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알라딘도서팀님의 "여름맞이 추리소설 10문 10답 이벤트!"

 

 

1. 가장 최근에 완독한 추리(장르)소설은?  

조세핀 티의 '진리는 시간의 딸'입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는데 역사 속 숨겨진 진실을 차분히 근거를 제시하며, 인간의 심리와 동기적인 면을 꿰뚫어 보면서, 설득력 있게 밝혀내는 과정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선 웬만한 역사서보다도 더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2. 당신이 살해당했다고 가정했을 때, 사건해결을 맡아줬으면 하는 탐정은? 반대로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탐정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응징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범인을 꼭 잡아냄은 물론 자신의 손으로 법의 심판까지 내리는 마이크 해머 탐정에게 꼭 의뢰하고 싶습니다. 반대로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탐정은 형사 변호사 페리 메이슨입니다. 이 사람은 살인 피고인으로 고소된 용의자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면 법에 어긋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범인이 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 버리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3. "휴가길, 이 책 한권 들고 가면 후회없다!" 널리 추천하고픈 추리(장르)소설은?  

사실 모든 책이 다 그렇지만 개인차를 무시할 순 없다고 봅니다. 저라면 이미 읽은 책이지만 S. S. 반다인의 '그린 살인사건'을 들고 가고 싶습니다. 써늘한 겨울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도 더위엔 도움이 될 테고 장엄한 대성당를 보는 듯한 본격 미스터리의 정점을 다시 한 번 차분히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4. 지금 당장 책 살 돈이 10만원 생긴다면, 가장 먼저 장바구니에 담을 추리(장르)소설은?  

워낙에 고전적인 본격추리소설 걸작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요즘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는 존 딕슨 카의 작품들이나 S. S. 반다인의 작품들을 우선적으로 담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일본 사회파 소설의 거장인 마쓰모토 세이쵸의 단편걸작들을 미야베 미유키가 편집하고 해설한 의미 있는 작품집도 구입하고 싶네요. 거기에 예전 황금기 고전들을 제대로 재현해 낸 일본 신본격파 작가들인 시마다 소지 또는 아야츠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 노리즈키 린타로 등의 작품을 하나하나 구입해서 읽고 싶습니다.  

 

5. 지금까지 읽은 추리(장르)소설 중 가장 충격적인-예상외의 결말을 보여준 작품은?(단, 스포일러는 금지!)  

요즘엔 작가들이 워낙 영리해져서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을 통해 놀라운 결말을 보여주는 건 일도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로선 아직까지도 애거서 크리스티 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충격적인 결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최근에 본 작품 중에선 브라이언 프린맨틀의 '사라진 남자'가 전혀 생각지 못한 뜻밖의 결말을 통해 대단히 유쾌하고 기분 좋은 반전을 보여준 작품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6. 우리 나라에 더 소개되었으면 하는 추리(장르)소설 작가가 있다면?  

서양 쪽으론 의외로 다른 거장들에 비해 대단히 많이 소외되고 있는 거장들인 엘러리 퀸과 코넬 울리치, 존 딕슨 카가 우선적으로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그리고 우수한 작품들이 정말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이상하게 인기가 없는 P. D. 제임스와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 시리즈도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합니다. 작가가 아닌 "작품"으로는 가스통 르루의 "검은 옷 부인의 향수(Le Parfume de la Dame en Noir)"가 반드시 번역되었으면 합니다. '노란 방의 비밀'의 속편 격인 이 작품을 정말 보고 싶은데도 아직까지도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건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 작가로는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할 에도가와 람포를 우선 거론하고 싶네요. 단편들은 모두 번역되어 소개됐지만, 장편들은 한 두 작품을 제외하면 전혀 소개되질 않고 있어서 답답합니다. 또한 요코미조 세이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약하며 전후 일본 미스터리를 부흥시켰던 다카기 아키미츠도 많이 아쉽습니다. 특히 '문신 살인사건' 한 작품만 번역된 천재 탐정 가미즈 교스케(神津恭介) 시리즈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현실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긴다이치 고스케(金田一耕助)의 유일한 라이벌이라고 생각되는 이 명탐정의 눈부신 활약을 단지 한 작품으로 보고 그치고 만다는 건 추리소설계의 손실도 이만한 손실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많이 소개되고 있는 여류작가들인 미야베 미유키나 다카무라 가오루, 기리노 나츠오보다 개인적으로 백배는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나츠키 시즈코(夏樹靜子)의 작품들도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꽤 오래된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작품을 읽어 봐도 일정 수준 이상의 훌륭한 작품성을 지닌 진정한 대작가입니다. 이런 작가를 무시한 채 방치하고 있다는 건 뭐랄까 우리 출판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7. 올해 상반기 출간된 추리(장르)소설 중 최고작을 꼽는다면?  

올해에도 정말 좋은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개인적으론 도로시 세이어즈의 '증인이 너무 많다'를 꼽고 싶습니다. 주로 일본 미스터리 위주로 현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와중에 이런 고전적인 걸작이 꿋꿋하게 소개됐다는 사실은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시나 피터 윔지 경의 재기 넘치는 활약은 여전하며, 황금기 미스터리의 진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일편으로 미스터리 팬이라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8.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 역 배우를 내맘대로 캐스팅해본다면?  

이 질문 정말 어렵네요. 전 되도록이면 영상을 통해 책으로 얻은 기존의 이미지가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중의 하나긴 합니다만, 굳이 꼽아 본다면 셜록 홈즈는 영국 배우인 티모시 달튼이 했으면 좋겠고, 뤼팽은 몽테크리스토 백작도 했었던 리차드 챔벌레인 정도가 어떨까 싶네요. 물론 현재 나이는 고려하지 않았고 전성기 때 이미지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제 마음에 딱 들어맞는 적역은 찾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9. 지금까지 읽은 추리(장르)소설 중 가장 '괴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 

'타원형 거울'과 함께 일본 주재 시에 일본어로 쓴 추리소설이라 하여 정말 기대가 컸던 김내성의 '탐정 소설가의 살인'이야말로 그 정체를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요? 다른 작가 작품의 스포일러를 함부로 누설하질 않나, 그 처참한(?) 결말 하며, 도대체 이전의 김내성이 보여준 영특함과 재기발랄함(?)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이 작품은 '안티 미스터리(?)'의 선구작인 걸까요? 진정한 괴작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 준 대표적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  

 

10. 생사에 관계없이, 실제로 가장 만나보고 싶은 추리(장르)소설 작가가 있다면.  

사실 막상 직접 만나게 되면 오히려 말문이 막혀 버릴 것 같기는 합니다만, 개인적으론 미야베 미유키를 만나서 도대체 '화차'의 결말을 왜 그런 식으로 끝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전 분명 더 많은 걸 기대했기 때문에 순간 정말 어이가 없었거든요. 능력이 모자라 도저히 쓸 수 없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독자를 우롱하기 위해 그랬는지 정말 궁금하기 때문에 작가를 붙잡고 상세한 설명을 꼭 들어보고 싶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한대수 님입니다. 이 분의 저서 '물좀 주소 목마르요'. '올드보이 한대수'를 열독했습니다.
한대수 님이 귀국해서 다시 정착하시기 전부터 이 분의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당시엔 구하기 쉽지 않았죠.
겨우 어느 음반점 구석에 운좋게 재고가 남아 있던 테이프를 구해 듣고는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뒤에 한대수 님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속속 발매되는 음반들을 모두 구해서 들어 보았습니다.
이 분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바람보다도 더 자유롭게 살아온 삶 속에서 꽃피운 삶의 철학들이 무척이나
강렬한 느낌을 선사해 주더군요. 한번쯤 만나 뵙고 깊은 가르침을 받고 싶은 분입니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괴도신사 아르세느 뤼팽!
어떤 인물로든 변신이 가능한 그 변화무쌍함!
대단한 프랑스 경찰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그 대담함!
귀하의 물건을 가져가겠다는 예고장을 미리 보내버리는 그 뻔뻔함!
한번쯤 살아 보고 싶은 기상천외한 생애가 아닐까요?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마크 트웨인의 '불가사의한 이방인'이 떠오릅니다. 읽기 전엔 무슨 괴담류의 으시시한 얘기를 상상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괴작이더군요. 도저히 그 유쾌한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여겨
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경험을 선사해준 이상한 작품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내용은 자세히 밝히
진 못하겠지만 완전히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 책이더군요. 이 경우는 좋은 의미에서 '낚인' 책이라고 하겠
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숨겨진 보물을 만난 느낌이랄까요..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시공사에서 나왔던 '솔라리스' 커버입니다. 어쩐지 신비로우면서도 환상적인 커버 아트가
책 내용과 잘 어울려서 보는 내내 깊은 인상에 남는 멋진 표지였습니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웰즈의 다양한 SF 저작들이 몹시 보고프네요. 쥘 베른마저 속속 완역되어 나오고 있는데
어찌 이 거장의 주옥같은 작품들만은 이리도 보기가 쉽지 않은 걸까요? 특히 어린 시절
아동용으로 보았던 '달세계 모험담'은 꼭 완역판으로 다시 보고 싶은 원트 리스트 0순위 책입니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너무 심해서 책 전체가 오탈자로 범벅이 됐거나 우리말 문법을 완전히 무시한
이상한 문장들로 뒤덮이지만 않았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입니다.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박수동 선생님의 '번데기 야구단'과 '신판 오성과 한음'입니다.
박수동 님의 작품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두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걸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뭉스러우면서도 유쾌한 아이들이 벌이는 한판 신나는 소동은 전형적인 70년대 스타일이지만
지금 읽어 봐도 그 즐거움만은 여전한 고마운 책들입니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톰 소여의 모험'입니다. 광대한 미시시피 강이라는 최상의 무대를 배경으로
어린 소년들이 겪게 되는 온갖 경험들은 이제는 미국 내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낭만적인 시대에 대한 향수를 절로 불러일으켜 주는 소중한 시간들이라고 생각되네요.
특히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겪게 되는 톰과 베키, 그리고 톰과 허크의 모험들은
가장 짜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인 것 같군요. 책 길이로야 이것보다 더 긴 책도 많겠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기가 이 책처럼 오래 걸리는 책도 드물 거라는 점에서 모두 완독하고
나면 단순한 길이 이상의 대단한 성취감을 안겨 주는 대작입니다. 상당히 길고 난해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조이스 특유의 짓궂은 유머 때문에 시종일관 낄낄거리게 만드는 이상한 책이
기도 합니다. 참으로 유쾌한 책입니다.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두드림 출판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에도가와 란포의 모든 단편을 전부 번역해서
내놓는 뚝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많은 애정이 갑니다. 정성을 가득 담은 소장본 세트까지 특별히
제작해서 내놓는 그 마음 씀씀이에서 진정한 매니아 기질은 이런 거라는 것을 짙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욱 신뢰가 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증인이 너무 많다 귀족 탐정 피터 윔지 2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터 윔지 경 시리즈는 대망의 첫 번째 데뷔작인 '시체는 누구?'와 단편집 '귀족 탐정 피터경', '나인 테일러스'까지 이미 갖고는 있습니다만, 아끼고 아껴뒀다가 나중에 비장의 독서 대상으로 만끽하려고 아직 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를 기화로 사실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피터 윔지 경과의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아주 처음은 아니고 어렸을 때 청소년판으로 '알리바바의 주문'이던가 하는 단편 또는 중편으로 윔지 경 시리즈를 본 적은 있습니다. 검은 두건을 쓴 악당 무리가 나오고 전서구(傳書鳩)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도로시 세이어즈하면 반드시 소개되는 '의혹(Suspicion)'을 비롯한 몇 편의 단편들도 본 적은 있습니다. 결국 성인용 완전판으론 이번 '증인이 너무 많다'가 피터 윔지 경과의 생애 최초의 만남인 셈입니다.

어렸을 때 처음 접했을 땐 셜록 홈즈 이후 그 당시 한참 새롭게 알게 된 여러 탐정들인 브라운 신부라든지, 포와로, 맥스 캐러도스, 엉클 애브너, 사고기계 반 두젠 교수처럼 유니크한 명탐정 중 하나로 각인됐었습니다. 거기다 보기 드문 귀족 신분의 탐정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여겨졌더랬죠. 추리작가들은 저마다 자신이 창조해 낸 탐정들에게 남과는 다른 색다른 개성을 안겨주기 위해 애썼는데, 윔지 경 역시 그런 작가의 남다른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산물로 여겨집니다.

도로시 세이어즈 하면 흔히 애거서 크리스티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영국 작가인데다 흔하지 않은 여성 작가이며,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라는 점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전 이번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세이어즈와 비교해야 할 작가는 크리스티가 아니라 미국의 반 다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피터 윔지 경이 작품 안에서 시종일관 선보이는 현학적인 대사들 하며, 온갖 현란한 지식들의 향연이야말로 세이어즈의 유일한 라이벌은 반 다인밖에 없겠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더군요. 역시나 옥스퍼드 출신의 재원이었던 세이어즈다 보니 만만치 않은 인문학적 내공을 소설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내뿜을 수밖에 없었을 걸로 보입니다.

이 점은 이런 고풍스런 스타일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겐 환영을 받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이런 스타일을 고리타분하다고 꺼리는 독자들에겐 질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피터 윔지 경 시리즈가 크리스티의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덜 받았던 이유도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윔지 경은 반 다인이 창조해 낸 파일로 밴스 탐정에 비하면 훨씬 매력적인 탐정입니다. 파일로 밴스가 한 가지 주제를 붙잡고 몇 시간이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라면, 윔지 경은 유머 감각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품성이 너그러운 호인이기 때문에 천재형의 비인간적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혹시나 귀족 신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일부 독자들의 반감을 샀을 수도 있겠으나 윔지 경은 거만한 귀족이라기보단 순수하게 탐정일에 열성을 가진 진정한 미스터리 매니아 타입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A  A. 밀른의 '빨강 집의 비밀'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데가 많았는데요. '빨강 집의 비밀'에 나오는 길링검과 베벌리 콤비가 순수한 아마추어적 동기에서 사건의 진상을 즐겁게 추적해 가는 것처럼, 또다른 홈즈와 왓슨 격인 윔지 경과 그의 하인 번터 역시 자신들 앞에 굴러 떨어진 흥미로운 사건을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듯 오락하는 마음으로 다뤄 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관심사들에 몰두하는 수많은 매니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순수한 열정을 이들 콤비에게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겁니다. 피터 윔지 경의 경찰측 파트너인 파커 형사조차도 윔지 경의 절친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직업 속에 매몰된 매너리즘이 느껴지기보단 진정한 프로다운 면모를 선보인 것도 흥미로운 점이었습니다.

흔히들 포와로가 나타나는 곳엔 사건이 지겹게 따라다닌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포와로만 가면 남프랑스든 이집트든 메소포타미아든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어서 그랬을 겁니다. 이건 김전일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김전일이 사건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김전일이 행차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이죠. 하지만 김전일은 상대도 안될 만큼 더 대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피터 윔지 경이더군요. 지금까지 수많은 탐정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자신의 형제 자매가 직접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증인이 너무 많다'에선 윔지 경의 형인 제럴드 윔지 덴버 공작이 살인사건의 피고로 기소되기에 이릅니다. 무려 '공작 각하'께서 말이지요.

그런데도 윔지 경은 다른 사건과 변함 없이 여전히 활기 차게 사건에 빠져듭니다. 사건이 없어 지루해 죽을 듯 하다가도 막상 사건만 터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활력 있는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셜록 홈즈처럼 윔지 경 역시 자신에게 떨어진 사건이라는 먹이를 놓치지 않고 냉큼 낚아채는 사냥개 기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적 열정으로 사건 자체를 완전히 즐긴다는 태도는 여전한 채로 말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친형제인 형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지도 모를 위급 상황이라 해도 차이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타고난 탐정가인 셈이지요.

개인적으로  A. A. 밀른의 '빨강 집의 비밀'을 아주 즐겁게 보았고, S. S.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이런 식의 황금기 본격 미스터리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분께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본격 미스터리의 순수한 재미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웃 일본은 이미 오래 전에 피터 윔지 경 시리즈를 모두 번역했지만 우리도 이제부터 이 주옥 같은 작품들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장마다 붙어 있는 '제사(題詞/epigraph)'의 출처라든지 윔지 경의 대사 속에 등장하는 인용구들을 일일이 찾아 내어서 각주를 덧붙인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원작 그대로의 맛을 살리기 위해 애쓴 세심하고 충실한 번역에 감탄하였으며, 우리도 드디어 중역판의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실감케 해준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아무쪼록 피터 윔지 경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들을 모두 우리말로 감상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난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의 옛 수도인 1000년 고도(古都) 교토(京都)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 헤어진 일란성 쌍둥이 자매의 기구한 사연을 가와바타 특유의
차분한 문체로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이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마크 트웨인의 '불가사의한 이방인', 이상의 시 '거울' 같은
여타 작품들처럼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도플갱어적 소재'를 서정적인 교토의 풍물들과 매끄럽게
조화시킨 한 편의 우아한 실내악 같은 작품이다.

나는 또 다른 나의 환영일까? 또 다른 나는 나를 비추는 거울일 뿐일까?
나의 자아가 수십 수백 개로 분열된다 한들 나의 본질은 오직 하나일 뿐
이기에 우리 모두는 영원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진실로 인해
이마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더욱 차갑게만 느껴지는 작품이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며, 쌍둥이 자매의 가슴 뭉클한
사연을 통해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하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개를 짐작할 수 있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책을 받아보고 생각보다 두툼한 두께에 놀랐습니다.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를 대충 알고 나서, 나올 수 있는 스토리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예단했던 저의 경솔함을 보기 좋게 배신하는 묵직함이었거든요. 대체 이 작가가 무슨 능력으로 단순한 아이디어를 갖고서 저런 어마어마한 분량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더군요. 첫인상부터 '심플 플랜'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던 겁니다.

흔히 서스펜스라고 하면 소설 속 인물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면서 긴박하고 숨막히는 위기들에 빠지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줌으로써 독자를 사로잡게 마련입니다. 영화 쪽에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이런 장르를 재치 있게 잘 다룬 것으로 유명하죠. 미스터리 작가 중에는 역시 윌리엄 아이리시가 대표적입니다.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건에 말려들게 되면서 그 사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런 장르에선 대개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 '심플 플랜'은 단순한 서스펜스라고 부르기 힘든 그 무언가가 소설 중심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습니다. 이 작품은 서스펜스이기 이전에 범죄소설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카트린느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나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미스터 리플리 시리즈'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범법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과연 그 범죄가 발각될 것인지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것이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죄소설이지만 주인공들은 완전범죄를 저지르는 데 능숙한 타고난 재주꾼들이 아니라 윌리엄 아이리시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매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외딴 시골에 사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들 앞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듭니다. 엄청난 거액이 아무도 모르는 눈먼돈이라는 형태로 그들 눈앞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 굴러 떨어졌으니 누구라도 눈이 뒤집어지는 게 인지상정일 테죠. 이제 그들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을 공유한 '공범자'가 됩니다. 과연 그들은 그 비밀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스토리를 예상해 봤습니다만, 이야기는 저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더군요. 저는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외부에서 이들을 추적하는 손길이 미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부의 균열이 이들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정글북'에서 모글리가 자신의 친구인 흑 표범 바기라와 마주치게 되는 어떤 사건 현장이 연상되는 전개였죠. 이 소설의 기본 아이디어가 옛날 이야기에서 많이 언급되는 그런 소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같은 1990년대 작품이어서 그런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범죄소설들인 '비밀의 계절'이나 '도끼'를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질러야 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작품들이라서 주인공의 심리묘사 등에서 유사함이 느껴졌거든요. 특히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주인공의 1인칭 서술 시점은 '비밀의 계절'의 그것과 닮아 있어 저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분명 서스펜스 장르에 해당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독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안감보다 더 큰 감정의 찌꺼기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이 전혀 별개의 인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우리와 닮아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도 소설 속 인물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그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 경악하게 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이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비상한 재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장은 빨리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 한 장 한 장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질 만큼 저의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던 건 순전히 작가의 이런 비범한 글 솜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중반까지 불안한 가운데 어느 정도 평온하게 전개되지만 어느 한 순간 폭발하듯 모든 것이 바뀌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넘는 급박한 사건전개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전까지 약간 작가의 솜씨를 반신반의하고 있던 저의 의심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일종의 합격점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저의 예상과는 빗나가서 살짝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것과는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이런 결말은 하나의 유행처럼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결말은 제 생각과는 달랐지만 그러한 결말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심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말 속에 놓여야 하는 주인공들이 왠지 측은하게 여겨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처음에 이 책의 엄청난 두께에 놀랐던 저는, 작품의 질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으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밀의 계절'이라는 데뷔작을 들고 우리 앞에 혜성 같이 나타났던 도나 타트와 쌍벽을 이루는 이런 작가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저의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분책으로 내놓지 않고 단권으로 내놓는 결단을 보여준 '비채'의 담대한 자세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스콧 스미스라는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나마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준 출판사의 혜안에 또한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비채에서 이미 나온 그의 두 번째 작품인 '폐허'도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