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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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허접한 역사철학에서 끄집어내야 하는 것.

아마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았을 책. 여자친구의 경우와는 다르게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책 제목이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 기원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았다.(하지만 확실히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말 나이스한 제목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불평등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불평등에 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세상은 원래 평등하거나 공평하지 않다. 그랬던 적도 없고.’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불공평이나 불평등에 관한 푸념들, “아,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 그건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

-반대로 “세상 참 공평해”라고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경우(주로 남의 불행에 고소해하거나 자신의 행운에 뿌듯해 하는 경우가 많다.)도 많다는 걸 떠올려보면 불평등에 관한 인간의 생각들이란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다 자기 경우에 맞춰서 그때그때 적절하게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사용되고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 예로부터 사슴 가죽에 가로왈(녹피에 가로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이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

 

루소의 역사철학은 맑스의 유물사관이나 헤겔의 관념사관처럼 많이 논의되지 않는다.(루소의 역사에 대한 생각에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 내용을 고려할 때 과분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듯싶으나 나는 철학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루소의 그것도 철학이라고 해주고 싶다.) 루소 자신도 가설의 역사라고 하고 있을 뿐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고 있지 않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사유재산제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역사를 가져다 붙인 느낌이 들 정도인데 개인적으로는 그 기원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논문이라고 하기에는 과학적이지 못하고 인간이 가진 그 무엇에 호소하기에는 약하다. 호소력이 부족한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의 이상을 ‘과거’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뒤에 붙은 역자의 ‘해제’ 마지막 부분에도 소개되어 있듯 루소 자신도 이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비교적 젊은 시절의 작품인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루쉰이 그랬다. ‘물론 현재에 불만일 수 있다. 하지만 뒤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앞에도 길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이상향으로 상정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옛날이 좋았지’하고 말아버린다.

루소에게는 자연상태의 인간이 이상적이다. 그런데, 자연상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따르고자 해도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자연상태라는 개념도, 자연법이라는 개념도 애매모호하다. ‘자연’이 무엇인가? 루소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자연상태를 가정했는데 둘의 결론은 전혀 달랐다. 홉스는 인간을 본래 악하다고 봤고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악의 개념조차 없다고 했다. 나는 어느 쪽 말이 더 타당한지 따지는 것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각자의 추론에 따라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왜 자연상태를 가정해야 하는지부터 잘 모르겠다. 루소의 ‘자연상태’란 강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상태다. 루소의 자연상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온 지구의 환경이 사람이 살기에 좋아야 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난 땅에서 배부르고 평화롭게 잘 살아야 한다. 민족이동의 개념은 당연히 없다.


또 루소는 인간의 본성을 ‘자기애와 연민’으로 보고 있는데, 이 둘이 균형을 이뤄서 자연상태의 인간은 서로서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서 루소는 ‘동물은 이 인간의 본성에서 제외된다.’고 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전혀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또, 인간에게 동족이 다치거나 죽는 것에 대한 혐오감(연민의 근원)만 있을까? 그렇다면 그가 자연상태를 찬양하며 예로 들고 있는 상황, 누군가 나를 쫓아낸다든가, 괴롭힌다든가, 노예로 삼으려 한다든가 하는 상황들은 왜 일어나는가? 루소는 그런 상황들에 대해서도 도망가든가 나를 노예로 삼으려하는 자를 죽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후대의 학생들이 얼마나 편했을까? 그런 상황들이 극단적으로 일어나거나 누적되어 전쟁이나 살육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또 그는 불평등을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과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으로 나누고 전자에 대해서는 기원을 알 수 없다고 하고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약속과 동의에 의해 생긴다고 하면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불평등이 정말 이렇게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일까? 타고난 불평등이 다른 불평등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없을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낙관적 판단과 이 두 불평등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 한쪽의 기원만 찾고 있는 태도가 아쉽다. 그밖에도 무질서는 법과 함께 생겼다거나 언어와 사회는 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루소의 이 책이 그렇게 형편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루소의 생각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루소의 인간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소와 볼테르의 대립에 얽혀 있었다는 계급의식이다.

사회화와 문명화는 인간의 노예화와 겁 많은 인간을 낳았다거나, 인간은 촉각과 미각보다는 시각과 청각이 더 발달했다는 지적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통찰은 인간사회를 타락시킨 근원으로 금과 은 대신에 철과 밀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 밖에도 법과 소유권의 설정에서 행정권력의 제도화로 넘어오는 단계에서 부자와 빈자가, 제도화된 행정권력이 합법적권력이 되는 단계에서 강자와 약자가, 합법적 권력이 독단적 권력(전제군주제)이 되는 단계에서 주인과 노예가 생겨났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다시 생각해볼만 하다. 루소는 전제군주제에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선과악의 개념이 없어진다고 했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다는 것이다. 출발지인 자연상태는 순수한 자연인 반면 도착지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다.(따라서 루소에 따르면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루소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이미지는 ‘계몽된 귀족’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전혀 귀족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 민중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곧 민중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다. 주석에서 발견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마침 있어서 찾아본 루소에 대한 부분은 루소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유재산에 불평등의 기원을 두고 역성혁명을 피력한 루소의 사상을 접하면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연약하고 겁많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주인인 자연상태의 인간에 대한 찬양에서는 니체의 초인이 떠올랐다.

책과 독서에 대한 수많은 말들 중에 나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식상한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과식이나 폭식, 편식은 좋지 않다. 우리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던가? ‘식도락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는 말에 나는 공감할 수는 없지만 동의할 수는 있다. 또 음식은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편식을 막아주고 함께 먹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 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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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 묻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삶을 한탄하는 사람들밖에 찾아볼 수 없으며,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자기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합쳐도 이 무질서를 간신히 막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미개인이 일찍이 삶을 한탄하여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런 후에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어느 쪽이 정말로 비참한가를 판단해보기 바란다.




2.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3.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약한 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건강해진다.




4.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중략)…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5.

나는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늘 듣는다. 여기서 이 억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강자의 온갖 변덕에 굴복하여 한탄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원시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만일 누가 나를 어떤 나무에서 쫓아낸다면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어떤 장소에서 누가 나를 괴롭힌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된다. 그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 또 나보다 힘이 아주 센데다가 상당히 타락하고 게으르며 사납기까지 한 사나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자기를 먹여 살리라고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는 잠시도 나에게서 눈을 데지 않고 자는 동안에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나를 자기에게 꼼짝없이 매어두려고 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망치거나 그를 죽일지도 모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피하려고 하는 고통이나 그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자진해서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7.

그리하여 사람들은 편리함을 누려도 행복하지 않은 반면에 그것을 잃으면 몹시 불행해지게 되었다.




8.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의범절의 의무가 미개인들 사이에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보다는 인격을 모욕당했다는 점 때문에 더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가 받은 모욕만큼 상대에게 벌을 가했으므로 복수는 더욱 끔찍해지고 인간은 살생까지 저지를 정도로 잔인해졌다.




9.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중략)…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위적이고 냉혹하다.




10.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1.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때때로 살아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위해 죽음으로 내달리며, 불명을 찾아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증오하는 세력가와 자신이 경멸하는 부자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영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비굴과 그들의 보호를 거만하게 자랑한다. 자신의 노예상태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는 그 노예상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감을 가지고 얘기한다.




12.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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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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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당신은 자살하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받아야 했소. 당신의 수기는 백발이 성성한 27살 이후로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아서 정말로 자살했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어쩌면 당신은 자살하지도 않고, 종교도 없이 계속 그렇게 살면서, 당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살면 인간으로서 실격이다.’라든가 ‘저렇게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도록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지.

 

당신이 수기의 앞부분에 쓴 여자에 대한 불가해함에 대해서는 나도 200퍼센트 동의하는 바요. 같은 인류인 듯 하면서도 남자와는 전혀 다른 생물,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들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소. 당신은 아마 여자에게 데었겠지. 그래서 ‘여자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고. 당신은 잠깐 뇌병원에서(출판사 별로 당신의 수기를 번역하는 데 조금씩 차이가 있소. 민음사에서는 희극 단어와 비극 단어 놀이를 ‘희’나 ‘비’라고 번역한 데 반해, 웅진씽크빅이라는 출판사에서는 ‘코미’, ‘트래’라고 번역했지. ‘뇌병원’은 어느 쪽 같소? 웅진씽크빅이오. 민음사에서는 ‘정신병원’이라고 번역했지. 난 왠지 웅진 쪽 번역이 좀 더 맛이 있다고 생각되는군.) 당신의 소원을 이루었지. 그곳은 온통 남자들뿐이었으니. 하지만 수기의 마지막에 가서 당신은 또 다시 여자와 살고 있더군. 아마도 여자일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인간으로서 이미 실격된, 그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당신의 운명인가 보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소. 인간을 구제할 수는 있어도 구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음악, 영화와 소설에서 구원의 대상뿐만 아니라 구원의 주체까지도 인간으로 그려지지. 그것도 여자로 말이오. 한때는 널 구원이라 생각했다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라는 노래의 가사에서부터 카프카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여자를 구원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모티브일거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소.(내가 이렇게 강조하는 까닭은 당신처럼 될까봐 두려워서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오. 솔직히 말하면 심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싶소.) 만약 인간의 영역에 구원이 있다면 당신의 27살의 모습과 같은, 결국은 여성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이랄까.

 

당신의 수기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소. 푹푹 찌는 한 여름의 땡볕에서 당신의 수기를 읽고 있자니 <이방인>의 뫼르소도 생각났고…. 남을 의심할 줄 몰랐던 당신의 요시코가 더럽혀졌듯 당신은 마담의 말처럼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실격됐소. 인간 세상이란 그렇다오. 당신 같은 좋은 사람은 살 곳이 못되지. 절대 선은 이 더러운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이오. 당신이 절대 선인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외다. 무엇하나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 없이 ‘싫은 것을 마다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는 말이 어울릴 듯하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런 당신이 유일하게 자신의 뜻으로 한 행동이 자살이었지.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쪽으로 흘러가기가 얼마나 쉬운 지 이제 당신도 알겠지.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원하지 않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은 ‘순간’이오. 매 순간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오. 누구하나 상처받는 사람 없이(사실은 모두가 모두에게 상처받으면서) 밝고 명랑하게 서로를 속이는, 인간이 인간을 밀어젖혀도 죄가 되지 않는 인간세상에서 살기 위해 말이오. 노래 말마따나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듯, 너무 많은 이타심이 오히려 극도의 이기심일 수도 있는 거요. 바로 당신의 경우처럼 말이지.

 

마담의 말처럼 당신의 아버지가 나쁜 것일지도 모르지.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내게 카프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소.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은 많아. 당신이 그렇게 된 까닭은 어느 누구에게도 있지 않소. 바로 당신에게 있지. 인간이 만약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이오. 행복조차도 두려워한 겁쟁이 요조. 당신이 한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말은 니체가 병원에 가기 전 말을 붙잡고 했을 법한 바로 이 말이오. “아아, 인간은 서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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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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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에스에서 6개월 동안 강의한 <동물의 세계>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대학수준의 강의를 방송에서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또 그것을 다시 책으로 내다보니 그런건지 '~했다.'와 같은 대학교재를 비롯한 책에서 많이 쓰는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하더군요', '~했지요'와 같은 문체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같은 대화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책 <대담>(도정일,최재천 공저)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 뭔가 흐름을 뚝뚝 끊는 것이 들어왔다. 비문(非文)이 왜 이렇게 많을까? 어쩌면 이런 느낌은, 이 텍스트를 짧은 시간에 굵게 읽는, 눈을 통해 읽는 것이 아니라, 6개월 동안 매주 1회씩, 정말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귀로 들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과 글의 차이에 대해, 대상을 소화하는 시간에 대해 잠깐 딴 생각을 해본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책은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최재천은 이 책을 대학교재로 사용해도 될 거라고 서문에서 쓰고 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리 훌륭한 교재는 아닌 것 같다. 풍부한 사진 자료 등 책에 들인 공은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례가 너무 풍부하다는 것이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을 '단순한 사례의 나열' 정도로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사례는 각각 모두 흥미로웠지만, 이쁜 부분만을 모아놓는다고 미인이 되지 않듯, 맛있는 것을 섞는다고 맛을 보장할 수 없듯 각각의 사례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말이다.

 

같은 내용을 말로, 글로 접할 때의 차이나, 책으로서의 편집에 대한 것은 이 정도에서 멈추기로 하고 내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다 읽고 이 수많은 사례와 실험, 연구들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식물의 공존을 위해서일 것이다. 보호하고(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들을 사랑해야 하고 (최재천이 늘 말하듯이)알면 사랑하게 되므로 이들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삐딱한 나는 아무래도 동물들이 불쌍하다. 실험실 실험 대상 동물은 물론이고 자연상태의 연구 대상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행동학도 결국은 인간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이고(동물행동학 자체가 사람이 만든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공존'이니 하는 것들은 명목상 붙인 명분이자 이상이 아닐까? 어떤 학문이 응용분야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 학문이 그만큼 가치있는 학문이라는 의미겠지만 그 가치는 역시 인간의 기준에서 본 가치겠지. 동물 행동학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의 동물 행동학은 굉장히 실용적인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실용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공존'을 위해서 정말 그렇게나 많은 실험과 연구들이 필요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만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인간만의 특징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보통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어떤 특정한 답 하나를 유도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 특징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특징이 어떻게 하나만 될 수 있겠는가. 그 특징 하나가 다른 모든 동물들과 인간을 결정적으로 구별해주지는 않는다. 다른 동물들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몇 가지 특징이 조합되어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심지어 머리를 쓰는 간단한 테스트에서 인간과 침팬지를 대결시켰는데 챔팬지가 훨씬 잘했다. 인간과 동물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항상 되묻고 있다.)

 

다른 책들이 많이 생각났던 책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잭 런던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를 비롯한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들과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봐서 실망했던 베르베르의 <개미>, 별로 유명한 책은 아닌 듯하지만 뜻밖의 보물같은 책이었던 마크 트웨인의 <동물과의 대화로 본 세상 다시보기>,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등이 생각났다.

 

수많은 사례 중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다른 곤충들도 함께 사는 개미 사회와 흰개미의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흰개미집 입구에서 흔들어 더 많은 흰개미를 잡아먹는다는 자객벌레, 자기 딸을 물어죽이는 여왕벌, 그리고 자식들에게 싱싱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먹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마비만 시켜 그 위에 알을 낳는 기생말벌 등이었고, '흥미있었던' 사례는 개미와 벌들에게서 발견되는 '여왕물질', 다른 개체들로 하여금 판단의 착오는 물론 생리적인 변화(불임)까지 만들어내는 물질과 암컷이 나무구멍 속에 들어가 알을 낳으면 수컷이 진흙으로 구멍을 막고 먹이를 날라다주는 코뿔새와 가사분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다는 갈매기 등이었다.

 

가장 무거운 이야기이자 나의 문제의식. 자연스러운 것은 다 좋은가? 아직까지 내 생각은 이렇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 이야기 역시 맥락을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다 좋다면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듯 관용보다는 불관용 쪽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이 숭배해 마지 않는 다윈 역시 그렇다. 아래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끝으로, 학문간 통섭은 가능할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상 위의 생물들이 그러하듯 학문도 서로 모두 얽혀있다. 전문화라는 흐름 때문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하는 소리는 전부 해석이 필요한 시대. 학문간 경계 허물기는 재미있을 뿐더러 필요하고 학문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위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자기가 하는 공부에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이런 자부심은 자칫 오만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간 경계를 허문다는 말은 경계를 허물고 함께 무언가를 하지만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생물학, 물리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물리학, 인문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인문학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학문간 벽을 허무는 일은 이제 막 걸음마를 땠다. 말하기보단 '듣기'가 중요하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학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사회생물학의 득세는 다소 위험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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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재천 선생님의 답장
    from 소요당(逍遙堂) 2009-09-07 15:13 
    이승환님   보내주신 독후감 감사합니다. 제 책을 이처럼 꼼꽁하게 읽고 여러 모로 생각해 보신 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럼 하신 말씀 몇 가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지적하신 사항들 잘 새겨두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학에서 동물행동학을 강의할 때 거의 완벽하게 이 구도를 따르고 있고 학생들은 오히려 예가 많은 걸 대체로 좋아합니다. 물론 수업 시간에는 예만 늘어 놓는 게 아니라 실험 결과들에
 
 
프레이야 2007-08-1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인님, 반갑습니다. 좋아하는 최재천교수의 책이군요.
리뷰 잘 읽고 추천합니다.^^

sensationalbuff 2007-08-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도 반갑습니다 :)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을 추천까지 해주시다니요 헐헐..
 

1.

뻐꾸기는 잘 아시다시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이런 행동을 '탁란'이라고 하며, 대체로 알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둥지에 낳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지요. 뻐꾸기 알은 의붓어미의 알보다 먼저 깨어나는데, 깨어나서는 본능적으로 의붓어미의 알들을 등에 업어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또 알들을 다 내몰지 못하고 둥지에서 함께 자란다 하더라도 다른 새끼들보다 목을 더 길게 뽑고 입을 크게 벌려 제일 큰소리로 울어댑니다. 그런 식으로 먹이를 독차지해 다른 새끼들을 제치고 결국 자신만 살아남지요.

 

2.

아직은 대부분의 동물이 다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아마 두뇌가 꽤 발달한 동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생각한다'는 기준을 인간에 맞추다 보니 다른 동물들이 사고를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지, 그들 나름의 사고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쪽이 주도권을 쥐어야만 교육이 됩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게끔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이기에 대부분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무 아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미 새가 새끼 새가 싫어한다고 나는 법을 가르치는 걸 포기하나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3.

딱정벌레는 성충이 되었을 때에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행동을 합니다. 일개미는 집 밖에서 반날개의 애벌레를 발견하면 자기 집으로 물고 갑니다. 마치 '너 왜 여기 나와 있니?' 하며 걱정하는 듯이 말입니다. 딱정벌레 애벌레는 개미 애벌레가 아양 떠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냅니다...(중략)..일개미는 딱정벌레 애벌레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자기들의 '아가방'에 집어넣습니다. 아기들을 기르는 방에 넣어놓으면 이 애벌레는 개미들의 아기를 먹고 삽니다...(중략)..개미는 왜 이렇게 손해만 보며 살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너무 야박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미 사회는 어느 정도 손해를 봐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를 갖춘 사회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개미집을 파보면 딱정벌레 애벌레, 귀뚜라미 등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와 삽니다. 개미는 그만큼 성공한 동물입니다. 개미집에 들어와 사는 곤충들의 목록만으로도 두꺼운 책 한 권이 될 정도입니다.

 

4.

이들 중에 특별히 기막힌 노린재가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자객벌레라고 부르는 노린재인데 종종 흰개미를 잡아먹고 삽니다. 이놈은 흰개미 굴에서 나온 흙덩이들을 먼저 온몸에 붙입니다. 흰개미 굴에서 나온 것이니 냄새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흙덩이 같은 모습으로 걸어가다가 들킬 것 같으면 납작하게 엎드리고 또 걸어가는 식으로 흰개미 굴 입구까지 접근한 다음, 지나가는 흰개미 한 마리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몽땅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흰개미 몸에 구멍을 내서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입에 물고 굴 앞에 가서 흔듭니다. 그럼 그 시체 냄새가 굴 안에 진동하게 되고, 동료가 죽은 것을 안 흰개미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그럼 그때 더 많이 잡아서 먹는 거죠.

 

5.

1970년대 말 미국의 어느 여류 생태학자가 생물학자들의 연구 주제들에 대한 통계를 내보았습니다. 재미있게도 남성 생물학자들은 거의 절대 다수가 동물이나 식물의 경쟁 관계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있었고, 서로 돕는 관계 즉 공생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정말 흥미롭게도 공생 연구의 거의 대부분은 여성 생물학자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6.

곤충이나 우리 인간의 몸은 사실 튜브 형태의 몸입니다. 안팎이 서로 연결되어 있죠. 식도에서 위, 작은 창자에서 항문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가는 장 속은 사실 몸 바깥입니다. 몸 안이 아니죠.

 

7.

우리 풍습에 결혼한 사람들한테 금실이 좋으라고 선물하는 원앙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새가 아닙니다. 원앙 수컷은 아내랑 함께 다니다가 다른 암컷을 보면 그냥 아무 때나 아내가 보는 앞에서 겁탈합니다. 원앙 사회에서는 수컷이 자기 아내는 지키면서 남의 아내는 겁탈을 하려고 합니다.

 

8.

마지막으로 자식을 보호하기는 하되 너무나 끔찍한 부모를 하나 소개합니다. 기생말벌은 굴을 만들고 곤충이나 거미를 잡아서 그 안에 넣은 다음 그 몸에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먹이가 될 곤충이나 거미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독침을 쏴서 신경만 마비시킵니다. 그러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몸을 못 움직이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말벌 새끼들은 살아 있는 싱싱한 생고기를 먹고 자라게 됩니다. 자식한테 아주 신선한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 남을 생매장시켜 놓은 것입니다.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9.

이렇게 해서 충분한 숫자의 일개미들을 키워내면, 어느 날 일개미들이 현관문을 뚫고 바깥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들은 제일 먼저 식물이 분비해주는 음식물인 뮬러체들을 끌어들입니다. 불과 2~3일이면 나무에 있는 거의 모든 뮬러체들을 수거합니다. 그러니 2~3일만 늦게 굴 문을 뚫고 나오는 군락도 굶어 죽는 겁니다. 남의 집보다 하루라도 먼저 나가서 음식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게 바로 이들의 경쟁 목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 말고 당장 먹을 것보다 더 많은 식량을 비축하는 동물이 바로 개미와 벌입니다. 이렇게 쌓아놓으니 늦게 나온 다른 집은 먹을 게 없어서 다 죽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나무 전체를 장악하게 되죠.

그런데 이때부터 여왕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일개미들이 먹을 걸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오아개미들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을 녹여 함께 자식을 기르던 그 사랑스런 동료가 이제는 음식을 축내는 미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여왕이 한 마리 남을 때까지 서로 물고 뜨는 혈투를 벌입니다. 이렇게 정치 싸움을 벌일 때 나무 아래를 보면 개미 머리들이 뚝뚝 떨어져 있습니다. 죽은 여왕의 시체를 일개미들이 내다버린 것인데, 다른 부분은 먹을 수 있지만 머리는 먹을 수가 없어서 머리만 밑에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10.

예를 들어 아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이 항생제를 주면서 "몸이 나아지는 것 같더라도 끝까지 드십시오"하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사흘쯤 지나 아이 상태가 좋아지면 그만 먹여도 되겠지 하고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몸 안에 들어온 병원균과 싸움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잡아야 하는데 어설프게 두들기도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균들을 키워왔습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균 중에서 약한 놈들은 대충 죽였는데 독한 놈들은 못 죽인 상태로 약먹기를 멈춘 것이죠...(중략)..그러니 나중에 다시 병원에 가면 예전에 먹던 약으로는 듣지 않아 더 독한 약을 받아와야 합니다.

 

11.

먹은 것 대부분이 체온 유지를 위해 소모됩니다. 히터와 에어컨을 몸 안에 넣고 돌리며 사는 셈이지요. 변온동물은 양지와 그늘로 움직여 다니면서 조절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유지비는 굉장히 적게 듭니다. 뱀은 한 달에 웬만한 크기의 먹이동물을 한 마리 정도만 잡아먹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한 마리 먹고 앉아 있다가 따뜻한 데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한 달쯤 지나면 먹을 때 됐네 하고 또 한 마리 잡아먹습니다. 우리처럼 하루 세 끼 열심히 먹을 필요가 없죠. 이런 변온동물인 도마뱀도 병원균이 들어오면 햇볕이 있는 곳에 나가 오래 앉아서 몸의 온도를 올린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평소 이상으로 올려서 균들을 태워버리는 것이죠. 

 

12.

자연선택은 우리가 아름답게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연선택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좀더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는 것입니다. 자연선택의 관심은 오직 번식입니다.

 

13.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독특함에 매달리고 있습니다...(중략)..이 지구가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존재했던 건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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