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참 괜찮은 죽음 -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할 것인가
헨리 마시 지음, 김미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초연함과 연민 사이에서 그리고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외과 의사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것이다. _9쪽
짧은 서문에서 저자의 진심이 느껴졌고, 이어지는 1장을 절반쯤 읽자 저자의 필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자 소개를 다시 봐야 했다. 헨리 마시. 1950년생 신경외과 의사로, 2014년에 출간된 이 에세이 『참 괜찮은 죽음』이 데뷔작이다. 이 책으로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경외과 의사이자 섬세한 문필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고 한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는 이미 빠져들어 저자와 함께 울고 웃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디테일이 훌륭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 하나를 본 것 같았다. ‘삶과 죽음, 뇌외과에 대한 이야기’ 스물다섯 편이 담긴 커다란 그림을.
나는 사람의 뇌를 수술하는 사람이다. 이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뇌를 가르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_10쪽
여느 소설보다 인상적인 첫 문장, 그냥 덮을 수가 없었다. 계속 읽어야만 했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잘 읽힌다는 것이다. 전두엽, 송과체, 측두엽, 뇌간 같은 뇌의 부분별 이름은 물론이고 동맥류, 뇌실막세포종, 뇌하수체선종 같은 질병 이름, 스크럽, 석션, 카테터, 션트 등 병원에서만 쓰는 용어들이 난무하지만 페이지는 쉬지 않고 넘어간다. 빌 브라이슨의 추천평대로 정말 '엄청난 흡인력'이라 뇌과학자 김대식이 아니더라도 '밤을 새워가며' 읽을 만하다. 논픽션이지만 픽션의 재미를 갖추고 있기에 둘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 독자가 읽어도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을 만날 수 있다. 임신 38주차에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여자 이야기, 수십 년 전 자신의 실수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어느 식물인간 요양원에서 다시 만나는 이야기에 움직이지 않을 마음이 있을까.
그들의 얼굴은 다 똑같았다. 죽음에 가까운 만인의 얼굴. _273쪽
저자는 의사의 위치에서만 말하지 않는다. 3개월 된 아들이 뇌 수술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가 암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저자 본인은 망막 이상과 골절탈구로 수술을 받았다. 이렇게 이 책에는 의사, 환자의 가족, 환자의 진솔한 처지가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의사의 자리에 서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 가족이 죽는다면’ ‘내가 죽는다면’ 하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환자로든 환자의 가족으로든, ‘죽음’과 가까이 있는 나는 어떤 얼굴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내 삶을 돌아보며 한마디는 남기고 싶다. 그 한마디가 고운 말이 되었으면 하기에,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275쪽)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라’는 이 뻔한 말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저자가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때로는 ‘실수’로 환자들을 죽음에 몰아넣기도 한 사람, 그러면서도 ‘환자들의 삶의 질’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위해 애쓰는 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술이 꼬였을 때 거짓말을 하기는 아주 쉽다. 수술이 어떻게 해서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담당 의사뿐이기에 그럴듯한 핑계를 꾸며내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_242쪽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런데 그 실수가 나나 내 가족의 뇌를 수술한 의사의 실수라면? 뇌수술에서 의사의 작은 실수는 정말 치명적이다. 환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상태에 빠지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환자의 가족은 분노하고 의사는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거나 줄여보려 애쓸 것이다. 다른 반응도 있을 수 있다는 건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위로하는 가족도 있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의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남은 것은 뇌수술의 다양한 사례나 묘사도,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통찰도 아니었다. ‘삶과 죽음, 뇌수술’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좋은 주제이고 또 흥미로웠지만 아직은 젊고 건강한 내게 너무 멀리 있어 잠시뿐이었다. 책을 덮고 다시 오늘을 살아야 하는 내게 곱씹어볼수록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실수와 시행착오에 대한 저자의 태도였다. 어떤 일에 종사하건 “세상에는 오류를 위장하고 비난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온갖 방법”이 존재하는데, 이 노 의사는 실수를 숨기거나 부인하지 않고 ‘책임’을 말한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 제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의 원제는,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 보통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일부라고 알려진 제목 ’Do No Harm(해를 주지 말지어다)'과 다루는 내용을 정확히 짚어주는 부제 ‘Stories of Life, Death and Brain Surgery(삶과 죽음, 뇌외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참 괜찮은 책이지만 ‘참 괜찮은 죽음’이라는 우리말 제목에 대해서는 말들이 좀 있는 것 같다. 낚였다, 뜬금없다, 저자의 메시지를 오독할 수 있다 등등.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장 제목을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경우인데, 출판사가 제목을 정할 때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기에 제목 자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독자를 낚는 게 어느 정도는 제목의 역할이고 책을 읽다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니까. 충분히 매력적인 제목이다.
내게 정작 옥의 티처럼 보이는 것은 부제다. 제목을 ‘참 괜찮은 죽음’으로 결정했다면 부제에서는 이 책만의 특징을 좀 더 드러내도 좋지 않았을까? 이 책은 무엇보다 오랜 세월 인간의 뇌를 수술해온 신경외과 의사의 고백록이다. 그런데 지금의 앞표지에서는 이미지와 띠지를 포함해서 어디서도 그런 특징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