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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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는 원칙의 공정성과 절차의 공정성이 준수되는 사회이다. 사회 구성원이 합의하여 만든 게임의 규칙이 존재해야하고 그 룰을 통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공정한 혜택의 기회가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원칙의 공정성을 뒷받침해줄 투명한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사회는 공정한 사회일까? 불행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듯 하다. 개인의 노력 보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 'N포세대', '수저계급론' 등 늘어나는 신조어는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헬조선'과 함께 거론되는 '노오력'이라는 신조어도 있다. '노력''노오력'은 다르다. '노력'이 달성가능한 목표를 위해 개인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노오력'은 개인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목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를 달성할수 없는 사회구조 안에서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을 개인의 능력과 태도, 열정의 부족으로 돌리는것... 이것이 '노오력'의 실체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회는 공정함 보다는 인종과 국가, 성별, 문화 등에서 기인한 수많은 차별로 얼룩져 있다. 각자가 처한개별적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과 그것이 누적되어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구조에 좌우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맞서소수자로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세상을 향해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 과정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에서 저자 김지윤은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 약자와 소수자, 비주류들에 관한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른바 방 안의 코끼리 (Elephant in the room)’ 문제다.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나 문제라는 걸인식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언급하지 못하는 무겁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 ‘코끼리사회라는 안에 자리잡고 있는 그동안 해결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 온 남겨진 숙제를 의미한다. 강제 물리력 행사와 수많은 유인책 등에도 방안에 들어앉아 꿈쩍하지 않는 코끼리를 보며 사회의 주류들은 이를 애써 외면한채 코끼리의 행동반경에서 벗어나 살아가지만 비주류들은 사회의 최일선에서 코끼리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과 불편들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살아간다. 책에서 사회 비주류로 언급되는 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경제적 빈곤층 등이다. 사회로부터 외면 받고 소외받는 이들은 다양한 시각과 기준으로 분류되었지만 소수자적 위치, 마이너리티라는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이를 인지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다음과 같다.

 

이 사회는 성공에 핀 조명을 맞추고 이를 몇 백배 빛나는 스토리로 만든다. 왜 그러냐고? 알파걸의 성공은 화려한 승전으로 남지만, 취약 계층 여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은 여봐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눈부신 기록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P. 51)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통계 숫자 보다 더 중요한건 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마트 창고에서 눈물 흘리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P. 53)

 

저자는 여성운동이 폭넓은 공감대와 당위성을 갖는 것은 사회에서 여성이 가진 소수자적 위치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은 물리적 숫자로 보면 당연히 소수가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다. 따라서, 여성이 존중받고 차별받지 않는 공동체를 꿈꾸면서 다른 소수자 집단을 차별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운동이 아니라 기득권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권리확장의 문제보다 시급한 것은 기본적 인권 보장과 확보라고 주장한다. , 더 많은 여성이 기득권 집단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과 관련된 차별로 인해 고통 받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여성운동은 몇몇 알파걸들의 유리 천장 깨기가 아니라 수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함께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생각한다. 유리 천장을 부수고 올라간 찬란하게 빛 나는 소수를 위해서 아직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에의 <개인적 체험>에서 버드는 말한다.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그렇지 않다. 장애인의 문제는 개인적인 체험이 아닌 사회적인 체험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P. 102)

 

장애인을 둘러싼 차별을 바라보는 시각도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장선상에 있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 만큼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점철된 것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은 장애로 모든 것이 규정되어버리는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은 장애 앞에서 빛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한 개인이 가진 수많은 장점과 특성은 장애라는 한 특성에 모조리 뒤덮여 버리고 만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일상이 무너지고 삶이 일그러지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부정할 수 없는, 부정하기 힘든 현실로 인해 장애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외면받게 된다. 저자는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 그 누구도 고립되고 소외받지 않게 하는 기본적인 책임이 있으며 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만이 장애가 개인적 체험이 아닌 사회적 체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빈곤층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동일하다. 저자는 비만의 문제를 경제적 계급의 문제로서 분석한다. 비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음식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 가정환경에서부터 사회구조 및 경제 계급의 차별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다는 의미에서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살수록 아동 청소년 비만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의주장을 보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변화한 시골 풍경이 아니라 비만의 사회 구조화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할수 밖에 없었다. 경제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해 비만이 생겨나고, 비만으로 인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다리가 사라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든 여러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거운 정체성이 자신이 사회적 강자인지 아니면 약자인지를 결정하게 한다.” (P. 126)

결국,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정체성 중 어느 정체성이 자신을 가장 잘 규정한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는 주류도 될 수 있고, 비주류도 될 수 있다.” (P. 8)

 

당신은 주류인가? 비주류인가?” 이는 저자의 중요한 문제제기이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회 정치적 환경과 이슈들은우리를 이 같은 질문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강자일지라도 성정체성이나 신체적 특성 등 우리를 대변하는 다른 정체성에 관한 문제제기에서는 소수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을 갖고 있다. 저자가 결국 정답은 사회 구조의 변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어떤 시민 운동이든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외연 확장과 외부로부터의 지원이다. 저자가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권 보장과 확보를 주장했듯이 방안에 있는 코끼리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차별로 괴로워하는 서로 다른 소수자 집단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중대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결국에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적들의 말이 아닌 친구의 침묵이 될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처럼 말이다.

 

헤겔은 인류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뿐이라고 일갈한바 있다.” (P. 251)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은 하나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삶의 사소한 부분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 없이 삶 그 자체가 빛나는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 불러일으킨 새로운 바람들이 당신은 조용히 세상을 흔들 수 있다.”는 간디의 말을 증명해낼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조류를 거슬러서 배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이러한 바람들이 존재하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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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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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가 밝힌 창비세계문학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독자들이 창비의 세계문학을 통해 다른 시공간에서 우리와 닮은 삶을만나고, 가보지 못한 길을 걸으며, 그 길 끝에서 새로운 길을 찾길 바라는 것이다. 또한 무한경쟁에 내몰린 젊은이와 청소년들이 문학을 통해 삶의 소중함과 기쁨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획의도를 감안하면 창비가 세계문학 시리즈의 첫 시작을 여는 책으로 왜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괴테의 초기 명작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지만 사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반복되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독일어 발음과 동떨어진 베르테르라는 잘못된 표기가 계속해서 통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불멸의 고전으로서 앞으로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것이 분명한 이 작품을 위해 창비는 새롭게 해석한 번역판을 내놓으며 관습에서 탈피하여 독일어 원어의 발음에 가까운 베르터로 바로잡았다.

 

한국에서는 주인공 이름의 표기를 둘러싸고 약간의 혼동이 존재하긴 하지만 모든 청년들은 베르터처럼 사랑하기를 원했고, 모든 처녀들은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원했다.”는 저자 괴테의 말처럼 소설이 탄생한지 2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소설의 주인공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 사랑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서, 또 사회모순을 직시하는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청년들의 영원한 상징으로서 남아 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괴테가 25세의 나이에 쓴 첫 소설로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소설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한남자의 순수성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데서 오는 절망과 상실감,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에서 오는 모멸감을 감수하는 모습들은 베르터를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며, 독자들이 베르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베르터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란색 조끼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있다. 괴테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정치가였지만 빛과 색채를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저술한 <색채론>에서 색의 근원을 노랑과 파랑 두가지로규정하고 있다. 노랑은 가장 빛에 가까운 색이고 파랑은 가장 어두운 색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색의 조화는 빛과 그림자, 힘과 나약함, 포용과 분리를 상징하며 두 가지 색의 공존 자체가 역동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근원이라는 의미에서다.

 

삶의 아포리즘을 내포한 여타의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살아가면서 이러한 괴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들을 많이 맞이했던 것 같다. 베르터의 열정적 사랑이 금빛 물결이 되어 흘러가다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여 저 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삶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이러한 삶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일까? 나는 베르터의 고백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랑, 이러한 충직함, 이러한 정열은 결코 문학으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우리가 교양이 없고 거칠다고 일컫는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살아 있다. 그 반면 교양이 있다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구일 뿐이다!” (p. 134)

 

베르터는 "내가 아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으니, 유일하게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뿐"이라 말한다. 로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의 열정과 진심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베르테르의 순수함과 진정성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유념해야할 진리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청춘의 고전으로서 빛을 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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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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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행동주의 페미니즘, 그 첫 걸음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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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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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세상에 태어난 딸에 대한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경영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남성육아휴직을 일정기간 의무화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경영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 약속,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걸 일상에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이는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화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Feminism is for Everybody)>에서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의 주체에 대해 주목할 뿐 그것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즉 페미니스트가 반대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다.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남성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또 여성도 때론 성차별주의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성차별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정의하며 페미니즘을 한단계 진화시켰다고 생각한다.

<99%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궁금했던 것은 “99%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의 의미였다.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는 관점에 따라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보편화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것이고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분명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구체적이지 않은 진리는 인간을 모호한 주관적 확신으로 이끌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어야 한다.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휴머니스트입니다. 균형을 추구하죠.’라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연기하고 영화판 밖에서도 성차별 문제를 끊임 없이 제기하고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한 펀딩을 진행하는 등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비단 메릴 스트립 뿐만이 아니다. 레이디 가가와 켈리 클락슨도 같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99% 페미니즘“의 지향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이 페미니즘은 전통적으로 규정된 대로 스스로를 ‘여성의 쟁점women’s issues’에 한정 짓지 않는다. 혹사되고, 지배당하며, 억압받는 모두를 위해 서 있는 인류 전체의 희망이 되기를 목표한다. 우리는 이를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이라 부른다.“ (p. 57)

“99% 페미니즘“은 젠더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생태 등 인류 사이에서 상호교차되며 착취와 억압과 갈등을 유발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99% 페미니즘“은 분리된 운동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협력적인 연대적 움직임이며, 벨 훅스가 제시한 페미니즘 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류 보편적인 고민과 고질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적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이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만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기 때문에 이슈 자체가 대중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마이너한 이슈로만 남아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싸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젠더이슈를 살펴보면,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 받으며 세계를 조망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끊임 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아버지의 어깨 위로 올라가 세상을 조망하지 못한다. 남성 중심의 역사와 세계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혜택을 받아온 남성들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젠더이슈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이슈 해결에 동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99% 페미니즘“은 특정 이슈 해결에 집중하기 보다 상호교차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인류 보편적인 이슈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을 모아 연대하자는 외침인 것이다.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99% 페미니즘“의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할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또한 추구하는 방식이 너무나 급진적이라는 측면에서다. “99% 페미니즘“은 폭력은 모든 국가, 계층, 인종, 민족 집단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통틀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조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 모든 급진적 움직임이 공동의 반자본주의 혁명에 함께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페미니즘은 지배와 복종, 강압, 억압과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고 대등한 입장에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다. 더군다나 “99%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광점위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온건하고 점진적인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페미니즘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충분히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은 페미니즘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종식시키고 그것이 가진 비전을 제대로 알리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리 천장을 부수고, 그래서 대다수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게끔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전망 좋은 사무실을 차지한 여성 CEO 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니라 CEO와 전망 좋은 사무실이란 것을 없애 버리길 원한다."(p. 48)

물론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삶의 사소한 부분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불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 없이 삶 그 자체가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을 펴낸 ‘움직씨’라는 다소 생경한 출판사명은 ‘동사’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출판사명에 말글만 앞선 진보, ‘위선’을 경계하며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맞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출판사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99% 페미니즘“을 읽으며 출판사의 모토와 여러 면에서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행동주의 페미니즘 그 첫걸음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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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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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는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주의 극단에 위치해 있다국내 택배시장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업체간 치열한 경쟁으로 택배 단가는 지속적으로 하락중이다이러한 무한경쟁 속에서 회사는 비용절감을 위해택배기사를 비정규직 개인사업자로 고용하고 택배기사들은 줄어가는 본인 몫의 수익을 지키기 위해 비정상적인 근무시간을 소화해내고 있다. 9 to 6 (8시간 근무)라는 정상적인 근무시간의 두배에 달하는 6 to 10 (16시간 근무)를 선택한 건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택배기사 본인들의 선택이다하지만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도록 건당수수료가 설정되고 이것이 시스템화되어 버린 현실에서 과연 그것이 그들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쩐지 인생 같네요.” 청림이의 말에 담배를 비벼 끄며 내가 말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인생은 없지 않을까?” (P. 152)

 

<침입자들>의 화자는 현재 택배일을 하고 있지만이름도 과거의 행적도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인물이다다만 그의 예사롭지 않은 칼솜씨와 인내심주위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사랑하는 딸을 잃은 상처 등에서 그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사람들은 그런 그를 그가 택배 배달을 맡고 있는 동네이름인 행운동으로 부른다. ‘행운동’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택배기사들은 비정상적인 수익구조에 대항하여 여가 시간가정을 돌볼 시간심지어는 자신의 허리까지 희생하며 살아간다그렇게 부모 초상이 나도팔다리가 부러져도 그날 택배는 그날 배송하는 노력과 희생의 대가는 근사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현실을 근근이 버티며 삶을 이어나가게 해줄 뿐이다.

 

페테 회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반에서 뚱뚱한 남자애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P. 61)

 

하지만 현실의 삶에 지친 이들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행운동은 택배 일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상처를 받은 마크스’, 우울증 환자 춘자’, 동네를 누비는 바보 마이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강의를 늘어놓는 경제학 교수를 만난다이들이 현재 살고 있는 표면적인 삶의 단면들은 정상인의 시각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하지만 이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더듬어가며 이들이 어떤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되는 순간 이들의 현재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를 위로하게 된다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택배기사저마다의 상처를 안고서 예상치 못하게 조금씩 어긋나고 비뚤어지는 현실의 삶을 바로잡으며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동일한 입장에 있는 것이니까또한 소설의 화자인 행운동의 말처럼 정말로 간단해 보이는 삶도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인생은 없는 법이니까.

 

소설 속 행운동처럼 나도 영화 하나를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한다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는 안톤 시거는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살인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살인 여부를 결정한다이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을 상징하는 것이다동시에 '전부를 걸어야만 전부를 얻을 수 있다.'는 안톤 시거의 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 번씩 주어진 삶에 임하는 진지한 탐구 자세와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다른 시험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 채 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다가 실패하게 된다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되고 스스로 계발한 재능을 토대로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각자의 답안을 작성하면 되는 것일 뿐이다내가 그랬듯이 다른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현실의 삶을 견디는데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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