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탐욕스러운 사람을 조종하기란 인형 극장의 어린 관객들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제때에 간파한 저 선택된 사람들에 대해 나는 진정으로 경탄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라고 썼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등 사기꾼과 익살꾼은 거의 같은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들이 자신의 손이나 아니면 발로 만들어 낸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술작품 옆에 서 있을 때, 그들의 눈에 빛나는 메시아적 사명 의식에는 우리도 덩달아 감명을 받게 마련이다.

 




3.

그러나 이제 우리는 거장 중의 거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세기적인 작품, <브릴로 상자들>을 최초로 창조한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는 것 말고는 달리 경의를 표할 방법이 없다. 이 ‘브릴로 상자들’은 한 만능 천재가 이웃 약국에서 손수 구입한 것인데, 그가 바로 미국의 위대한 구매자이자 화가인 앤디 워홀이다.

…(중략)…

허나 명명백백한 사실은, ‘존재의 예정된 조화’와 같은 표현들이나, 아니면 휘황찬란한 카탈로그 속에 인쇄된 이 명작들에 대한 모든 것은 순전히 유머로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겁에 질린 관람객들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되면 어리둥절해진 관객은 아예 침묵하거나 아니면 다른 멍청한 사람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작품들이 지닌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오락적 가치를 인식한다면, 그 작품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4.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작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던가? 나는 그런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5.

그러나 여기에는 작지만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동네 슈퍼에서 할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토마토 깡통을 전시한 게 아니라, 시각적인 정확성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필치와 기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법을 쓰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진실이나 아니면 인간 및 자연의 본질적인 것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6.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장난이 음반을 통한 현대음악에서 제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분명 음악은 단지 그것이 재현되는 동안만 음악으로서 존재하지, 투자 가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소위 현대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더욱더 서먹서먹하게 만든다. 현대예술은 대부분의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사유재산처럼 애지중지하는 이른바 진보적 엘리트에게는 일종의 특권이다.

우리가 꼭 레닌의 열렬한 추종자는 아니더라도 ‘예술작품은 본래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는 레닌의 말에는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레닌 말의 강조점은 바로 ‘다수’에 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피아노 조율사를 위해 교향곡을 지었다는 작곡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오직 자신의 이발사 한 사람만을 위해 자서전을 썼다는 작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현대미술 작품은 전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 즉 미술 비평가와 미술 장사꾼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7.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경멸감에 분명히 동조하는 비평가들의 평론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또 그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예술에 관한 진실에 대해 써주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 기다림은 헛된 것이었다. 행간 사이에서는 못마땅하다는 투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지만, 큰소리가 판을 치는 우리 시대에 과연 누가 그런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사가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나는 어네스트 H. 곰브리치를 들겠다. 나는 만족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저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너무 점잖고 너무 배려하는 것이 많다. 쿠르트 슈비터스와 같은 영리한 모더니즘 화가가 “나는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침을 뱉기만 해도,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선언했을 때, 85세의 이 노학자는 그러한 발언에 차분히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예술이 단지 인간 개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만약 곰브리치 교수에게 끝내 그의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도록 압력이 가해진다면, 기껏해야 그는 요셉 보이스와 그의 익살을 두고 이렇게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8.

그렇다.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미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그림은 그것에 딸린 부수적인 텍스트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미리 20여 쪽에 이르는 팸플릿을 공부하지 않고는 전시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그림 자체가 사이비 철학을 설명하는 삽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미술 연구가이기도 한 탐 울프가 이제부터는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을 확대해서 걸자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니면-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제안이지만-벽에 단지 가격표만을 걸어 놓는 게 어떨는지.

 




9.

납세자들의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 지식을 입증하고자 하는 고등동물의 저 불타는 욕구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모든 관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파킨슨 교수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셀러인 <낭비의 법칙>에서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잘 알다시피, 지출이란 항상 수입의 한계선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개인의 가계뿐만 아니라 공공 재정에 있어서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징세 수입이 많더라도, 그 수입을 모두 써버리거나 더 많이 지출을 하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정부는 개인과 차이가 난다. 즉 정부는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수억 단위의 돈은 감도 잡지 못하면서 수천 단위의 액수에 대해서는 잘 훈련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수억 단위의 프로젝트는 몇 분 안에 가결하면서 사무실에서 소비하는 커피 값을 두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10.

편지를 보낸 독자들의 분노는 드디어 볼프 포스텔의 메가톤급 괴물로 집중되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치 정통 유대인처럼 옷을 입는 이 예술가는 시의 문화담당 장관에게 아주 독창적인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은 앞서 다른 세 도시에서도 했던 것으로 두 대의 최신형 캐딜락을 거꾸로 세운 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상당량의 콘크리트를 부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포스텔 씨는 자신의 기막힌 착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작품 <신화 자동차>는 에로티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면서 그는 이 두 대의 콘크리트 승용차가 <옷을 벗은 마하(마야)>의 형상을 띠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대가는 그의 철학의 테제를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즉 그의 매머드 작품은 ‘황금 송아지를 둘러싸고 벌이는 운전사의 24시간 동안의 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배기기 힘든 그런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한 가지 답이 있다. 즉 논거가 불합리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더 놀랄 만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 토론에서 청중의 한 사람이 왜 하필이면 포스텔이 그의 콘크리트 괴물을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며 1922년 비열한 암살의 희생양이 된 빼어난 정치가 발터 라테나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장에다 세웠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브록 교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반항적인 질의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라테나우를 언급하고 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먼저 라테나우의 저서를 읽어 보도록 권유하고 싶소. 그의 저작은 다시 편집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의견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오. 라테나우도 그 당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내용의 토론을 했었소. 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이런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갈채와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 반항적인 질의자는 창피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체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상적인 발언이 지닌 트릭을 눈치 챘다. 나는 이 독창적인 발견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트릭을 ‘라테나우 선수 치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의 트릭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즉각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뭔가 알지 못하고, 읽지 못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낀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뭔가를 좀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이다.

브록 교수의 감동적인 연설, 다시 말해 발터 라테나우가 살아 있다면 콘크리트 방공호 에로티시즘을 지닌 포스텔 식의 ‘누워 있는 마하’ 전시회에 열광적으로 찬성했으리라는 그의 연설이, 단지 미학 교수의 넘쳐나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짐작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브록 교수가 강연을 하는 동안 고야는 지하에서도 몸을 뒤척였을 것이고 라테나우 역시 현기증에 눈앞이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발터 라테나우는 모더니즘 예술관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예술은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의 가장 고귀한 경계는 민중이며 또 민중의 자연스런 취미이다.’

…(중략)…

방문객으로서 베를린에서 겪었던 나의 모험담을 마치기 전에 베를린의 빌머스도르프 구에 사는 몇몇 대담한 삶들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아야만 하겠다. 어느 날 저녁 이들은 그들의 단골 술집에서 도덕론자인 포스텔과 한번 경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그들 스스로 진보적인 조각품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시 차원의 세금 보조는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라 다 낡은 차를 구해다가, 약간의 형이상학적인 부식 효과를 주기 위해, 그것에 콘크리트를 붓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그 작품을 포스텔의 원작 옆에 세워 두었다. 베를린 시의 문화장관은 다음날 그 광경을 보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그것도 예술작품이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11.

이 추모전에서 먼저, 보이스가 세상의 혼돈을 퇴치하기 위하여 7일 동안이나 뉴욕의 한 전시장에 가두어 두었던 코요테에 대해 말할 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그러고 나서 그의 몇몇 숭배자들이 화면에 비쳤다. 그들은 예외 없이 보이스를, 모든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불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요셉 보이스의 전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충성스런 숭배자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보이스의 보편적인 작업 행위를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 모두를 간략하게 평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요…….”

“앞으로도 수세대에 걸쳐 그의 엄청난 예술적 유산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 누구도 자세히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12.

예술가이자 교수였던 보이스는 유아 욕조에다 다 낡은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 크림을 붙여서 <수집자 오브제>라는 작품을 만들어 뮌헨의 한 예술 전문가에게 팔았다. 그는 그것을 1973년 다시 부퍼탈 미술관에 임대했다. 이 ‘욕실 오브제’는 또다시 다른 오브제와 함께 레버쿠젠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곳 미술관의 책임자들은 이 ‘예술작품’이 전시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욕조는 창고에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이즈음 사민당의 레버쿠젠 지부가 이 미술관에서 어떤 축제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당원들이 의자를 찾던 도중 예의 그 창고에서 문제의 욕조를 발견하고는 맥주를 차게 하는 데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욕조를 가져가 버렸다. 결벽증이 있는 몇몇 당원들은 그 욕조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생각해서 욕조에 붙어 있던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을 조심스럽게 긁어내었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명작은 망가지고 말았다. 전문가들의 감정에 의하면 그 손상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대가 보이스의 말을 직접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나서서 이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는 그 대상이 ‘나는 완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분명 앞에서 말한 유아 욕조는 너무 어려서 이 대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말하기 싫어하는 내향적인 욕조였을 것이다. 보이스 스스로도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열린 화법 또는 부서지기 쉬운 화법이라 부르는 것은 만약 우리가 열려 있는 상태나 구멍이 나 있는 상태를 원할 때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만들어질 작품이 말하려는 의도와 관련하여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모더니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지만, 돌처럼 굳어 있는 대상들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3.

세상 사람이 그들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아마도 예술가 그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14.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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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보면 무시무시하게 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상력도 실은 매우 좁아지면서 세밀해지고 있는데 전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 이 속엔 그런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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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내무실 아침 청소

이병, 일병, 상병들이 모여서 내무실 아침청소를 한다. 각자 맡은 청소를 분주하게 하고 있는 평범한 휴일 내무실의 아침풍경. 병장들은 아침부터 노가리까기에 바쁘다. 자기들끼리는 지겹고도 심심하니까 청소하는 애들을 붙잡고 농을 한다.

 

"야, XXX"

"이병, XXX!"

"사랑이 뭐야?"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말해봐"

"잘 모르겠습니다!"

 

바짝 얼은 이병이다. 두번 정도 이런 대답이 나오면 병장들은 자기도 손 쓸 방법이 없으니까 패스.

 

"야, OOO"

"일병,OOO"

"사랑이 뭐야?"

"사랑은 (  )입니다."

"오~왜?"

"@#$%@$#^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형태의 대화가 한동안.

 

"야, △△△"

"상병, △△△"

"사랑이 뭐야?"

".."(웃음)

"오~'그냥 웃지요'야? 그냥 웃어도 대답이 되는데?"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적당한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연애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아무렇게나(예를 들면, "사랑은 오렌지입니다") 말해버리고 생각나는대로 이유를 같다붙이면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것조차' 귀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위 '쌩까는' 분위기를 낼 수도 없기에 그저 웃었다.(하지만 사실 '뭘 그런걸 묻냐'는 뜻도 있었다.)

 

 

#2.대학도서관 자료검색

어디에선가 이 책의 제목을 본 나는 지금껏 그래왔던 다른 책들처럼 이 책도 언젠가 내 손에 들어올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도서관을 지나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다.(아니, 사실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기 때문일까? 사귀는 동안에도 읽고 싶었지만 헤어지자 읽고싶다는 욕구는 읽어야한다는 의무로 바뀌었다. 왜 그런지는 지금껏 모르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있는 요즘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검색 창에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고 치고 검색버튼을 누른다. '검색결과가 없습니다.'라는 글자가 뜬다. 나는 '매우' 놀란다. '응? 꽤 유명한 책 같던데 이게 학교 도서관에 없단 말이야?' 이번에는 '나는 왜 너를'까지만 쳐본다. 이번에는 더 놀란다. 모니터에는 [나는 왜 너를 증오하는가:증오의 과학]이라는 책 한권이 뜬다. 혹시나 해서 '왜 나는 너를'을 쳐본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나로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든 그 책이 나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대출중이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나온다.

 

그 후로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그 책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했고, '아, 이 책이 분명히 내 손에 들어오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후 도서관에 가서 검색을 했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검색-'검색결과가 없습니다.'  아니, 이럴수가. 며칠 전에는 분명히 있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나는 왜 너를'까지 쳐본다. [나는 왜 너를 증오하는가:증오의 역사]가 나온다. 그제서야 나는 제대로 검색을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검색-모두 대출중.

 

이런 바보같은 과정은 두번이면 족하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나는 그 책을 찾을 때마다 '나는 왜 너를'과 '왜 나는 너를'을 잘못치는 실수를 했고 결과는 모두 대출중이었다. '아, 역시 인기있는 책은 대출중이군. 많이 좀 갖다놓지' 

 

그 책은 역시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겨우 '나는 왜 너를'을 치지 않고 곧바로 '왜 나는 너를'을 칠 수 있게 되었을 때 친구 집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빌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몇번이고 반복했던 바보같은 검색은 자연스레 그 둘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만들었지만 아직도 나는 '왜 나는 너를'과 '나는 왜 너를'이 어떤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지-전자는 why를 후자는 you를 강조하는 것인가?-, 왜 내가 같은 실수를 반복했는지-바보라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

 

클로이(클로에바, 티지)의 말을 빌리면 이 소설의 줄거리는 '질질 짜는' 연애 이야기쯤 되겠다. 내가 이런 소설을 좋아하던가? 일단 표지부터 보자. 나는 (청미래라는 출판사에서 나온)이 책이 심하게 말해서 '과연 2000년대에 만들어진 책인가'하는 생각까지 했다. 뒷표지야 그렇다치고 앞표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이라고 너무나 친절하게(그것도 크게) 들어가 있는 글자. 전체적인 배경색(푸르스름하고 보라빛이 나는)과 너무나 안어울리는 제목의 색깔(노란색). 호두까기인형을 떠오르게 하는(하지만 전혀 친근감 없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 배경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별로였다. (이번에 새로 나온 양장본에서는 표지가 크게 바뀌었다.)

-자꾸 보다보니 익숙해졌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표지는 아니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책이 너무 안이뻐서 읽기 싫다는 사람도 여럿있다. 이번 표지는 크게 마음에 들지도 나쁘지도 않다.
 

하지만 이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느낌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표지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표지가 좀 아닌데?'라는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읽고 있을 때 표지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아무튼 나는 이 책에 굉장히 몰입했던 것 같다. 소리내어 웃는 웃음과 수많은 감정이입이 있었으며, 수많은 현학적인 수사들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오히려)가벼움을 잃지 않는 저자의 필체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클로이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질질 짜는'(신파적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소년과 소녀가 서로 사랑했는데 소녀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걸 알자 소년이 청혼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중년의 사랑을 그린 것도 아니고, 도무지 특이한 점이라고는 없는 이 평범한 러브스토리에서 온갖 철학자들을 들먹이며 쏟아내는 편집증 같은 주인공 남자의 순간순간의 생각이,그 통찰이, 만약 이게 없었다면 너무나 뻔히 보였을 결말을 가리고 있었다. 그 '현학적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끝까지 유쾌하게 이 책을 보지는 못했다. 클로이가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목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폭이 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에게 같은 책을 읽으면서 소리내어 웃었다가 잠시 후에 목이 메이는 경험을 한 것은 드문, 내 기억에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공감이 가고 다시 되씹고 싶은, 너무나 많은 문장들이 있었고, 그런 문장들이 나오면 그 페이지를 적어두었다가 다시 훑어보며 옮겨적는 내 버릇이 생긴 이래 최고로 많은 부분을 발췌했다.

 

하지만 책의 결말에 다가갈 수록 지금까지의 느낌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흔히 '뒤로 갈수록 덜하다'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특히 자살기도 이후로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마지막 결말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현학적 가벼움과 통찰에서 느꼈던 재미가 무색하게 심한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건 '질질 짜는' 뻔한 이야기에서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게 만든 작가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했다.

 

아무튼 뒤로 갈수록 덜하다는 느낌과 결말의 결정적인 실망이 표지의 허섭함과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냈고, 이 책은 심하게 말해서 '좋아하며 읽다가 읽고 나서 싫어지는' 종류의 책이 되려고 하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느낌을 머리속에서 정리하다보니 내 발에 차이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농담'을 인용하며 연애에 적용하고 있는데 과연 그 농담에 동의한다고해서 그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그 농담은 흔히 볼 수 있는 '역설'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보다는(다분히 마르크스의 명성을 빌린 후광효과를 노린 것 같다. 그가 우리가 아는 맑스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러셀을 언급하는 것이 어울렸을 것이다.

대화하는 말투의 어색함도 그냥 넘기기에는 눈에 거슬렸다. 또, 큐피트는 에로스로 변하지 않고 계속 큐피트로 쓰면서 왜 비너스는 쭉 비너스였다가 갑자기 아프로디테가 된 것일까? 비너스를 아프로디테로 쓰려면 큐피트도 에로스로 써야하지 않을까? 원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을까? 이런 것은 번역의 문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발에 걸린다고 해서 이 책이 내게 주었던 즐거움과 이 책의 유니크함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역자후기까지 읽었다면,다시 말해 이 소설이 작가가 스물 다섯살때 쓴 처녀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독특함은 더 빛난다.(나는 읽으면서 백발이 성성한, 연애는 한 2358125번쯤 해본 재치있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나는 저자에 대한 기본지식이 전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세가지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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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생활 아이의 사생활 시리즈 1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에 대한 관심> 

 

# 1
멍 때리고 TV 리모콘을 돌리다가 아기들이 나와서 보고 있었다. 외국의 아기들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雪)을 접하는 모습이 앙증맞았고, 흉내내기 등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 화면도 좋고 나레이터의 설명도 담백한 것이 언뜻 보아도 꽤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알고 보니 <아기의 사생활>이라는 프랑스 다큐멘터리로, 갓 태어났을 때부터 2년간 5명의 아기들을 관찰한 프로그램이다.

# 2
멍 때리고 TV리모콘을 돌리다가 EBS가 걸렸는데, 뮤직비디오에 나올 것 같은 배경에 두 아이가 나와서 무슨 단어 연상 놀이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몇 초 안에 단어 몇 개를 말하면 언어지능이 높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 본 화면의 세련됨이란 사실 굉장한 것이었다. 늘 관심이야 있지만 늘 오래 두고 보지 못하는, 동경의 대상 EBS기에 어김없이 채널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아니, 형이 뺏어서 돌렸던가?)
 
# 제목
가끔 순찰하듯 돌아보는 서점에서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내가 처음 떠올린 것은 예전에 TV에서 봤던 다큐 <아기의 사생활>이었다. 이 글을 쓰려고 찾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같은 제목이라고 생각했고, 그 프랑스 다큐가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베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은 확실히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비록 이 제목이 프랑스 다큐 <아기의 사생활>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이 책의 영어 제목 'Discovering a Child'를 한글로 썼다면 <아이의 발견> 정도가 되었을 것이니, 그 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아이의 발견'도 썩 나쁜 제목은 아니다.)

# 전인(全人)
이 책을 간단하게 '양육'에 관한 책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아이'가 강조되고, EBS라는 교육방송에서 제작한 콘텐츠를 다듬어 나온 책이니까 그렇게 판단할 근거는 충분하다. 하지만 굳이 부록까지 읽지 않더라도 목차를 들여다보는 순간, 그렇게 간단하게 가둘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록에서 말하고 있듯, 이 책의(프로그램의) 기획의도는 양육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그 시기로 '아동기'가 선택되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사실에 가깝고, 책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다음의 다섯가지가 이들이 택한 주제다. 

# 뇌-남녀-다중지능-도덕성-자존감
뇌에서 시작해서 다중지능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장들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접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후 이어지는 도덕성과 자존감이라는 주제는 다소 막연하게 느껴지는데, 이를 실험이라는 방법을 써서 적절히 보완하고 있다.(그래도 자존감 부분은 역부족인 것 같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남녀 차이에 대한 부분이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도덕성에 대한 챕터다. ‘아이가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부모의 착각이다’라는 짧은 문장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나에게 앞으로 생길지 모를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생각하게 만드는 챕터였다. 흔히 ‘착하게 살아라’하는 식으로 잔소리처럼 하게 되는 도덕 및 윤리 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꿔서, 실험과 관찰, 즉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 점은 정말 놀랍다. 

# 개인적인 이야기들
책을 읽으면서 은근히 엄마를 중심에 두고 아빠는 다소 보조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듯한 느낌. 실험의 내용에서도 종종 발견되었고, '부모'라고 하며 서술하고 있지만 확실히 '엄마'를 가정하고 서술되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 그런 면에서 나는 다소 비판받을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은, 자식이 있는 부모들은 모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빠와 엄마는 아이와 관계 맺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서술 방식에 특별히 문제는 없어보인다고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점은 굉장히 과학적이라고 해야겠다. 
처음에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였던 소박한 바람이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불안과 조급증, 욕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표현한 부분을 읽으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부모들은 모두 반쯤 미쳤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의 소신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혹시 나도 훗날 ‘반쯤’ 미쳐 아이를 망치는 짓을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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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문이 트이는 것도 느리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고, 한글도 늦게 뗀 아들을 보는 엄마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남매를 기르는 엄마는 종종 둘을 비교하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딸은 과외며 학원이며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는데, 아들은 도통 공부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공차기나 좋아하고 집에서는 게임기만 붙잡고 있다. 말을 해도 흘려듣고 숙제나 준비물도 챙겨주지 않으면 빼먹기 일쑤다. 물론 모든 아들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중략)…

남아는 여아와 다른 발달 순서를 밟는데,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발달 순서에 불리한 환경을 제공받는다. 게다가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능력은 얄궂게도 대부분 여아의 발달 단계에 맞춰져 있고, 학습 과정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항상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아는 소근육과 사고, 언어가 먼저 발달하는 데 비해, 남아는 대근육과 행동이 먼저 발달한다. 여자아이는 발달 시기에 맞게 말하기와 읽기, 쓰기를 배우고,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실력을 발휘해서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에게 그 시기는 대근육을 발달시키는 시간이다. 한창 움직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앉아서 공부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시기에 남자아이의 대근육 발달은 여자아이를 능가하지만, 아무도 아이의 대근육 발달을 칭찬해주지 않는다.

 


2.

아기를 갖게 된 순간부터 엄마 아빠는 아이의 미래를 구상한다. 처음의 바람은 소박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충분하다 싶었다. 심성 곱고 반듯한 아이면 더 바랄 것이 엇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엄마 아빠는 하나둘 욕심을 보태기 시작한다.

이제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왜 옆집 아이보다 걸음마를 빨리 떼지 못하는가 안달하더니, ‘엄마’ ‘아빠’라는 말을 언제 시작하는지 조바심 내고, 생후 18개월에 기저귀 뗐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러고는 누구보다 한글을 빨리 떼겠다며 교재, 교구의 힘을 빌려 경쟁에 돌입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기자 명단에 올려둔 유명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언제 연락이 오나 노심초사하고, 막 세 돌이 되었을 뿐인데 요즘 트렌드라는 각종 교육기관으로 아이를 내몬다……. 처음의 소박한 바람으로 일관했던 부모도 ‘남들은 다 한다’는 생각에 점차 불안해지긴 마찬가지. 웬만한 강심장 부모 아니고서는 소신 있게 아이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3.

아이가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부모의 착각이다.

 


4.

부모 역할극에서 아이들이 대신 보여준 부모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네가 잘못을 하니까 걔가 네 이름을 적는 거 아니야”, “너 공부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평생 못살아”,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을 나쁘다고 그러면 안 되지” 등은 아이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에 해당한다. 부모들이 가장 흔히 취하는 태도다.

두 번째 “네가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려봐”, “친구들하고 같이 놀면 친구들이 널 좋아하잖아. 그러면 반장 뽑을 때 널 잘 뽑지 않을까?”, “그럼 네가 한번 반장이 돼봐” 등은 ‘설득’에 해당한다. 설득형 부모는 자신은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마지막 세 번째 “뭐 그런 선생님이 다 있어”라는 대답은 ‘공감’에 속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모의 태도다.

 


5.
사소한 이야기란 아이와 엄마 사이에 아무런 심리적 이해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쉽게 말해서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꽃이 피었구나”, “바람이 차구나” 같은 이야기인데, 혹시라도 추우니까 나가지 말라는 식의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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