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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처음 접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는 갈수록(물론 내가 시리즈를 쭉 따라가며 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접한 범위 내에서) 내게 실망을 주고 있다.(하지만 그 만듦새라는 것은 정말 '간지'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역의 문제 때문이다.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로 날 실망시키더니,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에 이르러 몰입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려나'라는 단어를 나는 처음 들어보았는데, 그것은 무식한 나에게는 참으로 낯설고 낯선 단어라서 이 책을 온전히 다 읽은 다음에도 여전히 그 용례가 아리까리한 상태다. 사전을 찾아보면 '아무려나'는 '감탄사'로, 그 뜻은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승낙할 때 하는 말'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 단어의 존재를 알고 나서야 찾아본 용례는, 또 이 책에서의 용례는 감탄사라기보다는 접속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무려나(이 자리에 이렇게 쓰는 것이 맞을까?) '아무려나'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번역도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것은 원작이 가진 본연의 훌륭함 이외의 것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십 몇 년 전의 그날처럼 나는 내 방에서 누워서 <변신>을 읽으며, 어느 구절에서 흘렀는지 모를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굳이 민음사에서 나온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여기 실린 장편(掌編) 소설들을 추천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부에 있는 글들은 내게 마치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겪어야만 하는 장애물처럼 인식되었는데 거기다 번역마저 실망스러우니 한층 더 힘들었다. 하지만 읽기가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의 무식 때문에 여전히 정체 파악이 안되는 '아무려나'는 계속 나왔지만 처음 나오는 <변신>의 번역에 대한 실망이 컸던지 그 후로는 별로 번역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읽었다. 역자는 독문학을 하는 사람인데 번역에 있어서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실린 작품 선택에 있어서는 빛을 발한 것 같다.
책을 절반 이상 읽다보니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 카프카의 소설들에는 고유명사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부에 실린 <변신>이나 <판결>, <시골의사>, <학술원에의 보고>에는 그나마 사람들 이름이 나오지만 <굴>, <법 앞에서> 그리고 2부와 3부에 실린 짧은 소설에서는 고유명사를 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특징은 구체성을 흐리고 모호하게 함으로써 작품을 한편의 우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떤 환상성마저 부여하는 듯 느껴졌는데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책이 보르헤스의 <알렙>이라 그런지(물론 그래서일 것이다) 내게는 카프카의 환상성과 보르헤스의 그것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보르헤스가 카프카에게 영향을 받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카프카의 나이가 16살 정도 더 많지만 둘은 동시대를 살았다. 카프카와 보르헤스가 서로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2부와 3부에서(역자는 2부가 이 책의 중심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특별히 어떤 기준이 있어서 나눈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들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단 6줄밖에 되지 않는 분량, 그 운율성. 마치 한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승객>-스스로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으며(확신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동경과 놀라움.
<회랑 관람석에서>-'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라는 그의 부정에도 불구, 하나의 사실을 보는 두 가지 시선.
<가장(家長)의 근심>, <트기>-<가장의 근심>은 '오드라덱'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 대한, <트기>는 반은 고양이이고 반은 양인 동물에 대한 우화인데, 둘 다 장정일의 <생각>에 실린 '참(懺)'을 생각나게 했다. [책/eX libris] - 장정일, <생각> 중에서 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모호하다. 어쩌면 언어권이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콘도르 독수리>-자신을 쪼는 독수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결국 자신의 피로 익사시킨다는 결말. 강렬하다못해 …하다.
<공동체>-공동체의 배타적 속성에 대한 짧은 우화.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밀쳐내도 그는 다시 온다'는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프로메테우스>-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다른 해석. 이어서 나오는 두 개의 작품 <산초 판자에 관한 진실>, <사이렌의 침묵>과 더불어 보르헤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이유는 모른다) 작품이다.
<사이렌의 침묵>-오디세우스와 사이렌(세이렌이 좀 더 나은 번역이 나이었을까? 영어식 이름이라 약간 유감이다.)의 이야기. 세이렌은 사실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침묵을 했다는 가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시(市)의 문장(紋章)>-무의미함을 알아버렸으나 이미 멈출 수 없는 바벨탑 축조. 그들은 어떤 거인이 주먹으로 이 도시를 부수어주기를 기다린다.
<일상의 당혹>-엇갈림에 대한 이야기. 결코 일치될 수 없는 A와 B의 시간. '늘 있는 사건의 하나'라는 첫 문장처럼 환상적이지만 어딘지 익숙한 사건.
아아, 나도 이런 우화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