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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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성좌와 같다.”

 

성좌 (星座) ,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고대에 별자리가 발견된 이래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별자리의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의 이면에는 이런 사실이 숨겨져 있다.

 

<방랑자들>을 읽으며 개별적인 화자들이 수놓은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별들이 모여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서 또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이 세계를 유랑하는 방랑자들이 아닐까

 


 

저자는 진정한 삶은 움직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멈추고 정지한 자는 관계성이 배제된 채 화석이 되고 박제가 되어 심장에 바늘이 박혀 한자리에 고정된다. 소설 속에서 여행심리학자는 인간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자의 궤변과 저마다의 사건이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를 만드는 것 즉, 일관된 인간관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여행 심리학자의 입을 빌린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아포리즘이다.

 

박물관 입장권 뒤편에 낯선 단어가 적혀 있다. 종잇조각을 눈에 가까이 가져가 더듬더듬 읽어 본다. 아마도 KAIROS일 것이다.“ 74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가 아닌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지배를 받는 존재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저자가 마치 작은 천을 이어 붙여 조각보를 만드는 듯한 패치워크방식으로 소설을 집필하고, 다양한 시공간에 놓인 인간군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직선적 사건이 아닌, 별자리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원심형의 배열에 가깝다는 작가의 철학 때문일 것이다.

 

“100퍼센트의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269

 

날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지만 과거의 기억과 삶의 관성을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퇴보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 더 가깝지 않을까? 과거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고동치는 두 번째 심장으로서 현재를 구속하는 동시에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는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혹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서로를 끝없이 갈구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결국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 어떤 비밀을 찾아다니며 먼지를 일으키는 것 44이라는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서서히 인생의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다. 매초 무()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저마다 발산하는 빛의 조화로 장엄한 별자리를 만들어내며 의미 없는 존재란 없음을 증명해내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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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2-01 0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삶은 움직임에서 구현되고 정지한 자는 관계성이 배재된채 화석이 되고‘ 구절이 눈에 들어와요. 좋은 리뷰 감사해요.

잭와일드 2019-12-01 08:32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12-01 0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이라는 움직임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여기 이불 속에 콕 누워있는 시간에도 제 삶은 어딘가로 다가가고 또 멀어지고 흔들리고 있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밀린 좋아요 투척도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되요. ㅎㅎㅎ

잭와일드 2019-12-01 08:33   좋아요 1 | URL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명확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