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제가 출구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똑바로 이해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빈틈없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거든요. 원숭이였을 때 저는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때도 오늘날도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유로써 사람들은 인간들 가운데서 너무도 자주 기만당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헤아려지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입니다.
2.
그런데 이 사람들 자체에는 제 마음을 특별히 유혹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앞서 말씀드린 저 자유의 신봉자였더라면, 저는 분명 이 사람들의 침울한 눈길에서 제게 보여진 출구보다는 망망대해 쪽이 낫다고 했을 겁니다.
-이상, <학술원에의 보고> 중에서
3.
인간적 본질이란, 날리는 먼지의 본성 탓에 그 바탕에서 가벼워, 속박을 견디지 못하는 법이니, 그 스스로를 묶어놓으면 머잖아 미친 듯이 그 족쇄를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하여 장벽, 사슬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천지사방으로 짓찧어 흩고 말 것이다.
4.
지휘부의 방 안에서는-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거기 앉아 있는지는 내가 물어본 그 누구도 몰랐다, 이전에도 지금도-이 방안에서 아마도 인간의 모든 사고와 소망들이 맴돌았을 것이며 또한 인간의 모든 목표와 성취가 그 대립원을 그렸을 것이다.
5.
오늘날이라면 아마도 위험 없이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너의 모든 힘을 기울여 지휘부의 지시사항들을 이해하려 애쓰라, 그러나 다만 일정 한계까지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골똘히 생각하기를 그쳐라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남모르는 원칙이었다. 매우 현명한 원칙이다.
-이상, <만리장성의 축조 때> 중에서
6.
늘 있는 사건 하나: 그것의 감내 일상적인 당혹 한 가지.
A는 H출신 B와 중요한 사업을 매듭지어야 한다. 그는 예비 협의를 위하여 H로 가는데, 왕복이 각각 십 분이 안 걸렸고 집에 와서는 이 특별한 신속함을 자랑한다. 다음날 그는 다시 H로 이번에는 사업의 최종적인 마무리를 위하여 간다. 그 일이 몇 시간은 걸리리라고 예상하여 A는 새벽같이 떠난다. 그러나 모든 부수적인 상황들이, 적어도 A의 생각으로는, 전날과 조금도 다름없는데도 이번에는 H로 가는 데 열 시간이 걸린다. 지칠 대로 지쳐 그가 저녁에 H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B는 A가 오지 않는 데 화가 나 반시간 전에 A를 만나러 A의 마을로 갔으니 사실은 그들이 도중에서 만났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A에게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A는 사업이 걱정되어 즉시 떠나 서둘러 온 길을 되돌아간다. 이번에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는데도, 같은 길을 순식간에 간다. 집에 와서 그가 들은 이야기로는 B 역시 A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H에 왔는데, 대문에서 A를 마주쳐, A에게 사업을 상기시켰건만 A가 자기는 지금 시간이 없다고, 지금 서둘러 가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A의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B는 그래도 A를 기다리려고 여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사이 A가 되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벌써 여러 차례 묻기는 했으나 아직도 위층 A의 방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B와 이야기하고 그에게 모든 해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A는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위층에 거진 다 올라가는 참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다 그만 뒤꿈치 근육 열상(裂傷)을 입어 고통으로 까무라칠 지경이 되어, 비명조차 못 지르고 어둠 속에서 다만 끙끙거리고만 있는데, B가-아주 멀리에서인지 바짝 그의 곁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화가 나서 계단을 쾅쾅 디디며 내려가 영영 사라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린다.
-이상, <일상(日常)의 당혹>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