 전쟁이 그저 일종의 게임이나 가십 거리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단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남자로 성장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 무수한 ‘데이비드’들을 죽였으며, 전쟁이 미처 죽이지 못한 무수한 ‘로비’들을 끝내는 죽일 ‘전쟁 신경증’을 남겼다. 전쟁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파멸시킨다.

그날 한밤중의 비극에 숨겨진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 그 죽음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해너와 에멀린 하트포드 자매, 그 죽음의 당사자인 로비 헌터, 그리고 그들 모두의 죽음을 지켜봤던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비밀과 거짓과 전쟁을 넘나든다. 리버튼 저택의 귀족 아가씨와 하녀로 처음 만난 동갑내기인 해너와 그레이스가 자신만의 갈색 종이봉투를 숨긴 채 ‘도브 부인 비서양성학교’ 차양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레이스는 막 출간되어 따끈따끈한 아서 코난 도일의 신작 『공포의 계곡』을, 해너는 속기 노트를 안고서 비밀을 나눈다. 끔찍한 비극으로 치달을 그 비밀은 해너의 ‘착각’이다. 착각에 불과한 비밀로 싹튼 친밀한 애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그레이스의 침묵은 ‘거짓’이다. 그러니 마지막 책장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질밖에.

   
  “그래, (네가) 외투 밑에 숨긴 게 뭔지 알아.”
“아세요?”
“응, 알아. 나도 같은 걸 숨기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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