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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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개를 짐작할 수 있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책을 받아보고 생각보다 두툼한 두께에 놀랐습니다.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를 대충 알고 나서, 나올 수 있는 스토리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예단했던 저의 경솔함을 보기 좋게 배신하는 묵직함이었거든요. 대체 이 작가가 무슨 능력으로 단순한 아이디어를 갖고서 저런 어마어마한 분량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더군요. 첫인상부터 '심플 플랜'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던 겁니다.

흔히 서스펜스라고 하면 소설 속 인물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면서 긴박하고 숨막히는 위기들에 빠지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줌으로써 독자를 사로잡게 마련입니다. 영화 쪽에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이런 장르를 재치 있게 잘 다룬 것으로 유명하죠. 미스터리 작가 중에는 역시 윌리엄 아이리시가 대표적입니다.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건에 말려들게 되면서 그 사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런 장르에선 대개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 '심플 플랜'은 단순한 서스펜스라고 부르기 힘든 그 무언가가 소설 중심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습니다. 이 작품은 서스펜스이기 이전에 범죄소설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카트린느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나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미스터 리플리 시리즈'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범법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과연 그 범죄가 발각될 것인지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것이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죄소설이지만 주인공들은 완전범죄를 저지르는 데 능숙한 타고난 재주꾼들이 아니라 윌리엄 아이리시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매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외딴 시골에 사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들 앞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듭니다. 엄청난 거액이 아무도 모르는 눈먼돈이라는 형태로 그들 눈앞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 굴러 떨어졌으니 누구라도 눈이 뒤집어지는 게 인지상정일 테죠. 이제 그들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을 공유한 '공범자'가 됩니다. 과연 그들은 그 비밀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스토리를 예상해 봤습니다만, 이야기는 저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더군요. 저는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외부에서 이들을 추적하는 손길이 미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부의 균열이 이들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정글북'에서 모글리가 자신의 친구인 흑 표범 바기라와 마주치게 되는 어떤 사건 현장이 연상되는 전개였죠. 이 소설의 기본 아이디어가 옛날 이야기에서 많이 언급되는 그런 소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같은 1990년대 작품이어서 그런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범죄소설들인 '비밀의 계절'이나 '도끼'를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질러야 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작품들이라서 주인공의 심리묘사 등에서 유사함이 느껴졌거든요. 특히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주인공의 1인칭 서술 시점은 '비밀의 계절'의 그것과 닮아 있어 저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분명 서스펜스 장르에 해당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독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안감보다 더 큰 감정의 찌꺼기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이 전혀 별개의 인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우리와 닮아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도 소설 속 인물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그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 경악하게 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이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비상한 재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장은 빨리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 한 장 한 장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질 만큼 저의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던 건 순전히 작가의 이런 비범한 글 솜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중반까지 불안한 가운데 어느 정도 평온하게 전개되지만 어느 한 순간 폭발하듯 모든 것이 바뀌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넘는 급박한 사건전개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전까지 약간 작가의 솜씨를 반신반의하고 있던 저의 의심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일종의 합격점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저의 예상과는 빗나가서 살짝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것과는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이런 결말은 하나의 유행처럼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결말은 제 생각과는 달랐지만 그러한 결말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심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말 속에 놓여야 하는 주인공들이 왠지 측은하게 여겨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처음에 이 책의 엄청난 두께에 놀랐던 저는, 작품의 질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으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밀의 계절'이라는 데뷔작을 들고 우리 앞에 혜성 같이 나타났던 도나 타트와 쌍벽을 이루는 이런 작가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저의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분책으로 내놓지 않고 단권으로 내놓는 결단을 보여준 '비채'의 담대한 자세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스콧 스미스라는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나마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준 출판사의 혜안에 또한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비채에서 이미 나온 그의 두 번째 작품인 '폐허'도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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