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휴직을 하다 작년에 다시 복직했다. 중간에 6개월 정도 나가긴 했지만 거의 7년이었다. 그 동안 학교는 변하기도 했고 변하지 않기도 했다. 목소리 높여서 싸워야 간신히 얻어낼 수 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사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나도 익숙해져버렸다. 현재 우리 학교만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모습들은 거저 얻어지지 않았다. 관리자들에게 욕먹어가며 동료교사들의 불편한 눈길을 견뎌가면서 싸워서 만들어낸 것이다.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이 정도면 적당하지 하면서 안주하게 된다. 나는 보수화된 것 같다.

 

편하게 학교 생활을 하려는 내게 이계삼 선생님의 글은 불편했다. 나는 이제 적당히 교사 생활하는 법을 알아버렸다좌절하는 일이 두려워 희망을 가지고 싶지 않다. 학교 안에서 여전히 투쟁하던 이계삼 선생님은, 끝내 학교 밖으로 나왔다. 학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크게 공부한 것도 없고 활동한 적도 없는, 그저 그런 교사인데. 정답이 없다.

 

교육청에서 내려온 사업이 내려오고 내려와서 우리 학년부에서 부장 주도로 독서모임이 만들어졌고, 각자 책 한 권씩을 고르라 했다. 책 고르기가 어렵다. 독서모임의 주제가 입시 지도이다. 흥칫핏.

 

독서는 위로도 못 되고,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인생에 도움도 안 된다. 그래도 결국 나는 계속 책을 읽고, 그저 거기에서 이 글을 맺을 문장을 발견한다. 타협에 대한 면죄부가 되려나.

 

우리는 더 이상 무지한 젊은이가 아니며, 권력에 짓밟히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나가기 위해 유연하게 타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결코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결단해야만 할 순간도 있다. 수많은 사건들로 이루어진 인생은 시가 아닌 산문인 것이다. (샤를 단치, 왜 책을 읽는가,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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