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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홀 1 -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
힐러리 맨틀 지음, 하윤숙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튜더 왕조의 헨리 8세를 둘러싼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 제인 시모어의 스캔들은 영국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권력과 부의 정점에 유일한 존재로 우뚝한 왕을 홀로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왕의 그늘에서 ‘질투’를 ‘나의 힘’으로 삼아 온갖 모략을 짜는 여인들의 암투는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각종 역사물들의 단골 소재가 되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숙종을 둘러싼 인현왕후, 장희빈, 최숙빈의 이야기처럼 영국에서 헨리 8세와 캐서린, 앤, 제인의 이야기도 끊임없이 회자된다. 그 극적인 이야기는 영국 작가 필리파 그레고리에 의해 역사소설 『천일의 스캔들The Other Boleyn Girl』로 쓰였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국 감독 저스틴 채드윅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헨리 8세를 주인공으로 한 튜더 왕조의 이야기는 미국 드라마 「튜더스」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리고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이 있다. 하지만 『울프 홀』을 ‘헨리 8세와 그를 독점하기 위한 세 여인의 스캔들’을 이용해 양산한 또 하나의 그저 그런 이야기로 단순히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먼저 헨리 8세도, 캐서린도, 앤도, 제인도 주인공이 아니다. 『울프 홀』의 진정한 주인공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들의 등 뒤에서, 혹은 발아래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그들이 정점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을 대신해 손에 어둠의 피를 묻히는 자다. 이 소설에서는 헨리 8세를 위해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주도하고 대신 앤을 왕비의 자리에 앉힌 토머스 크롬웰이 바로 그자다.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 8세 시대를 다루는 역사물에서 주로 비중 없이 미미하게 다루어지거나 비열한 모략가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세계사 수업 시간에 ‘청교도혁명―크롬웰’을 열심히 외운 덕분에 ‘크롬웰’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겠지만, 이는 ‘올리버 크롬웰’로 ‘토머스 크롬웰’보다 100년 후의 인물이다. 게다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과 다시 결혼하기 위해 헨리 8세가 막강한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로마 가톨릭에 등 돌리고 영국국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고는 배웠어도 그 기반이 되는 ‘수장법’의 초안을 마련한 토머스 크롬웰에 대한 언급은 듣지 못했다.) 그 (숨은) 과거의 인물은 힐러리 맨틀의 손끝에서 너무나 우아하고 섬세하며 서정적이어서 지독하게 아름다운 문장들의 필터를 거쳐 현대인에게도 매혹적인 인간으로 되살아난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폭력적인 대장장이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는 토머스 크롬웰의 어린 시절부터 보여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하는데, 힐러리 맨틀은 ‘대장장이의 아들’ 설을 선택했다.) 그렇게 가장 밑바닥 신분의 비천한 딱지를 달고 태어나 프랑스 용병, 부유한 이탈리아 상인 집안의 회계사, 추기경 토머스 울지의 변호사……를 거쳐 권력의 정점인 헨리 8세의 총애 속에서 최상층의 중심에 우뚝 서기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토머스 크롬웰의 일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울프 홀』을 펼쳐 들면 곧장 발견하게 되는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과 튜더 왕조의 복잡한 가계도, 그리고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앤 불린, 제인 시모어는 그 대서사시 속에 올올이 얽혀든다. 처음에는 여기에 먼저 압도되어 소설을 읽어 나갈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지만, 힐러리 맨틀의 근사한 문장들에 감탄하다 보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사실 헨리 8세의 스캔들 자체는 내게 그다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에만 기대어 『울프 홀』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힐러리 맨틀의 필력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어쩌면 번역이 훌륭했을지도!) 힐러리 맨틀은 『울프 홀』의 후속 작품을 준비하고 있단다. 『울프 홀』은 토머스 크롬웰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무효소송에 동의하지 않는 토머스 모어를 단두대에 세우고, 훗날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이자 에드워드 6세의 어머니가 되는 제인 시모어의 집 ‘울프 홀’로 출발할 계획을 세우는 장면에서 끝난다. 그 이후는 아마도 1540년에 헨리 8세가 직접 지명한 서투른 사형집행인의 도끼질 세 번을 당해 죽기까지 토머스 크롬웰의 비참한 몰락을 그리겠지만, ‘힐러리 맨틀’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그 몰락이 어떻게 다가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울프 홀』은 너무나 빼어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