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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능하면 영국인이어야 할 것. 키는 적당하고 살은 찌지 않아야 하고 머리카락은 백발이면 더할 나위 없으며 우아하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할 것. 비밀을 많이 알고 있어도 절대로 과묵할 것.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 것. 이 정도면 어딘지 익숙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고풍스럽고 커다란 대저택을 방문하게 되면 맞아줄 것 같은 사람, 바로 집사에 대한 클리셰다. 그것도 아주 전형적으로 훌륭한 집사 말이다. 좋은 집사라면 마치 감정도 없고 임무에만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로봇처럼 행동해야 하지만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결국 훌륭한 집사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집사 스티븐스의 이야기다. 겉으로 드러난 집사의 모습과 속으로 꼭꼭 숨겨둔 집사가 아닌 인간 그대로의 모습 두 가지의 이야기.
평생을 달링턴 홀에서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스는 여행을 떠난다. 새로 주인이 된 미국인 패러데이에게 자신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스티븐스에게 휴가를 주고 잠시 여행을 떠날 것을 권유받는다. 스티븐스는 새로운 주인의 권유도 있었지만 예전에 함께 달링턴 홀에서 일했던 총무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저 추억을 회상하고 자신의 처지에 한숨 섞인 편지였는데 스티븐스는 켄턴 양이 다시 달링턴 홀로 돌아오고 싶어서 편지를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여행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켄턴 양에게 일자를 제안하기 위한 집사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자꾸 되뇐다.
켄턴 양을 찾아가는 동안 스티븐스는 과거의 추억에 잠긴다. 아버지의 임종을 눈앞에 두고도 국제 회담을 매끄럽게 진행시킨다는 이유로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 나치에 협력했던 전 주인인 달링턴 경이 유대인 하녀를 내치는 것을 알고도 막지 않았던 것, 그리고 지금 찾아가는 켄턴 양이 자신에게 적극적이었던 감정을 눈치 채고도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 등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의 스티븐스에게는 사사로운 감정보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과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혼이 되어 돌아보는 자신의 삶은 진실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슬픔과 후회가 밀려온다.
좋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마지막을 마무리 짓느냐가 중요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그 제목에 걸맞은 덤덤한 마무리로 가슴속에 계속 남게 하는 이야기다. 지나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그 삶이 서글픈 것이었다고 깨달아도 ‘집사’ 스티븐스는 여전히 달링턴 홀을 지키고 있을 것이며, 새로운 미국인 주인을 위해 ‘유머’를 연습할 것이다. 그것이 스티븐스에게 남아 있는 나날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