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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보낸 일년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
안토니오 콜리나스 지음, 정구석 옮김 / 자음과모음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어쩌면 남들에게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어도 내게는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는 설렘을 안고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예술과 삶, 사랑과 성장을 미학적으로 접근한 소설이라니, 게다가 “탁월한 언어 감각의 소유자”인 스페인의 저명한 시인이 ‘서사뿐 아니라 풍부한 시적 상징과 은유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소설이라니 어떻게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장을 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이럴 때 다소 위안이 되어주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번역서를 읽다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머리가 나쁘다고 자책하지 마라. 번역서는 오역이나 나쁜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이게 올바른 우리말 문장이 맞는지, 그럼에도 내 머리가 둔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읽을 수밖에 없는 건지 분통이 터졌다. 더구나 번역 후기에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서 부딪치는 난관과 어려움’을 고백하고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에게 직접 문의한 노고’까지 언급하면서 번역에 관한 문제에 방어막을 쳐두었으니, 다치바나 다카시를 내세워 내 나쁜 머리 대신 나쁜 번역을 탓하려다가도 또 그 반대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꾸역꾸역 읽어내고 다시 한 번 책장을 들추니 분통을 터뜨리게 만든 번역(직역)투의 문장들도 그새 익숙해져 꽤(?) 읽을 만해졌던 것이다. 나처럼 이 책을 읽고 싶은 대한민국의 평균 독자라면 최소한 재독할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번역에 대한 실망감으로 뒤끝 길게 투덜거리게 만들 만큼, 안토니오 콜리나스의 『남쪽에서 보낸 일 년』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인 것은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어느 독자의 경험담이었다. 지인의 스페인어문학과 교수님이 스페인어 원서를 읽고서 너무 아름다운 소설이라 추천해 주고 싶지만 아직 번역본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더란다. 오호, 통재라! 내가 우리말을 본능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듯이 스페인어에도 극한의 언어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스페인어의 ‘스’ 자도 낯선 처지이니 이보다 더 아쉬운 노릇이 있을까.
어쨌든 이쯤에서 각설하고 『남쪽에서 보낸 일 년』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문학을 사랑하는 고등학생 하노가 가슴 아픈 첫사랑이라는 통과의례를 치르면서 한층 성장해 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안토니오 콜리나스의 작품에서는 ‘서사’가 아니라 혹독한 성장통을 겪는 하노의 ‘시선’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시와 음악과 미술과 자연의 오솔길을 자유로이 거닐면서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소년의 시선은 줄곧 ‘미학’을 향해 있다.
사실 ‘미학’이라는 단어를 나부터도 은근히 많이 들먹였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개념의 의미가 더욱더 모호해져 버렸다. 그런데도 또 ‘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저자 후기’ 때문이다. ‘저자 후기’에서 안토니오 콜리나스는 북쪽의 고향과 남쪽의 기숙학교, 순수한 소녀 디아나와 성숙한 여인 마르타, 시골과 도시 등 이분법적으로 제시해 하노로 하여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미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의도했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공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 소설이 ‘미학 교육’을 위한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커버를 둘러쓰고 비밀리에 행하는 밤의 독서!” 같은 사소한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시와 운명에 집착하는 하노의 내면은 과잉된(게다가 다소 불합리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자의식의 극치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하노의 시절은 분명 성장을 위한 필수 단계이지만, 어른이 된 나는 왠지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쓱해진다. 여러모로 아쉽기 그지없지만, 이 소설에서 ‘남쪽’으로 지칭되는 스페인 남부 도시, “경이로운 것들에 둘러싸여 눈 둘 곳을 잃게 하는 오래된 집들과 모스크가 있는 그곳” 코르도바의 자연에 대한 묘사는 아주 아름다웠다. 또 하노와 디아나의 이름에 야누스와 야나의 상징성을 덧씌운 점도 돋보였다. 어쩌면 이 소설에는 이런 놀라운 상징들이 가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