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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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외워보자 _최상희, 『델 문도』

하루는 담임이 얼굴이 벌겋게 돼서는 빈 책상을 의자 삼아 교탁에 엎드려 잤다. 수업이 끝날 때쯤 술이 깼는지 담임은 부스스 일어나더니 흐뭇한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우리들을 훑어보고는, 역시 힘내라는 건지 포기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어렸을 때는 말이야, 누구나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 같거든. 이? 그런데 선생님이 나이를 먹고 보니, 인생의 주인공들은 애초에 따로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
담임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걸까? 저게 꽃다운 청춘들에게 할 소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그날 술을 마시고 상념에 취해 우리들에게 ‘어른의 세계’ 의 어떤 일면을 보여준 것 같다.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내게는 저 순간이 이전까지의 세계와 작별한 순간 중의 하나다.

최상희의 소설집 『델 문도』 속 주인공들은 몰랐던 세계의 일면을 보게 되고, 지금까지의 세계를 떠난다. 헤세 식으로 말하자면 새가 알에서 나오듯 한 세계가 깨진다. 그 일면을 보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노 프라블럼」 「내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남기고 간 것들(「붕대를 한 남자」 「필름」), 낯선 사람과 함께한 시간(「페이퍼컷」 「missing」), 내면에서 차오르는 열정(「시튀스테쿰」) 등. 그로 인한 떠남 혹은 변화는 완성을 앞둔 조립식 장난감 총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거나 갓난아기 때부터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수도원을 탈출한다는 식의 행동으로 표현되어 미래를 향하기도 하고, 불확실한 기억 속을 헤매며 과거를 향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난생 처음 혼자 떠나게 된 여행에서 어떤 뚱뚱한 여자와 영국의 공항에서 필담을 하다가 잠들었다면, 똑같이 술만 먹는 아버지지만 이제는 멱살을 잡혀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면 ‘ 나’ 는 변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되어 지루하기도 하고 안온하기도 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모두 여행자들 ’일 수 있는 것은 그런 맥락일 것이다.

책을 덮자 다양한 풍미의 세계 요리를 맛본 것처럼 각 작품의 매력이 입에서 뒤섞였다. 되새김질까지 해보며 음미해보니 아무래도 인상적인 작품은 「내기」와 「missing」이다. 「내기」는 금기어가 무얼까 궁금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으면서도, 편한 분위기에서 오가는 아빠와 아들의 대화가 좋아서 슬픈 결말은 뒤로하고 이대로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던 작품이다. 가르쳐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푸념하는 아빠가 꼭 미래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더 인상적이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세 문단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삼연타였다. 「missing」을 다 읽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아름답다.”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소설 초반에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실종 아동 뉴스에 이어 화자가 여덟 살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갔던 경험이 나온다. ‘실종 사건 ’과 ‘ 낯선 사람 ’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예감, 지옥을 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조마조마한 느낌을 뒤로 하고 소설은 천국을 보여준다. 가슴을 쓸어내린 자리에 시리도록 아름답게 그린 천국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천국에 영원히 남고 싶다고 말하는 상상 속 아이와 소설 초반의 실종 아동을 오버랩시키는 마지막 문장, ‘아이들은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
묘한 기시감 때문에 인상적이었던 「기적 소리」도 있다. 소설을 읽으며 철길 옆에 사는 아이의 집을 두 눈으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지 소설 속 묘사가 생생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사진까지 찍어온 집이 아닌가 싶었다. 대문에 걸린 카메라. 소설을 다 읽고 내 컴퓨터의 2010년 12월 사진 폴더를 열었다. 군산 여행. 소설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곳은 틀림없이 군산 경암동 철길 마을일 것이다. 역시 사진이 있었다.

계절은 달랐지만 소설의 배경으로 짐작되는 군산 철길 마을을 여행하면서 다닥다닥 붙은 집들 위로 솟은 아파트를 나도 봤고, 푸른색 문도 아니고 동그란 손잡이에 달린 카메라도 아니었지만 소설에 나오는 중요한 집을 떠오르게 한 집 앞에 서 있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이 흉포한 세상을 견디며 여전히 여행해야만 하는 ’ 우리 속에는 모든 연령대의 우리가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늙으면 도로 애가 된다 ’, ‘ 할머니 속에도 소녀가 있다 ’는 말처럼 노인에게도 아이가 살고 있고, '애늙은이'라는 말도 있듯 아이들에게 조금씩 노인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 청소년’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이 그들 속에 살아 있고, 그 시절을 지난 사람들 속에서도 계속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에 나오는 다채로운 아이들을 만나며 내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이들 역시 이 책을 통해 세상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청소년기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아름다운 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등등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 몇 개가 처음 솟아나는 때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꼭 학교, 친구, 성(性), 가족 등 제한적인 소재로 이야기해야 할까? 최상희의 『델 문도』는 ‘ 청소년소설 ’ 하면 떠오르는 뻔한 소재들을 뛰어넘었다는 의미에서, 30대인 나 같은 독자도 끝까지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소년소설의 지평을 넓힌 작품이다. 내 속에 살고 있는 청소년은 이 책을 읽고 세상 어딘가에 누군가 있고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숨통이 좀 트였다고 했다. 그래서 주문처럼 외워보기로 한다. 델 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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