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 그리고 같이 자려고 안달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2.

난 고등학교가 싫어. 구내식당을 ‘영양센터’라고 부르더라. 참 괴상하지 않니?




3.

복도에서 손을 잡고 다니는 애들을 보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는지 골똘히 생각해. 학교에서 댄스파티가 있을 땐, 뒷자리에 앉아 발가락 장단이나 맞추며 ‘자신들만의 노래’에 맞춰 춤추는 커플이 몇 쌍이나 되는지 따져보고 있어. 간혹 여자애들이 남자친구의 재킷을 입고 다니는 걸 보면서는 소유물의 개념에 대해 생각했고 모두들 정말 행복한 건지 상상해봤어. 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해. 진심으로 모두들 행복했으면 좋겠어.




4.

“찰리, 언제나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니?”

“그러면 나쁜 건가요?”

난 누군가가 진실을 말해주길 원했어.

“뭐, 꼭 그렇지는 않지만 가끔 현실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생각 속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렇게 하는 게 나쁜 건가요?”

“그럼, 물론이지.”




5.

평상시에 나는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다녀.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무슨 뜻이냐 하면, 할아버지께서 ‘옛날에’ 학교까지 걸어다녔다고 하셨는데, 나도 이 다음에 할아버지처럼 자식들한테 걸어다녔다고 말해주고 싶거든. 데이트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으면서 자식들에게 해줄 말까지 생각하고 있는 게 어울리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6.

그건 마치 사진기로 샘을 찍고 나서 사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야. 사진이 아름다운 이유를 자신이 잘 찍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중략)..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면서 그 여자의 진짜 모습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방법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7.

그 사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보통 옛날 사진들은 소박하고 생기 넘쳐 보이잖아. 그리고 사진 속의 인물들은 언제나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거든.




8.

운동장에서 방금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선수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야. 바로 그 순간이 그 선수에게는 영광스런 시간일 거야. 그리고 터치다운을 하는 그 순간이 언젠가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겠지. 터치다운을 했거나 홈런을 친 그들은 모두 언젠가는 어떤 아이의 아빠가 될 거니까.

아이들은 그때의 사진들을 보면서 아빠가 예전에는 더 풋풋하고 잘생겼고 또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이 다음에 잊지 않고 기억해두었다가, 내 아이들에게 너희들도 오래된 사진 속의 나만큼 행복해 보인다고 말해주고 싶어.




9.

난 친척들과 재미있게 지내고 있거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가 몇 가지 있어. 첫 번째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무척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는 거야. 두 번째는 다투는 내용이 언제나 똑같다는 점이야.




10.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을 알게 되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아.




11.

그곳에서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사진 속의 모습이 추억이 아니던 때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누군가 저 사진들을 찍었을 것이고, 사진 속의 사람들은 그때 실제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겠지.




12.

난 절대로 헬렌 이모에게 작별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았어.




13.

너도 나처럼 천년 동안 잠들고 싶은 때가 있는지 모르겠다.




14.

글을 쓰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15.

샘은 텔레비전을 비난했고 패트릭은 정부를 비난했어. 크레이그는 방송사를 비난했고 밥은 화장실에 갔어.




16.

그래서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주인공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그래서 누나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어. ‘고머 파일 쇼’가 방영 중이었고 누나는 차분하게 분위기에 빠져 있었어. 누나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혼자 있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잠깐 그 쇼를 지켜봤지만 오히려 그 책보다 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수학 숙제나 하기로 마음먹었어. 하지만 그것 또한 잘못 선택한 거였어. 지금까지 수학을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거든.

하루종일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야.

그래서 엄마를 도와드리려고 부엌엘 갔지만 찜냄비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아빠가 오실 때까지 방에서 가서 책이나 읽으라는 소리를 들었어. 하지만 책 때문에 이 모든 뒤죽박죽이 시작된 거였잖아. 다행히 책을 다시 읽기 전에 아빠가 오셨지만 하키 게임을 봐야 한다면서 ‘원숭이처럼 어깨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셨어. 잠깐 동안 아빠와 함께 하키 게임을 보면서 선수들의 출신 국가를 계속 물어봤어. 아빠는 화면에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그건 아빠가 졸고 있기는 하지만 채널은 돌리지 말라는 뜻이야. 아빠가 누나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라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했어. 하지만 누나는 부엌에 가서 엄마나 도와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만 엄마는 다시 방에 가서 책이나 읽으라고 하셨어. 그래서 그렇게 했어.




17.

하지만 메리 엘리자베스는 뭔가 특별한 것을 느꼈대. 그 애는 줄곧 ‘명쾌한’ 영화였다고 했어. 너무나 ‘명쾌하다’는 거야. 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영화가 매우 ‘명쾌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야.




18.

사실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있어. 내 말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 차이는 없겠지.




19.

“난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너를 위해 살진 않을 거야.”

그 말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타인들과 인생을 공유하기 위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아.




20.

“찰리,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난 그런 걸 느낄 수 없어. 듣기엔 참 좋은 이야기지만 나는 가끔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든. 네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가 돼준다는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기댈 어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어깨를 둘러줄 팔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할 건데? 구석에 가만히 앉아 너의 인생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앞세우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 그렇게 해선 안 된다구. 너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해.”




21.

샘이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났을 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고, 크게 말하는 것도 아닌 행동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게다가 내 말 좀 들어봐. 이 직장 여성아. 만일 네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에게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돼. 듣고 있어?"

"어째서?"

메리 제인이 물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라고 하니까. 그게 이유야. 남편들이란 모름지기 자기 아내는 다른 남자가 다가올 때마다 구역질을 하면서 한평생을 보낸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농담이 아니야. 아, 얘기할 수도 있어. 하지만 절대 정직해서는 안 돼. 곧이 곧대로 말하지는 말란 말이야. 남편에게 전에 어떤 잘생긴 남자를 만났다고 말을 하려면, 동시에 그 남자는 좀 지나치게 잘 생겼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만약 네가 재치있는 남자를 만났다고 말하려면, 그 남자는 약간 교만하거나 교활한 남자였다고 말해야 하는 거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 남편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가엾은 남자 일로 네 골치를 썩일 테니까"

 

2.

"우리 대학 일학년 때 기억나? 난 보이시에서 산 그 갈색과 노란색이 섞인 옷을 입고 있었지. 그런데 미리엄 볼이 뉴욕에서는 아무도 그런 옷을 입지 않는다고 말해서 내가 밤새도록 울었잖아."

엘로이즈는 메리 제인의 팔을 흔들었다.

"난 멋있는 여자였어, 안 그래?"

그녀가 애원했다.

 

-이상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중..

 

 

3.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 위 더 앞쪽, 그러니까 더 멀리 놓았고, 나는 그녀가 차고 있던 알이 엄청 큰 손목시계로 뭔가 해보고 싶어했던 것-그녀에게 그것을 허리에 차보는 건 어떨까 하고 제안한다든가-이 기억난다.

 

4.

"눈동자가 아주 선명한 초록색이구나. 그렇지 않니, 찰스?"

찰스는 그런 질문에는 이런 표정이 마땅하다는 듯 물고기 같은 시선을 보이더니, 의자에서 몸을 아래로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러다가 급기야 몸뚱이 전체를 테이블 아래에 집어넣고서 레슬링 선수의 브리지 같은 자세로 머리만 의자 바닥에 남겨놓았다.

"내 눈은 오렌지 색이에요"

 

5.

"아버지는 내가 유머 감각이라곤 전혀 없다고 말했죠. 그게 없어서 인생을 마주할 채비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구요."

그녀를 지켜보면서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진짜 절박한 상황에서 유머 감각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아버지는 소용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것은 반박의 말이 아니라 신념의 말이었다. 

 

-이상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중..

 

6.

"...(중략)...내 말은 그녀가 근본적으로는 아주 좋은 애라는 거에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면....그 일에 한번 덤벼들어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빌어먹을 바보겠죠...(중략).."

 

-이상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 중..

 

7.

행복과 즐거움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행복은 고체이고 즐거움은 액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언제나 너무 늦게 선명해진다. 나의 즐거움은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그릇에서 새나가기 시작했는데..(중략)

 

8.

나는 근와 함께 수도원 정원 중에서도 저 멀리 초록이 우거진 구역으로 걸어가, 갑자기 어떤 죄의식도 없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나를 보았다. 그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가 너무 황홀해서, 마침내 나는 그것을 놓아 버리고 잠에 빠져버렸다.

 

9.

거기서 나는 뉴욕의 미술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육 주인가 팔 주인가를 보내면서, 여름에 활동하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반바지를 입은 미국 여자라는 사실을 음미했다.

 

-이상 '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시대' 중..

 

10.

"난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즐겁게 지내시길 바라요.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은 인생을 즐기고 싶어하니까요...하지만 그들은 나와 부퍼-내 동생이죠-를 그런 식으로 사랑하질 않아요. 내 말은 그들은 우리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가 없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들은 우리를 조금씩 지속적으로 바꿀 수 없는한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를 사랑해야 할 몇 가지 이유를 사랑해요. 대부분은 더 그렇죠. 그런 방식은 좋지 않아요."

 

-이상 '테디'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자유의 무늬> 이후 두 번째로 읽는 고종석의 책이다. 그의 생각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왜 '가장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한문장 한문장을 따로 떨어뜨려놓고 봐도 깔끔한 문장이다. 접속사가 별로 쓰이지 않는대도 맥락안에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어휘 구사력과 문장력은 나에게 열망의 대상이다. 이 책을 읽다가 고종석에게 이 메일을 보내 내 고민을 털어놓을 뻔 했으니 내 부러움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리라.

 

움베르토 에코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가 책의 두께에 비해 정말 많은 생각들을 하게 했던 책이라면, 이 <코드 훔치기> 또한 비슷한 성격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저 객관적 사실의 논리적 연결일 뿐이라고, 훌륭한 논술 교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정말 훌륭한 논술 교재다) 여기 실린 40편의 칼럼들은 정말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하나 하나가 쉽지 않은 문제여서 읽는 사람을 정말 고민하게 만든다.

 

언뜻 읽으면 자기 주장이 없는 듯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보인다. 그걸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방식으로(소설이나 시가 아닌데) 은근히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니 참 놀라운 능력이다.

 

 

 

 

독후감을 길게 쓰지 못하는 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주의가는 은자가 아니다. 공심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하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과 연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의 노마드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과 노트북은 그들이 지구 문명의 망 속에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표지다. 개인주의는 또 이기주의와도 무관하다. 개인주의는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춘다는 고전적 자유관의 심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시대' 중..

 

 

2.

문화적 상대주의는 인종적 문화적 집단이나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일종의 신인종주의로 귀결한다. 상대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다양한 문화적 차이, 곧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에다가 서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차이의 권리'는 교묘하게도 '권리의 차이'로 전복된다. 이것은 '선의의' 식민주의자들이 지닌 순진한 보편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인류의 단일성과 가치의 보편성을 부정하며 차이를 특권화함으로써, 그들은 자아로의 퇴각과 소통의 부재와 타인의 배제를 부추긴다. 그러니까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주의자들처럼 보편적 가치들을 포기하는 순간, 화해의 기본 원리인 톨레랑스나 상호존중이 존재 근거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들'' 중..

 

 

3.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두 개의 다위니즘' 중..

 

4.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구토>를,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런 깨달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다.

 

-'문학을 위하여' 중..

 

 

5.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부활시킨 1896년은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 정신적 빈곤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을 때다. 물론 쿠베르탱이 그것을 의식해서 올림픽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의 욕구불만을 잠재워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도와주는 데 필요한 세 가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를 술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둘째, 스포츠는 사회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파괴 욕망을 발산하게 할 수 있었다. 셋째, 스포츠는 평화와 공정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할 수 있었다. ..(중략)..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었다면, 시모노가 보기에는 스포츠야말로 인민의 새로운 아편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중략)..실상 쿠베르탱도 인종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다른 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우월함을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정치 선전장이 된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중략).. 경기 종목과 그 종목들에 배당된 메달 수를 보아도 올림픽은 여전히 부유한 나라들의 행사다. 게다가 자기 나라의 운동 선수들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쏟아 붓는 민족주의적 열정들은 전체주의의 토양이 되고 있다.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상업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광란들이 올림픽 경기라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종교의 외투 속에 안전하게 몸을 가추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스포르티부스' 중..

 

 

6.

이혼과 재혼이 흔하게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 동안 그의 가족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여러 가족에 차례로 소속될 것이고, 아이들도 차례로 여러 부모를 갖게 될 것이다. 가족이 유연화되는 것이다. 그때 가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소속돼온 여러 가정들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말이 될 것이다.

 

-'가족의 유연화' 중..

 

 

7.

노동자가 줄어든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역사가 목격해본 적이 없는 기괴한 방식의 세대 교체를 겪고 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자리를 물려받을 그 신세대 노동자는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리프킨이 '실리콘칼라'라고 부르는 기계 노동자다. ..(중략).. 최초의 목화따는 기계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을 농장 경제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켰을 때,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북부 도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해 제조업 분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산업에서 서비스 부문까지 생산 활동의 전 영역을 감당하고 있는 실리콘칼라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21세기의 노동력은 어디로도 흡수되지 않는다.

 

-'노동의 종말' 중..

 

 

8.

냉전이 끝난 뒤에도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분쟁 뒤에는 어김없이 민족주의가 있다. 그전적 민족주의 시기를 비롯한 역사의 드문 국면을 제외하고는, 민족주의는 대체로 이성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것은 낭만주의로 시작해서 전체주의로 끝났다. 민족주의에 대한 제어, 더 나아가 애국심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진보의 디딤돌, 진보의 걸림돌' 중..

 

 

9.

이를테면 '좌익'이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교조적인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냉혹한 테러리스트들이지만, '좌파'라는 말에는 뭔가 합리적이고 온건하고 지적인 이미지가 배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익'이라는 말에서는 해방기 서북청년단이나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광신적 반공주의자가 연상되지만, '우파'라는 말에서는 예컨데 소설가 카뮈나 사회학자 레몽 아롱 같은 부드럽고 지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얼굴이 연상된다. ..(중략).. 물론 이념적 적대자로서의 상대편을 지칭할 때는 '좌익', '우익'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좌우의 지형' 중..

 

 

10.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로운 인간'의 지혜는 무엇보다도 다른 호모 사피엔스를 어떻게 죽일까를 궁리하는 데 쓰여왔다.

 

-'전쟁과 평화' 중...

 

 

11.

실상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중략).. 그렇다면 복잡한 경어체계를 지닌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지닌 셈이다. ..(중략).. 그렇다면 경어법에 서툰 젊은 세대가 반드시 계도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와 위계' 중..

 

 

12.

실제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답변으로 쓰여졌다. '희망의 원리'의 반대 명제로서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 유토피아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로흐가 보기에, 유토피아는 인간 의식의 본질적 구성 부분이다. ..(중략).. 그리고 이런 희망의 원리는 베이컨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를 구상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요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휴머니즘이다. ..(중략).. 요나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다의적인 존재이고, 선과 악 사이에서 환원불가능하게 분열된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내재한 불행과 고통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지만 우리가 존중하고 복종해야 할 진리는 '진정한 인간'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진정한 인간은 그 자신의 귀함과 천함, 위대함과 비참함, 행복과 고통, 정당함과 죄업, 요컨대 그 자신의 이 모든 양가성과 분리할 수 없다."고 쓴다. 요컨대 양가성은 요나스가 보기에 인간의 본질이다.

 

-'유토피아와의 결별' 중..

 

 

13.

그러나 이것과는 정반대의 시나리오가 있다. 이 시나리오가 그리는 미래는 조지 오웰의 <1984년>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섞어놓은 악마적 세계다. ..(중략).. 이 시나리오의 지지자들은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 주목한다. 첫째, 인터넷에 내재한 동질화 성향이 대중의 획일화를 부추길 것이다; 둘째,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이 커지면서 지배계급의 성원들 사이에 공공 안전 심리가 크게 상승할 것이다; 셋째, 국가와 거대 기업의 이해관계를 또렷이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중략)..

사이버 세계에서는 단발적 행위가 인간 관계보다 중시되고, 전문가가 정치가보다 중시되며, 지식이 정의보다 중시되고, 가상이 현실보다 중시된다.

 

-'인터넷과 자유'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일까.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서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 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 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 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치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2.

한 작품의 해피 엔딩은 과정의 줄거리가 가열찰수록 더욱 행복하게 느껴진다. 고뇌와 비참과 과오가 아무리 처절했어도 종말이 행복하면 그 과정은 그것으로 잊혀진다...(중략)...그러나 해피 엔딩으로써 슬펐던 과정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의 경우다. 슬픔을 겪은 주인공은 종말의 행복보다도 불행했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 차이는 불행을 체험한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의 차이이다. 

 

3.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4.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라는 것은 대개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만 같다. 텔레비전 분야의 전문가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장면의 시청자 군중을 볼 때마다 완전한 사고정지증 환자들을 보는 듯한 딱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5.

얼마 전 정부는 외국인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한다는 의도에선지 외국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성들에게 통행금지 시간을 면제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관광안내양'인가 뭔가 하는 공식명칭으로 이 특전이 부여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그 이유는 물론 외화획득이라는 국책에 이들의 공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는 마음이 무거웠다.

외화획득! 참 좋은 말이다. 개인도 돈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행세를 할 수 있는 사회이고 보면 정부도 국민도 외화를 버는 일이면 무엇이든 '성스러운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풍미해 있다.

..(중략)..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 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댓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6.

몇천년이 지났는데도 소크라테스를 죽인 독배는 아직도 넘쳐 있는 듯하다.

 

7.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대에 미국정부 농무성에서 사회과학 여러분야를 망라한 지도급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국민생활, 특히 농민생활의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는 문제를 토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도적 권위자라고 하는 경제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들은 며칠 동안의 토의 끝에 그 문제를 무시하는데 합의했다. 이유인즉 과학자라는 것은 오직 '사실'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목표'라든가 '바람직한 것'의 문제는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철학이나 종교의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는 견해 때문이었다.

 

8.

권력조작과 관료통제가 심할수록 민중은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무관심의 도피방법을 택하게 마련이다.

 

9.

하나는 모든 정부 정책이나 방침이나 결정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현명'이겠고 하나는 그것을 애써 구분하려는 '우둔'일지도 모른다.

신문사 논설도 그렇고 라디오의 해설이 그렇고 텔레비전의 대담이 그렇고, 어쩐지 모든 사람들이 '현명'하기만 한 것 같아 때로 우둔한 사람도 하나 둘쯤 있어줬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10.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경제, 재계, 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기자는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의 현체제의 수익집단인 지배계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의 동화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중략)..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 따위가 아무런 내적 저항감도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의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천 342개 면 가운데 거의 반절인 630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중략)..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11.

필자의 견해로서는 오히려 식민지적인 가치관, 문제의식,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이 나라의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보다는, 차라리 공장노동자나 농사꾼이나 지게꾼이 뭣인가를 느끼고 분발해서 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었다면 우리의 기자풍토가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학지식을 자못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사회가 타파해야 할 권위주의가 아닐까 한다.

..(중략)..

사이비 기자란 사실을 보고도 기사화하지 못하거나, 기자가 애써 취재해온 기사를 사리와 권력 때문에 자의로 조작, 요술을 부리거나, 백성의 이익이 뭣인지를 알면서도 강자의 대변자 노릇에 만족하는 각급의 기자 이외에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