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양장본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어떻게 처음 내게 오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 그 후로 오랫동안 종종 생각나곤 했다. 아마도 '한밤중' '개' '사건' 이런 단어들이 마음에 들었던가보다. 다 읽은 지금도 나는 이 책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소설의 서사에서 더 이상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다고 믿는 독자라면..어쩌고하는 조선일보의 광고글(이런건 서평이 아니다)조차 마음에 든다.

 

첫 시작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미 죽어있는 개의 코끝을 만져보고 개를 안아올린다.

 

자폐증 아이가 책을 쓴다는 생각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번역은 좀 신경써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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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보기에 무취미한 인간이 이런저런 취미를 가진 인간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등등의 취미에 빠진 인간이 제대로 가족구성원 노릇을 하는 걸 아직 못봤다.

'취미'중..

2.
책이나 공부는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한 패스포드일지는 몰라도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와 뒹굴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비오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 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끼 식사를 걸러가면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음악은 좀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 하는 즐거움은 앞서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빈약한 대체물일 따름이다.

'인생' 중..

3.
신상공개라는 악법이 의도하는 바는 먼저 당사자에게 치욕을 주어서
재범을 하지 않게 하고 나아가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10대
매매춘을 근절하는 데 있지 싶다. 하지만 이 법은 연좌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 10대와 매매춘을 했다면 그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 치욕을 주고자 특정 인터넷
사이트나 관보 등에 게재한다면, 그 집안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고통을 받게 되고 멸시를 받게 된다. 아버지의 죄를 그 집안의 어린
아들이나 딸이 함께 받아야 한다면 그것이 연좌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상공개법은 죄를 지은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을
분리해 낼 어떤 장치도 갖고 있지 못하며, 설사 연좌제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 효과는 동일하다.(중략)
..교정(자기반성)과 재활(새회적응)이 그것이다. 하지만 교도소가
재범자를 양산해 내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법 집행이 처벌이라는
즉각적인 효용은 만족시키고 있을지 몰라도 교정과 재활에 대해서는
미숙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이번에 입법 통과된 10대 매매춘자에 대한 신상공개법은
처벌을 받고 나온 재소자의 재활을 원천차단한다는 데 문제가 크다.(중략)
..그러니 좀 더 인간적인 법 집행을 생각한다면, 10 매매춘자들에겐 신상공개가 필요한게 아니라 사형이 내려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사회적 자원을 보호할 뿐 아니라 '복수가 복수를 낳는' 항구적인
분쟁상태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해 근대인은 고대인의 복수를
폐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학적이고 인도적인 관점에서 복수가
나쁜 것은 그것이 범죄자의 교정(자기반성)과 재활(사회적응)을
원천 차단하기 때문이다.(중략)..신상공개법을 제안하고 추진한
장본인들의 인터뷰를 텔레비젼으로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10대 매매춘자들의 행위를 '짐승같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등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10대 매매춘자들은
왜 사람이 아닌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들은 뭔가? 나는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고 또 저지를 수 없는 범죄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범죄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열린다. 10대 매매춘자들을 '인면수심'이라고 물아친다고 해서 인간
세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막가파적 레토릭이 신상공개법이라는
비인간적인 법을 만들었다.
아,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데 무슨 법을 만들지 못했을까?

'복수' 중..

4.
참(懺)

시베리아에는 참이라는 동물이 산다. 어떤 치들은 참을 곰이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크기가 딱 그만한 데다가 뒷발로 뚜벅뚜벅 걷는 그 놈을 온통시야가 희미해지는 눈발 속에서 보면 영락없는 곰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곰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가지(假知)식자들은 또 참을 원숭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참이 원숭이 종류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원숭이 류가 진화하고 분화하면서 열대성 기후를 좋아하는 놈들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를 자생지로 삼았고, 추운것을 좋아하는 놈들끼리 어울려 북방으로 갔는데 바로 그게 참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일리가 없는 말로 들리지는 않지만, 주박이 되는 이론과 학설로 제 눈과 귀를 틀어막고 스스로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버린 이들이 가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래턱이 튀어나오지 않고 안으로 잘 들어가 있는 것 하며 얼굴에 털이 없는 것을 보면 참이 원숭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의 일종이라는 것을 그들은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시베리아의 겨울은 기후의 변덕이 심해서 날씨가 마냥 좋을 줄 알고 겁없이 긴 사냥길에 오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어쩌다 길눈이 어두워 실종하는 사람들이 많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눈보라가 불어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길이 지워지고, 흔적 없는 길 위에서 사냥꾼의 마음은 공황에 빠져든다.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황급히 몰아쉬는 입김은 살얼음이 되어 뺨에 달라붙고 칼끝 같은 바람은 사정보지 않고 언 살갗을 찢어 놓는다. 하므로 그 와중에 살아남는 이가 좀처럼 없다. 온 목숨을 걸어 놓고 제딴에는 한 방향을 향해 열심히 전진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 꼬리를 물려고 맴도는 실없는 봄날의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한 자리를 몇바퀴나 거듭 배회했을 뿐이다. 길 잃은 사람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승냥이 떼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있고, 마을로 생환하여 그날을 생일 삼아 잔치를 벌이는 사람이 있다. 배는 고프고 온몸이 한기로 뻣뻣하게 굳어 탈진되었을 때, 갑자기 인기척처럼 등 뒤가 뜨끈해지는데 조난자가 뒤돌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어개를 툭 친다는 것이다. 환영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에 참이 있다. 지금 말하려고 아까는 그냥 지나갔는데, 참의 특징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뜨겁다는 것이다. 얼마나 뜨거운가 하면 이 짐승이 딛고 지나간 곳은 눈이나 얼음이 흥건히 녹아있다. 참은 인간을 좋아해서 아주 멀리서도 인간의 냄새를 맡고 온다고 한다. 그러면 길 잃은 조난자는 가지고 있던 칼로 반가워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참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낸 다음 그 속에 들어가면 된다. 참에겐 피가 별로 없다는데 실핏줄과 살 속에 고농축된 피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눈보라 치는 얼음장 위에 벌렁 누운채 참은 조난자가 칼을 들고 그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는 동안에도 마취제 없이 개복 수술을 받는 것마냥 눈만 깜빡깜빡하고 있단다. 자신의 몸이 들어갈 만큼 참의 내장을 들어내고 조난자가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면 따뜻한 한증탕에 든 것처럼 후끈하다. 뿐만 아니라 참의 뜨거운 뱃 속은 동상으로 못이 박힌 어혈을 단번에 풀어준다. 추위와 동상을 해결했으면 이제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데, 허기진 조난자는 방금 파낸 참의 뜨거운 내장을 오물오물 씹어 먹어도 좋고 자신이 들어앉아 있는 참의 뱃속에서 젖을 빠는 새끼처럼 야금야금 살을 파먹어도 좋다. 참의 육질은 어릴 때부터 우유만 먹여 키운다는 저 어느 색목인 나라의 송아지고기보다 맛있고 저작(咀嚼)을 하면 할 수록 살코기로부터 갖가지 신비로운 성분이 발효한다고 한다. 참은 배에 긴 칼금을 맞은 채로도 5,6일 정도는 정상대로 심장이 벌떡이고 눈도 깜빡거리는데 죽고 나서도 한달 간이나 생정의 체온을 유지한다고 한다. 시베리아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구조된 조난자들은 거개가 참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는데, 참이 이렇듯 잘 알려지지 않고 이 변변치 않은 사람의 글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는 까닭은, 인간에게 수치심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부지한 조난자는 차마 반가운 동료를 죽이고 그 덕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기를 꺼린다. 칼로 배가 죽 갈라진 동료가 오랫동안 죽지 않고 눈을 꿈벅이며 "살려줘,살려줘. 나는 너의 친구잖니?"하고 호소했다는 것, 그런데도 자기혼자 살기 위해 동료를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피와 살을 먹고 마셨다는 것을 수치로 여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懺)' 전문(全文)

5.
나는 여자들에게 청해 듣는다. 그녀들의 어린 시정 이야기를..
(중략)내게 그 찰나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설명해주려고 온통 주의를 모으던, 바로 그 때의 당신 모습을? 나직하고,진지하고,한없이 부드러웠던 말투와 표정.얼마나 나직하고 부드러웠는지 당신은 모를거야.나는 너무 진지하게 듣기에는 시시할 수도 있는 그 이야기보다 당신의 말투와 표정에 취했어

'여자들의 어린시절' 중..

6.
나는 겨울에 죽을 것이다. 밧줄 하나를 들고 첫눈 내린 날 오후에 눈발이 희끗희끗한 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태너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자만, 죽는 것은 내 의지대로 하고 싶다고 늘 다짐했다. 그것을 행하기 보름 전에 이혼 수속부터 하겠다고, 아내에게는 일찌감치 말했다. 아이를 낳지 않았던 것처럼, 내 죽은 뒤에는 아무런 것도 남겨놓고 싶지 않다.(좋은 어감이 아니지만, 내게도 미망인이 있다는 것은, 끔찍하다). 여름이 아니고 왜 찬바람 부는 겨울이어야 하는가 때문에 , 이 요령없는 글은 쓰여졌다. 뱀들이 내 시체에 노니는게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산삼을 먹고 몸이 드거워진 흰뱀은 한겨울의 눈 속에 피를 식히기 위해 나타난다고 한다.

'지그재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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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늘 하나하나의 문장에 고민하고 고심하며 애를 쓰는 타입이어서, 컨디션이 아주 좋은 날에도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엉금엉금 기어가듯, 조금씩조금씩밖에 써나가지 못했다. 내 경우에는 아주 하찮은 단어가 거대한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단어를 종잇장 위에 옮긴 뒤에도 마치 신기루, 모래 위에서 반짝이는 의심스러운 우령처럼 거기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내게는 절대로 삭스가 그러는 것처럼 적절한 표현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차단되어 감정과 언어 사이의 무인 지대에 갇혀 있었고, 내 생각을 표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여간해서 혼란스러운 웅얼거림 외에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삭스는 그런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말과 사물이 조화된 반면, 내게는 그것들이 끊임없이 분리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조각들을 주워 모아 하나로 이어 붙이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지만 삭스는 단 한번도 그런 식으로 혹시 자기가 잘못된 조각들을 이어 붙이지나 않았을까 해서 쓰레기통을 다시 뒤지며 꾸물거리는 법이 없었다.

2.
"그랜트는 내가 미쳤을때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술에 취했을 때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언제나 나란히 서 있다."

3.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 즉 자신의 욕망에 직면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기질이 한 선량한 남자를 이상하게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그 자신의 선과 타협하도록 이끈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재난의 핵심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은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문제가 되면 아주 사소한 행위에서까지도 완벽하고 거의 초인적인 엄격함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망,자신의 인격적 결함에 대한 참담하기 그지 없는 자각이었다.

4.
결국 숨을 멈출수 있는데에는 한계가 있는 거니까, 조만간 숨을 쉬기 시작해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니까-비록 공기가 오염되어 그것을 들이마시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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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대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 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하면 병신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개새끼들' 중..

2.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의 전적인 생산자이자 그것을 자정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체제라면 인류는 이쯤해서 지구를(자연의 자정능력을 가진) 동물들에게 돌려주는 게 낫다.

-'혁명은 안단테로' 중..

3.
폐업에 나선 의사들은 "이럴 바에는 개업할 돈으로 차라리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업하지 말고 카페나 당구장을 하면 될 것이다.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인간은 의사보다 하등하단 건가.자신들이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의사들의 이중의식은 그들의 권리주장의 공정성을 손상한다.

-'돌팔이2' 중..

4.
그런 도덕주의자들이 매우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그들 스스로 쉴새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조리퐁은 여성 성기이고 가수 이정현이 꼽고 나온 비녀는 남성성기이며 테트리스 게임은 삽입성교이고 '거북알'이라는 과자는 콘돔이다. 그들의 '음란성'은 놀랍지 않은가. 그들의 눈에 온 세상은 성기와 닮은 것들이다. 나는 그들이 총각김치나 조개구이를 먹는지가 정말 궁금하다.

-'거북알' 중..

5.
돌팔이 이후 내가 만난 의사들이란 늘 불친절했다. 몸에 좋고 나쁜걸 잘 구별해 먹어선지(이른바 의사답게) 평균보다 뽀얀 외관을 한 그들은 늘 환자에게 불친절했다. 그들이 그 뽀얀 입을 여는 순간이란 자기들(이른바 의료진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할 때뿐이다. 그런때 그들의 얼굴은 생선가게 앞에서 생선의 물을 의논하는 아주머니들의 나른한 얼굴과 같다. 답답하다 못한 환자나 보호자가 비굴함을 넘어서는 겸손으로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그 질문의 비전문성을 사사오입한다. (중략)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라서라는 의견은 순진하다 못해 아둔하다.

-'돌팔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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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이 이미지의 연속적인 단계일 것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자기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첫번째 경우에 이미지는 선량한 외양이다. 여기서 재현은 신성의 계열이다.
두번째 이미지는 나쁜 외양으로 저주의 계열이다.
세번째 이미지는 외양임을 연출한다. 이것은 마법 계열에 속한다.
네번째 이미지는 전혀 외양이 아니라 시뮬라시웅의 계열이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고 있는 기호로의 이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첫번째 기호는 진실과 비밀의 신학으로 돌려진다.(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여기에 속한다.)
두번째 기호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시대를 여는데,여기서는 자신을 인지하기 위한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참으로부터 거짓을,실재의 인위적 부활로부터 진짜 실재를
분리하기 위한 최후의 심판도 더 이상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죽었고 또 미리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2.
사회전체가 광기에 젖어 있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어떤 사람들을 따로 떼어 미친 사람의 표준을
삼아야 한다. 자신이 광기에 젖어 있음을 숨기기 위하여
일종의 저지전략의 일환으로써 자신의 부정인 광기의 범주를
만들어 이것만이 미친 것이고 미친 것은 사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가장하기 위하여 광기의 모델을 생산한다.
그들에 비추어 다른 사람들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인종학의 경우처럼 광기가 유폐의 대상이 되고
객관적 분석의 대상이 되면 어느덧 그 광기는 광기가 아닌
일반적인 것이 된다. 즉 광기란 우리의 이성의 범주를 벗어난 것인데
광기가 분석되어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이제 광기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광기가 사라지게 되면 광기의
실재성이 없으므로 사회는 살제 광기의 시뮬라크르를 생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사회는 쉬지 않고 광기를 규정하고 흡수하는 작업을 해야한다.
실제로 광기의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광기란 시대에 따라서 그 규정된 범주가 다르다. 그것은 곧 광기가 한 사회의 음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광기의 역사는 이성에 의한 사회규범의 변화의 역사와도 같다. 광기란 그 사회가 감추고 있는 다른 모습일 따름이다. 따라서 한 사회는 자신이 내건 광기의 거울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역주)

3.
자본의 순간적인 잔인성,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그의 근본적인 부도덕성, 이게 바로 스캔들적인 것이고,
계몽사상 이래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좌익사상의 공리인 도덕과
경제의 등가 체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도덕과 경제의 등가라는 계약사상을 자본에 돌린다.

그러나 자본은 이 계약사상에는 전연 관심이 없다.

자본은 괴물 같은 기업이다. 원칙도 없으며, 오직 한 가지,
그게 전부다. 자본에 규칙을 강제하면서 자본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계몽된> 사상이다. 그리고 혁명적 사상을 대변하는,
자본에 대한 모든 비난은 오늘날 자본이 놀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다시 비난한다. <권력은 정의롭지 못하며,그의 정의는 계급의 정의며,자본은 우리를 착취한다 등.> 마치 자본이 그가 움직이는 사회와 계약에 의해 맺어져 있기라도 하였듯이.

4.
그러나 위험에 따라 어려움도 크다. 어떻게 위반하는 척하고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커다란 가게에서 절도를 시뮬라크르로 해보시오. 어떻게 시뮬라크르인 절도임을 단속 기관에게 설득할 것인가? <객관적인> 어떠한 차이도 없다. 이들은 실제 절도와 똑같은 몸짓들이고 똑같은
기호들이다. 따라서 기호들이란 이편에도 저편에도 편향적으로 속하지 않는다. 기성 질서에게는 그들은 항상 실재의 질서에 속한다.
거짓 납치를 조직하여 보시오. 당신 무기의 무해함을 확인하시고 어떠한 인명도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그렇지 않으면 다시 형법에 떨어지게 되니까) 가장 확실한 인질을 잡으시오. 몸값을 요구하시오. 그리고는 작전이 가능한 한 모든 반향을 일으키도록 하시오-간단히 말해, 완벽한 시뮬라크르에 대한 진압 기구의 반응을 시험하기 위하여 <진실>에 가장 가깝게 밀착하시오.
당신은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인위적 기호망은 실제 요소들과 뗄 수 없이 섞인다.(경찰은 당신을 보고 실제로 총을 쏠 것이다. 은행의 어떤 고객은 기절하거나 심장마비로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로 당신 구좌에 허위 몸값을 지불할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은 원치 않게 즉시 실재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5.
1971년 라우드 가에 대해 시도된 tv-진실의 미국적 경험의 근거는 여전히
기본적인 평범성 속에서 그리고 철저한 진본성 속에서 실재의, 경험된 것의,
발굴의 이데올로기이다. 대본도 없고 각본도 없는 7개월간의 촬영.
300시간의 생방송,끊임없는 한 가족의 이야기. 그의 극적 사건들,
기쁨들,有爲變轉들, 한마디로 <생상한> 역사적 문서, 그리고 <우리 일상적 차원에서, 달 착륙 영화에 비교될 만한 tv의 가장 아름다운 수훈>이다. 촬영중에 이 가족이 해체되어서 일은 더 복잡해진다.
갈등이 폭발하여 라우드가 사람들은 헤어졌지 때문이다. 이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tv가 책임자인가? tv가 거기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tv가 거기 없었던 듯이 라우드가를 찍는 환성은 더욱 재미있다. 연출가의 승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거기 없었던 듯이 살았다.> 부조리하며 역설적인, 참도 거짓도 아닌 유토피아적인 공식이다. <우리가 거기 없었던 듯이>는 <당신이 거기 있었던 듯이>와 등가이다.
(중략)
tv-진실. 그 의미의 모호성으로 하여 좋은 용어, 이 가정의 진실에 해당되는가, 아니면 tv의 진실에 해당되는가?
사실,라우드가 의 진실은 tv이다.

6.
텔레비젼은 모든 사건의 역사성에 종지부를 찍는 진정한 해결이다. 유태인들을 화장터나 가스실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와 이미지의 테이프에, 기독교적 화면에, 소형 정보처리기로 다시 통과시킨다. 망각, 근절은 이리하여 마침내 대중적 차원에까지 올려지고, 복고 속에서 완성된다.
죄의식의, 부끄러운 잠재태의, 말해지지 않는 것의 형태 하에 여전히 망각으로 남아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차후로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학살 앞에서 전율하고 울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기호. 그러나 이렇게 싸게, 몇 방울의 눈물로 축출해버린 것은 사실상 결코 다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이미 줄곧, 현재, 다시 일어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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