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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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수한 이야기들을 읽어왔지만,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무엇(작가의 의도, 혹은 진의, 교훈이나 깨달음 등등)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들이밀어 독자를 사로잡고 마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만나기란 그리 쉬운 경험이 아니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야기 자체에 함몰되어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만 알 수 있을 뿐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막막해진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서 ‘감동’을 ‘감상’이라는 문장으로 술술 엮어내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구태의연한 단어들로 기록하여 실체화하려 애쓰는 순간 ‘감동’은 진부해진다. 케이트 모튼의 『리버튼』이 그런 이야기였다.

아흔여덟 할머니 그레이스 리브스의 시점으로 회상하는 『리버튼』은 젊은 시절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대저택 ‘리버튼’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그녀가 모셨던 영국 귀족인 하트포드 가족과 특히 해너 하트포드의 이야기이자, 시인 로비 헌터의 석연치 않은 자살과 소설 속의 어느 파티에 등장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답 “살인은 대부분 서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지요”에 관한 이야기이며, 너무나 작은 오해가 불러들인 엄청난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쟁과 신세기의 사회적 변혁 속에서도 여전히 구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몰락해 가는 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레이스의 그 모든 이야기는 그녀가 엄마처럼 리버튼 저택의 하녀로 들어간 1914년 여름부터 담담하게 기억하기 시작해서, 리버튼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마지막 파티에서 로비 헌터가 죽은 1924년 6월 21일 한여름 밤으로 치닫는다.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네 번째 이야기 『공포의 계곡』을 막 출간하고, 파티에 가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여성 추리소설가의 명성을 쌓기 시작한 애거서 크리스티를 만날 수 있고, 지금은 너무나 위대해진 “화가들의 그림이 집집마다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던” 이 매혹적인 때는, 빅토리아 여왕의 19세기가 구세기로 물러난 후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20세기가 신세기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리버튼』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트포드 가문에게는 안타깝게도 에드워드 시대는 기술이 진보하면서 귀족과 남성 중심의 사회가 해체와 변화의 급물살을 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남겼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은 이야기 곳곳에 스며 있다.

하트포드 가문의 마지막 상속자인 프레더릭 하트포드는 자동차 사업을 벌이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비행기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는 듯하지만,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한 ‘대량생산’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고 옛 생산 방식을 고수하면서 실패와 좌절과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의 딸들인 해너와 에멀린은 온갖 특권을 누리는 귀족 아가씨이면서도 집안과 아버지로부터의 독립과 모험을 소망하며 여비서를 꿈꾸고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그의 아들인 데이비드와 로비는,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변화하는 세상’ 속으로 모험을 떠나기 위해, 오만한 공명심으로 들뜬 전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너도나도 스스로 참전했던 수많은 청년들을 따라 전쟁터로 나선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리버튼 저택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알프레드는 더 이상 귀족들에게 착취당하는 ‘노예’이길 거부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전쟁’을 대하는 자세다. 리버튼 저택의 화려한 홀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가며 지루한 시간을 죽인다. “솔직히 전 전쟁이 났으면 좋겠어요. (…) 신사들이 군복을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거든요. (…)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선물을 열어볼 생각으로 잔뜩 들뜨는 기분이요.” “(전쟁은) 스포츠와 비슷한 면이 있지. (…) 남자와 소년을 가르는 데는 전쟁만 한 게 없지.” “(전쟁은) 기가 막힌 모험을 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라던데.” 전쟁의 참혹한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그들은 전쟁을 앞두고 묘하게 흥분되어 있다. 전쟁이 그저 일종의 게임이나 가십 거리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단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남자로 성장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 무수한 ‘데이비드’들을 죽였으며, 전쟁이 미처 죽이지 못한 무수한 ‘로비’들을 끝내는 죽일 ‘전쟁 신경증’을 남겼다. 전쟁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파멸시킨다.

그날 한밤중의 비극에 숨겨진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 그 죽음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해너와 에멀린 하트포드 자매, 그 죽음의 당사자인 로비 헌터, 그리고 그들 모두의 죽음을 지켜봤던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이렇게 비밀과 거짓과 전쟁을 넘나든다. 리버튼 저택의 귀족 아가씨와 하녀로 처음 만난 동갑내기인 해너와 그레이스가 자신만의 갈색 종이봉투를 숨긴 채 ‘도브 부인 비서양성학교’ 차양 아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레이스는 막 출간되어 따끈따끈한 아서 코난 도일의 신작 『공포의 계곡』을, 해너는 속기 노트를 안고서 비밀을 나눈다. 끔찍한 비극으로 치달을 그 비밀은 해너의 ‘착각’이다. 착각에 불과한 비밀로 싹튼 친밀한 애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던 그레이스의 침묵은 ‘거짓’이다. 그러니 마지막 책장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질밖에.

   
  “그래, (네가) 외투 밑에 숨긴 게 뭔지 알아.”
“아세요?”
“응, 알아. 나도 같은 걸 숨기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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