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달력 이야기 속에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력은 양력(그레고리력)에 쉽게 밀려났지만, 그레고리력은 세계력에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통력보다 그레고리력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과학적’이라는 말은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은 오히려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것 같습니다.
2.
그런데 그러한 실천이 자기 마음속에서 만족을 얻는 것 외에 달리 보상받을 길이 없다는 점이 공자 사상의 비극입니다. 공자 사상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따라서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중략)…그러나 바로 여기에 공자 사상의 강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그르냐를 따지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 해를 입을지라도 꼭 해야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입니다. 공자 사상에는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입니다.
3.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도덕경>, 18장
4.
최고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할 뿐이다. 그 다음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고 칭송을 듣는다. 그 다음 수준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 아래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도덕경>, 17장
5.
노자는 “원수를 은혜로 갚으라”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정의로 갚으라”라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핍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악을 박멸하겠다는 강직한 태도를 갖는 것은 죽음의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사람의 삶은 본래 곧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사람의 삶이 본래 ‘부드럽고 약한 것’이라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부드럽고 약하며, 죽음에 가까울수록 단단하고 강해진다고 합니다.
6.
세상 사람들은 마치 진수성찬이라도 받아 놓은 듯 신바람이 났네.
화창한 봄날, 정자에 올라 꽃구경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나만은 담담하고 조용하며 마음이 동하는 기미가 없네.
마치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마치 아주 지쳐 돌아갈 집도 없는 강아지처럼.
사람들은 무엇이든 남아돌 만큼 가지고 있지만,
나만은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네.
아, 나는 바보 같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그저 멍청할 뿐.
남들은 딱 잘라 잘도 말하는데, 나만은 우유부단, 우물쭈물.
흔들흔들 흔들리는 큰 바다 같네.
쉴 줄 모르고 흘러가는 바람이네. -<도덕경>,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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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자는 통이 커서 별을 따다가 공기놀이를 하는 이야기나 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자잘합니다. 겨우 몸 다치지 말고 오래 살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젊은 남자들이 군대 갈 때, 어른들이 한결같이 충고하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다. 몸조심하거라.”
“앞에 나서지도 말고 뒤에 처지지도 마라. 그저 중간만 가라.”
이런 이야기는 철학이라기보다는 비굴하고 교활한 처세술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공자의 도를 비웃은 장자의 ‘큰 도’는, 사실 개인의 생명과 그것의 온전한 발현을 이루어 가는 문제와 단짝입니다.
8.
공자의 제자 중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자공이 길을 가다가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뭄으로 시들어 가는 곡식에 뿌려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돈 버는 재주가 뛰어났던 자공은 새로운 발명품들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농부에게 새로 나온 물 긷는 기계를 권했습니다. 농부는 자기도 그런 기계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일부러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새 소식을 전해 주려 한 자공을 무안하게 만듭니다. 기계를 사용해서 편해지면 인간의 본마음이 변질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땀 흘리는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장자>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기계나 노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기계를 사용하여 더 많이 생산하는 사회적인 변화가 생산을 담당하는 농부들에게 돌려주는 이득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9.
논쟁자들은 왜 논쟁을 마무리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옳고 그름의 표준을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언어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분열시키고 시비를 일으키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10.
대인과 소인의 일이 다르며,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는 맹자의 역할 분담론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지배 계층의 삶이 몸을 수고롭게 하는 피지배 계층의 삶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이 점은 꾸준하게 먹고살 수 있는 경제적 토대, 즉 ‘항산’을 마련해 주어야만 꾸준히 변하지 않는 마음, 즉 ‘항심’을 갖게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과도 모순이 됩니다. 결국 맹자는 백성들의 정신적 안정이 물질적 안정에 달려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만들어진 꾸준히 변치 않는 마음을 지배 계층에게 복종하고 의리를 지키는 마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11.
현대 과학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과 기호와 과학 언어로 표현되어 극도로 추상화되었다면, <주역>은 모호한 상징과 한문이라는 비일상적 문자, <주역> 신봉자들의 특수한 해석으로 신비화되어 있습니다. 신비화된 <주역> 이론은 과학에도 낄 자리가 없고, 대중에게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역>을 알면 우주를 안다느니 귀신을 부린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만들어 냈을 때 가졌던 나약함과 의존성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12.
마침 <논어>의 ‘효’에 관한 구절을 강의하던 그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라지. 우유는 소 젖 아닌가? 소젖 먹고 자란 아이와 사람 젖 먹고 자란 아이는 다르지 않겠는가?”
아마도 ‘충효 사상’을 내세우면서 불효자들이 가득 찬 세상 탓만 할 게 아니라, 먼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우유를 먹는다고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은 문화의 산물이며, 사회의 상부 구조인 문화나 도덕은 우유를 먹느냐 모유를 먹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 관계나 물질적 토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유를 먹이느냐 모유를 먹이느냐의 문제가 바로 사회적 토대와 관련 있는 것이며, 나아가 가치관이나 생활양식까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신문에 영국의 한 의학팀이 돼지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그 뱃속에 사람의 간이나 심장을 달고 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언제든 뱃속에 있는 인간의 장기를 다시 사람들에게 내주어야만 하는 그 돼지가 사람들의 식사를 위해 제 몸을 내주는 돼지보다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 시간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했을 때, 학생들은 윤리라는 명목으로 과학 연구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과학이 발견한 지식과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통제하면 될 뿐이라는 의견을 많이 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묘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너와 내가 논쟁을 하여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삼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바르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른데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은데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서로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되겠는가. -<장자> ‘제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