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작가가 쓴 책들의 문체는 이상하게 간질거리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자연일기]에서는 그런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원 저자의 문체 덕분인지 번역자의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2. 두 권 다 좋았다.

재미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하다.

쉽게 비판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3. [동쪽 빙하의 부엉이]에서 사람이 둥지 가까이로 접근하자 알을 품고 있던 어미새가 사람을 피해 둥지를 떠난다. 저자는 다른 동물들이 둥지의 알을 먹을까봐 걱정이 돼서 떠나지를 못하고 자기 딴에는 눈에 안 띄게 숨어 있는데, 어미 부엉이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둥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저자는 한참 그러고 있다가 자신의 존재 때문에 어미가 둥지로 못 돌아가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를 떠난다.

[자연일기]에서는 마음 착한(?) 사람이 어미 오리가 없는 새끼 오리들이 여우에게 잡아 먹힐까 봐 그 옆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고, 어미가 안 나타나자 그 새끼 오리들을 구출, 아니 유괴해온다.


4. 자연일기에서의 사진을 보며, 교학사였나? 생명과학I 교과서에서의 사진이 떠올랐다.

목차 페이지에 있었던 사진이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아기 새들을 나뭇가지에 접착제로 붙여서 찍었다는 의심을 받은 작가의 사진 같았다.

교과서와 관련된 사이트 게시판에 들어가 사진을 교체해달라고 글을 썼는데, 

그 후 사진이 교체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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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책을 읽으며 행복했는데,

제대로 된 감상을 쓰려면 언제나처럼 미루고 미루다 안 쓸 것 같아, 

지금 눈에 띄는 귀여운 문장 3개만 남긴다.


310-311쪽.

(대만에서 선물로 노트를 사려고 구경에 심취한 저자에게 같이 간 동행이 섭섭해하면서 싸운 이야기.)

"그딴 노트 사다 줘도 아무도 안 좋아해!"

"무슨 소리야? 한국 출판계는 노트 선물로 돌아간다!"

(중략)

물론 대만에서 산 노트 선물은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장장마다 시와 소설이 적혔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371쪽

수돗물의 경도가 세서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카락이 해그리드처럼 거칠게 부풀어 올라 해리 포터 스튜디오에 적합해졌다.


379쪽

(찰리와 초콜릿 공장 뮤지컬을 보러 가서 초콜릿 바를 산 후)

문제는 초콜릿 바의 가격이었는데, 평범한 초콜릿 바가 7천원 정도 하다 보니 W에게 아무리 먹자고 꼬셔도 "한국 돌아가서 가족들과 나눠 먹겠다"고 가난하고 애틋한 찰리처럼 거절했다. 그래서 모두가 초콜릿을 먹을 때 우리만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런 방식으로 작품과 연결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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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바레스와 캐럴라인 냅의 책을 동시에 읽다.


벤 바레스 자서전의 절반은 자신의 실험실에 했던 연구들에 대한 요약이다.

온갖 생소한 전문 용어들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겨버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차근차근 읽었던 이유는,

그 연구 사실 나열이 절박하게 느껴진 탓인가 싶다.

나도 죽기 전에 내가 했던 일들을 이렇게 정리해낼 수 있을까.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해낸 것도 아니니, 나는 쓸 것도 없겠구나.

존재에 대한 혼란과 자살 욕구를 견디고 살아남아,

자신의 일도 성공해내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던 삶이라니.

내 삶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가치있었으면 좋겠다. 


캐럴라인 냅의 책은 리뷰만으로도 깜짝 놀랐다.

나처럼 불안하고 힘들게 산 사람들이 많았던 거였어? 하고.

그래, 

불안하고 흔들리면서 내 밖에서 구원을 찾았던 그 20대에 읽었으면

나 자신을 좀 더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번역자가 말한 것처럼, 

저자가 좀 더 나이들 때까지 살아남아서 중년과 노년의 삶에 대한 글을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과 미래의 나와 화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하는 아쉬움에, 어찌할 줄 모르겠다.

냅의 책이 위로나 치유를 위한 책이거나 자기계발서도 아니지만,

그 글이 이렇게 흔들리는 삶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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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동물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다.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경과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철학과 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산비탈에 파놓은 굴속으로, 강바닥의 바위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 몸무게가 없는 듯한 느낌, 바람의 형태, 지루함, 콧속으로 들어오는 부엽토, 죽어가는 것들의 떨림과 단말마를 알아야 한다.

기존의 생태문학은 인간이 거만하게 자연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자신의 눈높이에서 관찰한 것을 서술한 글이었다. 혹은 동물이 옷을 입고 사람처럼 구는 이야기들이었다. 내 책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웨일스Wales의 오소리, 런던의 여우, 엑스무어Exmoor의 수달, 옥스퍼드Oxford의 칼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서부의 사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또한 시각보다는 주로 후각과 청각으로 주변 세계를 인식하며 돌아다니고, 하늘에서 쏜살같이 날아내리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숲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곳에 사는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숲이 뿜어내는 빛, , 냄새, 소리 등에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묘사하는 숲을 다른 생물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생물은 각자의 뇌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저마다의 세계 속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세계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그 세계들을 탐사하는 것은 아주 흥미진진한 도전이며, 이를 글로 풀어내는 일도 만만하지 않다.

신경과학은 지금껏 상당한 진보를 이뤄냈다. 우리는 오소리가 숲을 헤치며 돌아다닐 때 오소리의 코와 뇌의 후각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혹은 유사한 종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통해 논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글로 표현하는 모험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오소리가 달팽이 냄새를 맡을 때 MRI장비에 표시된 뇌의 어떤 영역에 불이 들어오는지 연구하는 것과, 숲이 오소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묘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기존의 생태문학은 인간중심주의와 의인화라는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기 십상이었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 세계를 인간에게 보이는 대로 서술한다. 책은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니 이는 어쩌면 뛰어난 상업적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좀 진부하기도 하다. 의인화는 동물이 인간과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동물에게 진짜로 옷을 입히거나(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은유적인 옷(헨리 윌리엄슨Henry Williamson)을 입힌다. 그리고 동물에게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을 부여한다.

나는 이 두 가지 잘못을 피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나는 오소리, 여우, 수달, 사슴, 칼새가 인지하는 풍경을 묘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활용했다. 첫째, 생리학 서적을 탐독해 얻은 이 동물들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했다. 둘째, 나는 이 동물들의 세계에 깊숙이 나 자신을 몰입시켰다. 오소리가 되고자 할 때는 땅에 굴을 파고 살면서 지렁이를 먹었다. 수달이 되고자 할 때는 내 이로 물고기를 잡으려 시도했다.

생리학에 대해 말할 때의 난점은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지렁이를 먹는 게 어떠한지를 쓸 때는 별난 괴짜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동물의 감각 수용기는 여느 인간 화가가 대지를 포착해 표현한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채를 동물들에게 선사한다. 땅과 언제나 가까이 지내는 동물들은 신석기시대부터 대를 이어 땅을 갈아온 농부들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 세계를 다채로운 색으로 포착한다.

이 책은 고대의 4원소설에 따라 흙, , , 공기와 각각의 원소를 대표하는 동물로 구성되어 있다. 땅에 굴을 파는 오소리와 대지를 달리는 사슴은 흙을 대표하고, 휘황찬란한 도시의 여우는 불을 상징하며, 수달은 물을 나타낸다. 밤에도 상승 온난 기류를 타고 나선형을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가 잠을 자고, 땅에 거의 내려오지 않는 칼새는 공기다. 이 넷을 적절하게 석는다면 연금술처럼 어떤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1장에서는 내 접근 방식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부 문제들의 경우 먼저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1장을 건너뛰고 바로 2장의 오소리굴로 직행해도 된다.

2장에서는 오소리를 다루었다. 내가 여러 계절에 걸쳐 수 주 동안 지냈던 웨일스의 블랙산맥 Black Mountains이 배경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웨일스의 몇몇 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서 약 여섯 주를 땅속에서 생활했다. 이 장은 다른 장과 마찬가지로 여러 시기를 이어 붙인 콜라주다. 굴에서 보낸 몇 주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아우르고 있다.

이 장은 꽤 길다. 여러 주제를 소개하면서 다음 장들과도 관련 있는 과학적 개념을 함께 다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각 정보가 아니라 후각 정보로 구성된 풍경의 개념을 소개한다.

3장은 수달이 주인공이다. 수달은 넓은 지역을 돌아다닌다. 수달은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포유류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지역에서 활동한다. 수달은 지세의 기복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이동하는데, 그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지표면이 얼마나 주름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수달은 세계 그 자체, 만물이 다 녹아 희석된 용액에 몸을 담근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또한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수달의 조상과 인류의 조상은 모두 물에서 뭍으로 나왔지만 수달은 다시 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완전히 돌아가지는 않았다. 여전히 수달은 물고기보다 인간인 나와 더 가까운 생물이다.

이 장은 내가 한 해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 잉글랜드 서남부의 엑스무어를 배경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스트린강 East Lyn River과 배지워시강 Badgworthy Water, 고원에서 두 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시내들,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Devon 북부의 바닷가가 무대다.

3장에서는 여우의 코와 귀와 눈을 통해 도시에 사는 인간을 살펴본다. 이 장은 내가 수년간 살았던 런던의 이스트엔드 East End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나는 밤마다 여우 가족을 찾아 거리를 배회했다.

5장에서는 다시 엑스무어로 돌아온다. 엑스무어와 스코틀랜드 북서부 산악지대로 향해 사슴 무리 사이로 들어간다. 우리는 차 안에서 사슴을 보고는, 땅을 파고 기어 다니는 동물보다는 사슴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신화는 이런 오만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부정한다. 뿔 달린 신들은 다리를 높이 올리며 위풍당당하게 우리의 잠재의식을 활보한다. 그들은 크고 눈에 잘 띄지만 여전히 신이고, 우리와 눈을 마주치면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살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사슴 사냥에 열중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 장 또한 일종의 사냥인 셈이지만,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슴의 심장을 겨누는 사냥은 아니다. 사슴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다.

6장은 칼새에 관한 장으로, 영국 옥스퍼드와 서아프리카 사이의 하늘이 배경이다. 칼새는 다른 어떤 동물과도 다르다. 그들은 하늘의 주민이다. 칼새는 중력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처럼 보인다. 칼새는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옥스퍼드에 있는 우리 집 서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둥지를 짓고 있는 암수 한 쌍이 내 머리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공중을 재빨리 스치고 날아간다. 여름이면 우리 동네 거리에 나타난 요란하게 지저귀고, 정확히 내 눈높이에서 날기도 한다. 나는 칼새를 따라 유럽을 가로질러 서아프리카까지 갔다.

6장은 일련의 사실들오 시작하는데, 그중 다수가 논쟁의 여지가 있고 편향적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물론 나는 그 사실들 중 상당수의 근거가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인내심있게 지켜봐 주시기 바란다.

칼새를 주제로 삼은 글쓰기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이 장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을 취한 것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을 그나마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맺음말에서는 다섯 세계를 지나온 내 여행을 돌아보았다. 헛수고에 불과한 여정이었을까? 내 머릿속을 벗어난 뭔가를 쓰긴 했던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이 거의, 혹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책을 쓰고 싶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 책에는 내가 야생으로 돌아간 이야기, 예전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내게 잠재된 야생성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그 야생성의 상실에 대한 한탄이 담기고 말았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510, 옥스퍼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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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간 휴직을 하다 작년에 다시 복직했다. 중간에 6개월 정도 나가긴 했지만 거의 7년이었다. 그 동안 학교는 변하기도 했고 변하지 않기도 했다. 목소리 높여서 싸워야 간신히 얻어낼 수 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사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나도 익숙해져버렸다. 현재 우리 학교만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모습들은 거저 얻어지지 않았다. 관리자들에게 욕먹어가며 동료교사들의 불편한 눈길을 견뎌가면서 싸워서 만들어낸 것이다.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이 정도면 적당하지 하면서 안주하게 된다. 나는 보수화된 것 같다.

 

편하게 학교 생활을 하려는 내게 이계삼 선생님의 글은 불편했다. 나는 이제 적당히 교사 생활하는 법을 알아버렸다좌절하는 일이 두려워 희망을 가지고 싶지 않다. 학교 안에서 여전히 투쟁하던 이계삼 선생님은, 끝내 학교 밖으로 나왔다. 학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크게 공부한 것도 없고 활동한 적도 없는, 그저 그런 교사인데. 정답이 없다.

 

교육청에서 내려온 사업이 내려오고 내려와서 우리 학년부에서 부장 주도로 독서모임이 만들어졌고, 각자 책 한 권씩을 고르라 했다. 책 고르기가 어렵다. 독서모임의 주제가 입시 지도이다. 흥칫핏.

 

독서는 위로도 못 되고,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인생에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결국 나는 계속 책을 읽고, 그저 거기에서 이 글을 맺을 문장을 발견한다. 타협에 대한 면죄부가 되려나.

 

우리는 더 이상 무지한 젊은이가 아니며, 권력에 짓밟히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나가기 위해 유연하게 타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결코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결단해야만 할 순간도 있다. 수많은 사건들로 이루어진 인생은 시가 아닌 산문인 것이다. (샤를 단치, 왜 책을 읽는가,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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