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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이브닝, 펭귄
김학찬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때때로 섹스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나의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_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아무튼 펭귄의 지배를 받는 남자의 작태는 그나마 섹스코미디 영화를 통해 조금 살펴볼 수 있다. 그런 영화에서는 펭귄에게 지배 당하는 젊은 남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린다. 이 소설에도 그런 부분들이 조금 있는데, 이를테면, 너무 하고 싶어서, 한 번도 못 해볼까봐 울기도 한다.
일찍 하고 싶고, 지금 하고 싶고, 많이 하고 싶고, 다양하게 하고 싶지만, 한 번도 못 하고 죽진 않겠지?
슬슬 불안했다. 죽기 전까지 한 번도 못 해보는 사람도 있겠지. 살면서 모든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연애를 못 할지도 몰라. 마흔 살까지 여자 손 잡아본 적이 없다는 아저씨를 텔레비전에서 봤어. 연애를 못 하면 손도 못 잡아보겠지. 결혼정보 회사에 간다고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결혼식을 할 여자가 없겠네. 때가 되어봐야 시간만, 그저 시간만 지나갈 뿐일지도. 괜찮아, 악착같이 모든 경험을 일일이 다 해봐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는, 그래도 하겠지. 왜 눈물이 흐르지…… 눈에서 흐르는 땀이겠지. _139~140쪽
맞다.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펭귄은 또한 존 쿳시의 표현처럼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나의 살에 달라붙'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숙주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그렇게 강렬한 지배가 좋은 기억만을 남길 리 없다. "대체 생각이란 걸 하는지 의심스러운 남자"의 속사정은 그렇게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굿 이브닝, 펭귄>은 그 생채기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끝까지 다 읽고는 다시 생각했다. 작가가 그 천태만상을 몰랐을 리 없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물론 당연하게도) 다른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 생채기 같은 것.
<굿 이브닝, 펭귄>의 시대적 배경은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다. H. O. T., 삐삐, 죠다쉬, 마이마이, 디스켓, IMF 사태, 1999년 지구 종말론, 2002 월드컵, 아이러브스쿨 혹은 싸이월드... 이 소설에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어는 단연 ‘IMF’일 것이다. 중학생이던 화자에게 IMF는 그저 "새로 외워야 할 영어 단어" 정도였고, "나라가 망했다고들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망했는지 몰랐다." "달러가 없다고 난리였지만 실제로 달러를 본 적도 없는" 화자에게는 와 닿지 않았고 "IMF가 와도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었고 학교는 계속 가야 했고 때가 되면 배는 고팠다." IMF 때문에 이사 가는데 이사 가기 이틀 전에 짐 싸면서 이사 가는 줄 알았다는 남자 중학생은 얼마나 사실적인지. 지금이야 IMF 시절 이야기 나오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는 80년대생들의 당시 모습은 사실 대부분 이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때는 펭귄과 악수, 게임 등등만 있으면 좋았는데 살다보니 세상이 뭔가 펭귄 같고, 너무 펭귄 같아서 왜 그런가 따져보니 그 시작이 IMF였던 것이다. 아무튼 IMF 사태를 시작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나와 당신은 등록금과 취업 준비에 청춘을 저당 잡히고, 명예 없는 명예퇴직을 당한 아버지는 재취업과 실직을 반복하며, 어머니는 최저임금을 받는 마트 캐셔로 일한다. 그러니까, 가족이 이렇게 된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입사원서를 낸 회사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묵혀둔 말을 했다.
"아빠, 저 합격했어요. 이제 일 그만하세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인사치레 를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제 회사에 다녀서 돈을 벌 테니, 그때 이미 취업과 실직을 반복하고 계시던 아빠, 낮밤 없는 일을 하시던 아빠는 일을 그만두어도 될 줄 알았다. 그때 전화로 웃으시던 게 종종 생각난다. 물론 그게 얼마나 철없는 말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굿 이브닝, 펭귄>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할 게요. 누나는 원하는 대학 보내주세요."
아빠는 취해서도 피식 웃었다. 얼마나 철없는 소리인지도 군대에 갔다 와서 알았다. 타지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처럼 무책임한 소리도 없었다. 아빠의 계산기에는 답이 나와 있었다. 사립대학 등록금, 서울에서의 생활비, 대학생이 노동해서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돈 같은 것들. 대학생이 되고 내가 무엇도 알아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났을 때는, 아빠의 웃음이 자꾸 생각났다. _147~148쪽
입시 경쟁을 지나 학자금 대출, 최저시급 아르바이트, 비정규직까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000년대 중반의 이야기에 2010년대 중후반인 지금의 사회상이 겹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 극복했다고 믿었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IMF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김학찬 작가의 문장에는 위트가 넘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좆같은 새끼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펭귄 같은 새끼라면 칭찬인가 싶겠지. _9쪽
가족들이 첫 생리를 시작한 딸을 축하하는 일은 텔레비전 광고에서라도 있지만, 첫 사정을 기뻐하는 모습은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생리는 성숙의 신호다. 그러나 사정은 이제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르는 놈이 되었다는 증거다. _12쪽
운동장에서 정신 없이 놀다 보니 국기게양대가 비어 있었다. 태극기도, 학교 교기도, 나머지 하나는 뭐더라. 게양대는 늘 셋이었는데. _19~20쪽
아빠는 그래도 네가 이 집의 기둥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빠도 나를 진짜 기둥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집은 기둥 없이 지붕만 붕 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식으로도 지붕이 무너지지 않았다. 기둥 없이도 사는 법을 배웠던 것일까. _84쪽
기타 등등. 문학평론가 이만영은 이 소설의 위트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작금의 소설들을 보면서, 위트와 품격은 종종 반비례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중략) 오늘 읽은 이 소설은, (발기된 남성의 성기를 ‘펭귄’이라고 지칭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위트가 승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품격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품격이란, 이 고통의 시대를 감내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의 어둠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것. 다시 말해, 시대적 징후를 고통의 언어로 새겨 넣고자 하는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진지함과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기부전의 시대를 견뎌내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초상을, 발랄하면서도 육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_이만영(문학평론가)
나는 <굿 이브닝, 펭귄>을 읽으면서 이미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문장을 더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이야기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도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