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들은 교육이라 함은 단지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낡은 질서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도록 준비시키는 것일 뿐, 그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2.

지배적 견해에 도전하면서 공개적으로 발설된 대담한 생각의 힘은 쉽사리 측정할 수 없다. 적들의 자기 확신만이 아니라 친구들의 자기만족까지도 뒤흔들 정도로 용기를 내어 말하는 특별한 사람들은 변화를 위한 소중한 촉매이다.

 

3.

학생들이 기성 당국에 도전하기 시작하면, 포위공격을 당한는 행정관료들은 종종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보곤 하는데, 이는 젊은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4.

그러나 이때쯤에 나는 법과 정의 사이의 간극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법의 자구(字句)가 현실 상황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만큼 중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중략)..

이런 경우 '법의 지배'란 보통 변호사 비용을 댈 능력이 있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걸 뜻하는 것이며, '정의'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5.

그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나쁜 편'이었고 우리는 '좋은 편'이었으며, 일단 그런 결정이 내려지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그리스인들의 시대까지, 기원전 5세기에 투키디데스가 서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의 요람'이자 장려한 예술과 문학의 안식처인 아테네는 '좋은 편'이었다. 냉혹한 전체주의 스파르타는 '나쁜 편'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진척되면서 아테네인들은 점점 더 많은 잔학행위-무차별적인 대량학살, 여성과 어린이의 노예화-를 저질렀다.

 

6.

흔히 언론 또는 몇몇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는 젊은이들만이 전쟁에 반대한다고들 했다.

..(중략)..

이기심의 발로라는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이자 전쟁 종식을 위한 싸움을 지속시킨 가장 커다란 영감의 원천은 병사들 스스로가 반전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7.

책을 읽고, 한 사람을 만나고, 한 순간의 경험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제쳐두어서는 안된다.

 

8.

행동에 앞서 댄 베리건은 이렇게 썼다. "훌륭한 벗들이여, 순조로운 질서를 깨뜨린 데 대해..(중략)..동료 교인들이여, 전쟁이 시작된 이래 밤낮으로 우리를 번민케 한 물음을 가슴속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가 죽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이가 고문받고 쫓겨나고 굶어 죽고 미쳐야 합니까?..(중략)..언제, 어느 순간에 여러분은 이 전쟁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시렵니까?" 

 

9.

정치이론 과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피날레였지만, 나는 학생들이 정치학은 그것이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를 바랬다.

 

10.

정치권력은, 그것이 아무리 엄청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허약하다(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소심한지를 유념하라.)

..(중략)..

이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11.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기의 편견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우리의 편견을 역사에 대한 인도적 관점이라는 방향으로 두는 게 좋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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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정도까지 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詩 '후손들에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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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번째가 먹을 것이요, 그 다음이 조직이다. 둘 다 사는 데는 불가결한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골라 그들에게 책임을 맡기는 것. 이곳 병실에서 공존하기 위한 규칙을 세우고 승인하는 것. 바닥을 쓴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세탁을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의 규칙을 정하는 것.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평할 것이 없다. 그들은 심지어 비누와 세제도 주었다. 늘 우리 침대를 정돈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잃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경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인 군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사상자는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저녁에 이야기나 우화나 일화같은 것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혹시 성경을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창조된 이후의 모든 일을 되새겨볼 수 있을 텐데.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2.

말이란 그런 것이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 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3.

내 목소리가 나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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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하자면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40대만 넘으면 '원로'로 자처하면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열정을 쉽사리 접어버린다는 것이다.

 

 

2.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지식이란 쉬임없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에서는 원로의 권위나 노년의 안식 따위는 필요없다.

 

 

3.

더 폼나게 말하면, 심해를 탐사하는 고래의 충혈된 눈과 단 몇걸음에 히말라야를 종단하는 거인의 다리를 지녔다고나 할까.

 

 

4.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앎이 기쁨이라는 전제는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앎이란 그저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는 것,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

세상에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6.

문턱을 한꺼번에 넘기는 어렵지만 하나씩 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개는 단번에 정상에 도달하려 하기 때문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법이다.

 

 

7.

자신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사는 건 바보다. 타인의 능력과 제대로 접속하면 내가 지닌 능력의 몇십 배의 능력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8.

가족주의의 속내는 참 허망하기 그지없다. 중형 아파트, 근사한 자동차, 남부럽지 않은 소비, 일류대학교, 노년을 위한 보험-. 우리 시대 가족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지표들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상류층이건 하층민이건 거의 예외가 없다.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이미 거기에 도달한 경우는 거기서 좀 더 상승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셈이다.

 

 

9.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10.

왜냐하면 사랑이 생에 대한 기쁨이라면 그 충만함은 흘러 넘치게 마련이다. 흘러 넘치지 않고 단지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멈추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짧은 열정 뒤의 긴 권태. 그리고 그 이후에는 권태를 제도와 도덕의 힘으로 버티려는 안간힘. 그리하여 다시 연민과 희생이라는 수렁 속으로 들어가면서 체념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변태적 쾌락의 길.

 

 

11.

다만 다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그 길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그것도 행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남보다 덜 불행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다니.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12.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체가 수동적, 방어적으로 될 뿐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중략)..

건강할 때는 저절로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배려는 근본적으로 의무나 희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깨어지면 타인을 배려할 수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에 잘 하던 것까지 귀찮아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이 풀릴 리 없다. 좋은 사람이 와도, 훌륭한 기회가 와도 감당하지 못한다.

 

 

13.

나는 여성의 사회적 소외의 단적인 예가 체육교육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몸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 아니 그 이전에 몸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교육과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대한 조절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여성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14.

흔히 공동체라고 하면 이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진지한 집단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진지함은 공동체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 공동체들은 내적으로는 상하위계가 작동하게 되는 한편, 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짐으로써 결국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돈과 권위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들의 성격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떤 유형이건, 어떤 상처와 기억을 갖고 있건 나는 코뮌이 살아 움직이려면 '유머러스'해야 된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웃음이야말로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내는 기초이자 원동력인 까닭이다.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중략)..

웃기지 못하면 잘 웃기라도 해라.

 

 

15.

돈과 지위, 명성 따위를 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말 버리기 어려운 건 무의식에 새겨진 자의식이다. 그것은 때로는 교만과 욕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잉겸손과 나약함으로, 때로는 감상과 무력함으로,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관계와 활동을 가로막는다.

 

 

16.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17.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중략)..

자신의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우리 시대 전문성의 실체이다.

..(중략)..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런 부조리와 이러한 지적 생산방식과는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 아니다.

 

 

18.

인간의 악덕은 동물에서 찾고, 미덕은 인간만이 점유하는, 참 유치하고도 조잡한 '언어 게임' 아닌가.

 

 

19.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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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편 대사회적으로 그것은 가족의 안녕을 모든 가치의 우위에 두는 가족이기주의를 낳았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공공적 삶은 설 땅을 잃게 만들었다. 공동체적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제외한 여타 공동체는 한국인들의 삶에서 사실상 관념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 중..

 

 

2.

걸핏하면 언론이나 정부가 사회불안을 강조하면서 '안보 의식 해이' '기강 이완'이니 '우리 내부의 허점' '뒤숭숭한 세태' 운운할 때 뻔히 요청되고 강화되는 것은 '풀어줬더니 군기가 빠졌다'는 식의 군사주의적 질서 의식이다.

 

3.

반세기를 넘게 재생산된 반공주의 회로는 모든 불법적이고 부패한 현실을 코 앞에서 보면서도 그럭저럭 순응하고 사는 버릇("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세상이 다 그런거지"), 그것에 대한 도전이 도전자 개인에게 쓸모없는 고통과 번민을 안겨 줄 것이라는 공포("너 혼자 그래봐야 너만 손해야, 세상이 바뀌겠냐?"), 이것을 통해 유지되는 집단적 범죄 행위에 대한 동참과 인정("너나 나나 다 그렇게 뜯어먹으며 사는 거지, 도덕 군자라고 별 수 있냐?")의 정치 사회적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권혁범, '내 몸 속의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 중..

 

 

4.

모든 저항을 무조건 물리력으로 분쇄하려는 파시스트적 국가와 그에 대한 맹종에 길들여진 냉소적인 사회에 절대적 도덕적인 원칙을 위해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이해하였다.

 

-박노자,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 중..

 

 

5.

그래서 '우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 '우리'가 누구를 지시하는 것이냐는 공식적인 질문은 거의 제기하지 않는다.

 

-김은실,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문화 논리와 가부장성' 중..

 

 

6.

어쩌면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민주 시민 사회를 갈망하고 아무조건 없이도 활동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는 권위를 스스럼없이, 강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사실 그런 조직 구조에 더 쉽게 적응하는 게 우리들이 아닐까요?

 

7.

그 익숙함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략)..

저는 1970년대의 이념과 문화 코드 속에 젖어살았던, 다시 말해 그 이념과 문화에의 익숙함이 1980년대 격렬했던 학생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구체성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적절한 주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염원하지만 민주주의를 모르기에 싸움을 위한 조직체에 적합한 인간상들이었습니다.

 

-권인숙, '진보, 권위 그리고 성 차별' 중..

 

 

8.

우리는 백인의 흰 피부에서 세련과 문명을 연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연상되는 세련성과 문명의 이미지는 선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이처럼 백인이 '세련성', '문명', '역사'과 연관된 문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은 다분히 야성적, 야만적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중략)..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주류를 이루는 동남아시아인은 같은 아시아인이지만, 인식의 거리상으로는 황인종보다 흑인종에 가깝게 취급된다. 한국인의 인식에서 황인종은 중국인, 일본인의 범주로 국한되고 동남아시아인은 배제되다. 해외 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아시아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서양인으로부터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혼동되는 경우는 그러려니 이해하면서도, 베트남인이나 타이인과 혼동되면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우리의 머릿속에 '검은 피부'로 인식되는 그들과 동일시된 데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9.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도 안다. 자기 위에 군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실은 이 사회의 위계 서열에서 말단에 놓여 있으며, 돌아서면 욕을 하기는 하지만 면전에서는 사장이나 상사들에게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존재라는 것을. 그들이 별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것도, 또 그들이 뻐기는 '많은 월급'으로는 자식 교육시키기도 어렵다는 것도 안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랑하며 검은 피부에 이종 차별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한국인들이 실은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것도, 또 미국 사람들에게는 헤픈 미소를 흘린다는 것도 그들은 안다.

 

-유명기, '한국의 제3국인, 외국인 노동자' 중..

 

 

10.

이러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만들어진 복잡한 호칭으로 자신과 타자를 인식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인식할 때 좌표적 인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인척 관계가 전혀 없는 남하고도 이런 인상에 의거해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젊은 엄마들이 각자의 아기들을 놓고 비교할 때 생일이 하루라도 빠르면 자기 아이가 형 행세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험성의 반복이자, 아기가 장래에 겪을 학번 비교놀이의 첫걸음이 되는 셈이다.

 

-김근, '너 뉘집 아들이야?' 중..

 

 

11.

단, 예수담론의 특이성은 다른 중계자들/메시아들과는 달리, 그분 가 자신이 곧 신이라는 데 있다. 신 자신이 중계자라는 건, 신이 인간이 된다는 건, 곧 신의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더욱이 육화된 신이 왕이나 현자의 모습이 아니라 더없이 비참한 몰골의 사람이요 더없이 사나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신의 자기 해체가 가히 발본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담론은 신이 자신을 가능한 한 최악으로 비하함으로써,(인간적 존재가 신의 부름을 받아 스스로가 고양되고 완성됨으로써가 아니라) 신이 자신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메시아적 역할, 즉 쌍방 교신의 통로를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기도의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상징하는 중차대한 재해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진호,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 중..

 

 

12.

집의 내장은 바꿀 줄 알아도 집 외부의 관리는 무척 소홀하다. 자기 집 외관이 어떻게 주변에 보여지는지 관심이 없다. 남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이 그냥 싫은 거다. 더욱이 집 주변의 도로, 담장, 나무 등등과의 관계는 말할 나위 없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중략)..

시민의 자의식이 출발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는 자기가 사는 집의 내부를 감싸고 있는 집의 외부에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전진삼, '한국 건축, 파시즘의 증식로' 중..

 

 

13.

그러나 한국에서 파시스트들의 몰락은 수준 낮은 비극 소설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편의 잘 꾸며진 희극 공연이었다. 십여 년 전 전두환의 5공화국 신헌법의 제정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관객들은 그가 경상남도 합천 고향집에서 끌려나와 감옥으로 향하자 연도에 몰려나와 박수를 친다. 그래도 그의 고향 사람들은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끌려가는 그를 동정하며 이 한국적 코미디에 비장감을 보태고 극적 효과를 높인다. 법정에서 검사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이 대목은 분명 클라이맥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아무도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이 역시 한국 정치 코미디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유는 그에게 사형 구형을 내리는 자나, 그 자신이나, 관객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실수로라도 사형당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14.

'기억의 정치'? 그런건 기억이라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적 능력을 스스로 내던진 대한민국엔 없다.

 

15.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그는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직무를 수행하는 '사유하지 않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선 이근안도 마찬가지다.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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