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브닝, 펭귄
김학찬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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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섹스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나의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_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남자는 펭귄의 지배를 받는 시기가 있다. 기간과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충 10대 초반부터 30대 초중반까지 될 것이다. 펭귄의 지배를 받을 때 남자들이 하는 짓과 생각들은 본인들이 말하기 전까지는 잘 알 수가 없는데, 아무리 볼꼴못볼꼴 다 보고, 할말못할말 다 한다는 부부 사이라도 그런 것은 말하기 어렵다. 특히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의 천태만상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변에 남중 남고 나온 사람이 있다면 한번 졸라서 들어보기 바란다. 술이라도 멕이고 유도하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듣기 힘들 것이다. (반대로, 남중 남고 나온 사람들은 어떤 유혹이 있어도 학창시절의 성적 모험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기를. 자기 이야기라면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이야기라도 동급 취급을 받을 테니.) <굿 이브닝, 펭귄>의 앞부분을 읽고 남중 남고를 나온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약한데? 약해. 내가 하나 알려줘야 하나?'

 

아무튼 펭귄의 지배를 받는 남자의 작태는 그나마 섹스코미디 영화를 통해 조금 살펴볼 수 있다. 그런 영화에서는 펭귄에게 지배 당하는 젊은 남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린다. 이 소설에도 그런 부분들이 조금 있는데, 이를테면, 너무 하고 싶어서, 한 번도 못 해볼까봐 울기도 한다.

 

일찍 하고 싶고, 지금 하고 싶고, 많이 하고 싶고, 다양하게 하고 싶지만, 한 번도 못 하고 죽진 않겠지?
슬슬 불안했다. 죽기 전까지 한 번도 못 해보는 사람도 있겠지. 살면서 모든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연애를 못 할지도 몰라. 마흔 살까지 여자 손 잡아본 적이 없다는 아저씨를 텔레비전에서 봤어. 연애를 못 하면 손도 못 잡아보겠지. 결혼정보 회사에 간다고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결혼식을 할 여자가 없겠네. 때가 되어봐야 시간만, 그저 시간만 지나갈 뿐일지도. 괜찮아, 악착같이 모든 경험을 일일이 다 해봐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는, 그래도 하겠지. 왜 눈물이 흐르지…… 눈에서 흐르는 땀이겠지. _139~140쪽

 

맞다.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펭귄은 또한 존 쿳시의 표현처럼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나의 살에 달라붙'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숙주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그렇게 강렬한 지배가 좋은 기억만을 남길 리 없다. "대체 생각이란 걸 하는지 의심스러운 남자"의 속사정은 그렇게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굿 이브닝, 펭귄>은 그 생채기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끝까지 다 읽고는 다시 생각했다. 작가가 그 천태만상을 몰랐을 리 없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물론 당연하게도) 다른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 생채기 같은 것.

 

<굿 이브닝, 펭귄>의 시대적 배경은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다. H. O. T., 삐삐, 죠다쉬, 마이마이, 디스켓, IMF 사태, 1999년 지구 종말론, 2002 월드컵, 아이러브스쿨 혹은 싸이월드... 이 소설에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어는 단연 ‘IMF’일 것이다. 중학생이던 화자에게 IMF는 그저 "새로 외워야 할 영어 단어" 정도였고, "나라가 망했다고들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망했는지 몰랐다." "달러가 없다고 난리였지만 실제로 달러를 본 적도 없는" 화자에게는 와 닿지 않았고 "IMF가 와도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었고 학교는 계속 가야 했고 때가 되면 배는 고팠다." IMF 때문에 이사 가는데 이사 가기 이틀 전에 짐 싸면서 이사 가는 줄 알았다는 남자 중학생은 얼마나 사실적인지. 지금이야 IMF 시절 이야기 나오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는 80년대생들의 당시 모습은 사실 대부분 이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때는 펭귄과 악수, 게임 등등만 있으면 좋았는데 살다보니 세상이 뭔가 펭귄 같고, 너무 펭귄 같아서 왜 그런가 따져보니 그 시작이 IMF였던 것이다. 아무튼 IMF 사태를 시작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나와 당신은 등록금과 취업 준비에 청춘을 저당 잡히고, 명예 없는  명예퇴직을 당한 아버지는 재취업과 실직을 반복하며,  어머니는 최저임금을 받는 마트 캐셔로 일한다. 그러니까, 가족이 이렇게 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입사원서를 낸 회사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묵혀둔 말을 했다.

"아빠, 저 합격했어요. 이제 일 그만하세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인사치레 를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제 회사에 다녀서 돈을 벌 테니, 그때 이미 취업과 실직을 반복하고 계시던 아빠, 낮밤 없는 일을 하시던 아빠는 일을 그만두어도 될 줄 알았다. 그때 전화로 웃으시던 게 종종 생각난다. 물론 그게 얼마나 철없는 말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굿 이브닝, 펭귄>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할 게요. 누나는 원하는 대학 보내주세요."

아빠는 취해서도 피식 웃었다. 얼마나 철없는 소리인지도 군대에 갔다 와서 알았다. 타지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처럼 무책임한 소리도 없었다. 아빠의 계산기에는 답이 나와 있었다. 사립대학 등록금, 서울에서의 생활비, 대학생이 노동해서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돈 같은 것들. 대학생이 되고 내가 무엇도 알아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났을 때는, 아빠의 웃음이 자꾸 생각났다. _147~148쪽

 

입시 경쟁을 지나 학자금 대출, 최저시급 아르바이트, 비정규직까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000년대 중반의 이야기에 2010년대 중후반인 지금의 사회상이 겹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 극복했다고 믿었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IMF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김학찬 작가의 문장에는 위트가 넘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좆같은 새끼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펭귄 같은 새끼라면 칭찬인가 싶겠지. _9쪽

 

 

가족들이 첫 생리를 시작한 딸을 축하하는 일은 텔레비전 광고에서라도 있지만, 첫 사정을 기뻐하는 모습은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생리는 성숙의 신호다. 그러나 사정은 이제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르는 놈이 되었다는 증거다. _12쪽

 

 

운동장에서 정신 없이 놀다 보니 국기게양대가 비어 있었다. 태극기도, 학교 교기도, 나머지 하나는 뭐더라. 게양대는 늘 셋이었는데. _19~20쪽

 

 

아빠는 그래도 네가 이 집의 기둥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빠도 나를 진짜 기둥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집은 기둥 없이 지붕만 붕 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식으로도 지붕이 무너지지 않았다. 기둥 없이도 사는 법을 배웠던 것일까. _84쪽

 

기타 등등. 문학평론가 이만영은 이 소설의 위트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작금의 소설들을 보면서, 위트와 품격은 종종 반비례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중략) 오늘 읽은 이 소설은,  (발기된 남성의 성기를 ‘펭귄’이라고 지칭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위트가 승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품격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품격이란, 이 고통의 시대를 감내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의 어둠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것. 다시 말해, 시대적 징후를 고통의 언어로 새겨 넣고자 하는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진지함과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기부전의 시대를 견뎌내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초상을, 발랄하면서도 육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_이만영(문학평론가)

 

나는 <굿 이브닝, 펭귄>을 읽으면서 이미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문장을 더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이야기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도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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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위한 우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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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산책을 권합니다

당신은 아마 '다들 휴대전화만 본다'는 한탄과 경고가 지겨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그런 태도가 바깥 세상을 외면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대도시를 방랑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걷는 이유는 구두 테스터이기 때문입니다. 수제화 공장에서 만든 구두를 신고 착화감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써주고 돈을 받지요. 그러나 이것이 그가 걷는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 같네요. 그는 걸으면서 세상을 관찰합니다. 어쩌면 그가 이 일을 7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꾸준하게, 심지어 점점 더 훌륭하게 해올 수 있었던’ 까닭은 걸으면서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남자는 청소부 내외와 그들의 아이, 빨래를 너는 노무자의 아내를 보며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런 경험은 당신도 있겠지요. 종종 그의 생각이 조금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유리가 떨어져서 산산조각 나버리면 좋겠다거나, 말하고 싶은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이 표시된 침묵시간표를 만들고 싶다거나, 떠나버린 여자친구의 방을 나뭇잎으로 채우고 싶다고 생각하지요. 이상하게도 이런 관찰과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위안을 줍니다.

 

그 까닭은 이 남자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 한 번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분열성 인격 장애와 정신병의 징후를 동반한 우울증적 불안 그리고 편집증적 피해망상.' 그런데 이런 증상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체계가 만들어내는 인간 소외의 증상들입니다. 독일에 사는 구두 테스터가 보는 세상은 현대 대도시에 사는 소외된 인간인 내가 보는 세상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나'는 떠들썩한 축제의 현장에서 평범한 주택의 4층 발코니에서 이불로 동굴을 만들고 노는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불신에 차 있으면서도 안도하는 듯한 눈빛으로’ 군중을 보는 그 아이를 통해 구원받습니다(사실, 개인적으로 발코니 장면보다 더 좋았던 부분은 그다음날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의 맨 뒤에서 세번째 문장이요). 저도 마주친 아이 덕분에 구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을 아내와 걷다가 마주 오는 그 아이에게 아내와 잡은 손을 위로 올려 터널을 만들어주었고, 아이는 그 아치를 통과하며 그것이 즐겁고 재밌다는 듯 꺄르르 웃었어요. 그 아이가 웃어준 덕분에 갖가지 이유로 참담하던 그 시절이, 그 거리가 추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어릴 때 어머니는 종종 곧 나갈 사람처럼 현관 옷걸이에 핸드백, 모자, 숄 그리고 양산을 준비해놓고 의자에 앉아 그것들을 보고만 있었다죠. 그것은 아마도 '세상이 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될 때 어머니가 느끼는 공포를 제어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고 다 큰 주인공은 생각합니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때가 많은 세상에서 두 발로 걸어다니며 세상을 본다는 건 어쩌면 하기 싫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산책과 이 책을 권합니다.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우리들에게 삶을 조금 더 견딜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먼 미래의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내 몸이 느끼는 소소한 것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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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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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외워보자 _최상희, 『델 문도』

하루는 담임이 얼굴이 벌겋게 돼서는 빈 책상을 의자 삼아 교탁에 엎드려 잤다. 수업이 끝날 때쯤 술이 깼는지 담임은 부스스 일어나더니 흐뭇한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우리들을 훑어보고는, 역시 힘내라는 건지 포기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어렸을 때는 말이야, 누구나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 같거든. 이? 그런데 선생님이 나이를 먹고 보니, 인생의 주인공들은 애초에 따로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
담임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걸까? 저게 꽃다운 청춘들에게 할 소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그날 술을 마시고 상념에 취해 우리들에게 ‘어른의 세계’ 의 어떤 일면을 보여준 것 같다.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내게는 저 순간이 이전까지의 세계와 작별한 순간 중의 하나다.

최상희의 소설집 『델 문도』 속 주인공들은 몰랐던 세계의 일면을 보게 되고, 지금까지의 세계를 떠난다. 헤세 식으로 말하자면 새가 알에서 나오듯 한 세계가 깨진다. 그 일면을 보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노 프라블럼」 「내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남기고 간 것들(「붕대를 한 남자」 「필름」), 낯선 사람과 함께한 시간(「페이퍼컷」 「missing」), 내면에서 차오르는 열정(「시튀스테쿰」) 등. 그로 인한 떠남 혹은 변화는 완성을 앞둔 조립식 장난감 총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거나 갓난아기 때부터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수도원을 탈출한다는 식의 행동으로 표현되어 미래를 향하기도 하고, 불확실한 기억 속을 헤매며 과거를 향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난생 처음 혼자 떠나게 된 여행에서 어떤 뚱뚱한 여자와 영국의 공항에서 필담을 하다가 잠들었다면, 똑같이 술만 먹는 아버지지만 이제는 멱살을 잡혀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면 ‘ 나’ 는 변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되어 지루하기도 하고 안온하기도 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모두 여행자들 ’일 수 있는 것은 그런 맥락일 것이다.

책을 덮자 다양한 풍미의 세계 요리를 맛본 것처럼 각 작품의 매력이 입에서 뒤섞였다. 되새김질까지 해보며 음미해보니 아무래도 인상적인 작품은 「내기」와 「missing」이다. 「내기」는 금기어가 무얼까 궁금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으면서도, 편한 분위기에서 오가는 아빠와 아들의 대화가 좋아서 슬픈 결말은 뒤로하고 이대로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던 작품이다. 가르쳐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푸념하는 아빠가 꼭 미래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더 인상적이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세 문단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삼연타였다. 「missing」을 다 읽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아름답다.”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소설 초반에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실종 아동 뉴스에 이어 화자가 여덟 살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갔던 경험이 나온다. ‘실종 사건 ’과 ‘ 낯선 사람 ’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예감, 지옥을 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조마조마한 느낌을 뒤로 하고 소설은 천국을 보여준다. 가슴을 쓸어내린 자리에 시리도록 아름답게 그린 천국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천국에 영원히 남고 싶다고 말하는 상상 속 아이와 소설 초반의 실종 아동을 오버랩시키는 마지막 문장, ‘아이들은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
묘한 기시감 때문에 인상적이었던 「기적 소리」도 있다. 소설을 읽으며 철길 옆에 사는 아이의 집을 두 눈으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지 소설 속 묘사가 생생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사진까지 찍어온 집이 아닌가 싶었다. 대문에 걸린 카메라. 소설을 다 읽고 내 컴퓨터의 2010년 12월 사진 폴더를 열었다. 군산 여행. 소설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곳은 틀림없이 군산 경암동 철길 마을일 것이다. 역시 사진이 있었다.

계절은 달랐지만 소설의 배경으로 짐작되는 군산 철길 마을을 여행하면서 다닥다닥 붙은 집들 위로 솟은 아파트를 나도 봤고, 푸른색 문도 아니고 동그란 손잡이에 달린 카메라도 아니었지만 소설에 나오는 중요한 집을 떠오르게 한 집 앞에 서 있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이 흉포한 세상을 견디며 여전히 여행해야만 하는 ’ 우리 속에는 모든 연령대의 우리가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늙으면 도로 애가 된다 ’, ‘ 할머니 속에도 소녀가 있다 ’는 말처럼 노인에게도 아이가 살고 있고, '애늙은이'라는 말도 있듯 아이들에게 조금씩 노인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 청소년’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이 그들 속에 살아 있고, 그 시절을 지난 사람들 속에서도 계속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에 나오는 다채로운 아이들을 만나며 내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이들 역시 이 책을 통해 세상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청소년기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아름다운 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등등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 몇 개가 처음 솟아나는 때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꼭 학교, 친구, 성(性), 가족 등 제한적인 소재로 이야기해야 할까? 최상희의 『델 문도』는 ‘ 청소년소설 ’ 하면 떠오르는 뻔한 소재들을 뛰어넘었다는 의미에서, 30대인 나 같은 독자도 끝까지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소년소설의 지평을 넓힌 작품이다. 내 속에 살고 있는 청소년은 이 책을 읽고 세상 어딘가에 누군가 있고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숨통이 좀 트였다고 했다. 그래서 주문처럼 외워보기로 한다. 델 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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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말고, 어쨌든 해결 1 사계절 만화가 열전 7
소복이 지음 / 사계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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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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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죽음 -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할 것인가
헨리 마시 지음, 김미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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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초연함과 연민 사이에서 그리고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외과 의사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것이다. _9쪽
짧은 서문에서 저자의 진심이 느껴졌고, 이어지는 1장을 절반쯤 읽자 저자의 필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자 소개를 다시 봐야 했다. 헨리 마시. 1950년생 신경외과 의사로, 2014년에 출간된 이 에세이 『참 괜찮은 죽음』이 데뷔작이다. 이 책으로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경외과 의사이자 섬세한 문필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고 한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는 이미 빠져들어 저자와 함께 울고 웃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디테일이 훌륭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그림 하나를 본 것 같았다. ‘삶과 죽음, 뇌외과에 대한 이야기’ 스물다섯 편이 담긴 커다란 그림을.

나는 사람의 뇌를 수술하는 사람이다. 이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뇌를 가르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_10쪽
여느 소설보다 인상적인 첫 문장, 그냥 덮을 수가 없었다. 계속 읽어야만 했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잘 읽힌다는 것이다. 전두엽, 송과체, 측두엽, 뇌간 같은 뇌의 부분별 이름은 물론이고 동맥류, 뇌실막세포종, 뇌하수체선종 같은 질병 이름, 스크럽, 석션, 카테터, 션트 등 병원에서만 쓰는 용어들이 난무하지만 페이지는 쉬지 않고 넘어간다. 빌 브라이슨의 추천평대로 정말 '엄청난 흡인력'이라 뇌과학자 김대식이 아니더라도 '밤을 새워가며' 읽을 만하다. 논픽션이지만 픽션의 재미를 갖추고 있기에 둘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 독자가 읽어도 마음을 움직이는 지점을 만날 수 있다. 임신 38주차에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여자 이야기, 수십 년 전 자신의 실수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어느 식물인간 요양원에서 다시 만나는 이야기에 움직이지 않을 마음이 있을까.

그들의 얼굴은 다 똑같았다. 죽음에 가까운 만인의 얼굴. _273쪽
저자는 의사의 위치에서만 말하지 않는다. 3개월 된 아들이 뇌 수술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가 암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저자 본인은 망막 이상과 골절탈구로 수술을 받았다. 이렇게 이 책에는 의사, 환자의 가족, 환자의 진솔한 처지가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의사의 자리에 서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 가족이 죽는다면’ ‘내가 죽는다면’ 하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환자로든 환자의 가족으로든, ‘죽음’과 가까이 있는 나는 어떤 얼굴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내 삶을 돌아보며 한마디는 남기고 싶다. 그 한마디가 고운 말이 되었으면 하기에,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275쪽)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라’는 이 뻔한 말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저자가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때로는 ‘실수’로 환자들을 죽음에 몰아넣기도 한 사람, 그러면서도 ‘환자들의 삶의 질’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위해 애쓰는 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술이 꼬였을 때 거짓말을 하기는 아주 쉽다. 수술이 어떻게 해서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담당 의사뿐이기에 그럴듯한 핑계를 꾸며내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_242쪽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런데 그 실수가 나나 내 가족의 뇌를 수술한 의사의 실수라면? 뇌수술에서 의사의 작은 실수는 정말 치명적이다. 환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상태에 빠지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환자의 가족은 분노하고 의사는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거나 줄여보려 애쓸 것이다. 다른 반응도 있을 수 있다는 건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위로하는 가족도 있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의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남은 것은 뇌수술의 다양한 사례나 묘사도,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통찰도 아니었다. ‘삶과 죽음, 뇌수술’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좋은 주제이고 또 흥미로웠지만 아직은 젊고 건강한 내게 너무 멀리 있어 잠시뿐이었다. 책을 덮고 다시 오늘을 살아야 하는 내게 곱씹어볼수록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실수와 시행착오에 대한 저자의 태도였다. 어떤 일에 종사하건 “세상에는 오류를 위장하고 비난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온갖 방법”이 존재하는데, 이 노 의사는 실수를 숨기거나 부인하지 않고 ‘책임’을 말한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 제목,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의 원제는,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 보통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일부라고 알려진 제목 ’Do No Harm(해를 주지 말지어다)'과 다루는 내용을 정확히 짚어주는 부제 ‘Stories of Life, Death and Brain Surgery(삶과 죽음, 뇌외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참 괜찮은 책이지만 ‘참 괜찮은 죽음’이라는 우리말 제목에 대해서는 말들이 좀 있는 것 같다. 낚였다, 뜬금없다, 저자의 메시지를 오독할 수 있다 등등.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장 제목을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경우인데, 출판사가 제목을 정할 때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기에 제목 자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독자를 낚는 게 어느 정도는 제목의 역할이고 책을 읽다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니까. 충분히 매력적인 제목이다.
내게 정작 옥의 티처럼 보이는 것은 부제다. 제목을 ‘참 괜찮은 죽음’으로 결정했다면 부제에서는 이 책만의 특징을 좀 더 드러내도 좋지 않았을까? 이 책은 무엇보다 오랜 세월 인간의 뇌를 수술해온 신경외과 의사의 고백록이다. 그런데 지금의 앞표지에서는 이미지와 띠지를 포함해서 어디서도 그런 특징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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