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럽 사상사에서 하이데거가 갖는 독특한 위상의 개요를 주는 글이라고
슬로터다이크 자신이 소개하는 에세이가 Not Saved: Essays After Heidegger, 이 책에 실려 있다.
오 그래요? 이걸로 하이데거 입문을 하면 되겠군요. 다른 누구보다 당신의 글이 가장 잘 입문시켜 줄 거 같습니다.
(....)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하이데거 논의하기 전까지는 극상의 즐거움을 (존재의 색조, 음조가 변화하는) 주다가 본격적 하이데거 논의가 시작하면 한 줄의 진도를 나가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뼈를 깎을 수 없으니 한 줄의 진도도 나갈 수 없는..)
하튼 그런 글이다.
본격적으로 하이데거 논의하기 전 극상의 즐거움을 주는 몇 페이지는
아렌트의 묘지와 하이데거의 묘지를 비교하는 내용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고향 독일 시골마을, 성당 묘지에 묻혔다.
아렌트는 그의 남편이 재직했던 뉴욕주 바드 칼리지의 대학 묘지에 남편과 함께 묻혔다. 슬로터다이크는 자신이 바드 칼리지에 방문했다가 거의 우연히 아렌트의 묘지를 발견했다고 쓰고 나서
대학이 그 대학에 재직했던 이들을 위한 묘지를 따로 갖고 있다는 것의 의미, 이런 것을 성찰하기 시작한다.
Bard College 구글 이미지 검색하면
작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 캠퍼스로 바로 상상할 법한 이미지들 찾아진다. 찾아보면서
저 공간, 건물과 나무들 사이에서 부는 초록의 시원한 바람, 이런 것이 바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세속 세계를 밀어내는 에너지 때문에, 고요가 말을 하는 곳, 귀가 멍멍해지는 곳일 것이다... 느낌.
캠퍼스란 "이론을 통한, 세계의, 도시로의 유입" : 이런 말을 한다. 이 구절에서 두 개의 콤마는
번역불가라 느껴지는 구절을 어떻게든 번역해 보려다가 선택한 궁여지책. 슬로터다이크가 쓴 구절은
the irruption of the world that has been extended by theory into cities, 이렇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이 쓰는 세련된 문장들이라 그의 문장들 속에서는 이 좀 이상한 구절도 이상하게 깊이 매혹적이고 바로 말이 된다. 바드 칼리지는 뉴욕의 시골에 있는데, 대학의 캠퍼스란 "이론을 통한, 세계의, 도시로의 유입"이기 때문에, 바드 칼리지가 소재한 그 시골 마을은 코스모폴리탄 도시가 된다고 슬로터다이크는 말한다. 이 세계도시에서, 교수들은 최초의 인간으로 걸어 나온다.
아렌트가 살았던 망명자의 삶에서
이렇게 구유럽의 전통이 (도시, 세계시민성, 보편성) 지속되었고 그에 반해 유럽을 떠나지 않은 하이데거는
그 모두와 절연하겠다는 의지를 자기 묘지의 선택으로도 보여주었다.... 고 슬러터다이크는 말함.
이런 논의를 하는 세 페이지 남짓은 슬로터다이크가 어떻게 자기 독자들을 매혹하는 저자인지
선명히 보여준다고 할만한 페이지들이다. 뉴욕 시골의 바드 칼리지에서 구유럽의 어떤 (잘 모르면서도 상상하는) 거리, 어떤 정신적 풍경, 어떤 열기까지 다 바로 체험하는 듯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짧은 여행의 기록을 써도 됨. 그러나 하이데거 논의가 시작하면, 아이게 뭡니까. 나중에 뵙겠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엔 "존재와 공간"이라는 주제가 매몰되어 있다는게 그의 입장이고
Spheres 3부작에서 매몰된 그 주제를 되살리는 시도를 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Spheres 3부작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아 정말 이 분은 "공간"의 사상가다 실감할 수 있다. 그를 읽으면서 서서히 모든 것이 공간의 문제로 보이게도 되는데, 무엇보다 인식/지식의 모델을 "공간화"하기가 한국에서는 절실한 일이 아닌가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