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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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 테이는 역사적 사실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해 가는 ‘시간의 딸’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시간의 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을 통해 당연시되던 기존의 역사적 고정관념을 뒤엎는 치밀한 논리적 문제 제기에 의해 놀라운 지적 희열을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기한 논거의 역사적 진위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오늘날 ‘다빈치 코드’ 등으로 인기 높은 팩션 장르의 가장 모범적인 전범을 제시해 준 게 아닌가 싶어 더욱 이 작품의 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이런 조세핀 테이가 대표작 ‘시간의 딸’을 발표하기 3년 전에 내놓았던 작품이 바로 이 책,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입니다. 작가의 주특기인 역사적 사건을 작품 안으로 끌어오는 수법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이번엔 역사적 사건을 직접 도마 위에 올려놓는 대신, 소설 속에서 지금 바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으로 재창조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욱 생생하게 사건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시간의 딸’처럼 역사적 사건을 시간이 지난 후대에 추적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일반 추리소설처럼 소설 속 인물이 직접 직면하는 당대의 사건이 돼버린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 심판과 같은 입장에 설 것인가, 그와는 다른 입장에 설 것인가, 결정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먼 영국의 역사적 사건이었기에 별 느낌이 없었지만,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잘 알려진 역사적 미스터리와 관련된 사건이었다면, 작가가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드는 모습을 보면서 반발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영국의 역사를 현지인들만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어쩐지 조세핀 테이가 기존의 역사적 선입견에 대항하는 입장에 섬으로써 일반 독자들에게 미스터리의 반전이 주는 충격 같은 효과를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이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의 경우는 실제 역사에선 피고측과 원고측으로 편이 갈려서 어느 한 쪽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렬했던 모양입니다만, 이 작품 속에서 일반 대중 대다수가 지지하는 쪽은 작가가 열심히 옹호하는 쪽과는 정반대 쪽입니다. 1940년대 말이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볼 때, 사람들이 그 쪽을 옹호하기가 쉬울 거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요즘 같으면야 우리나라조차도 다르게 볼 여지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60여 년 전의 영국이라면 소설 속 진실 같은 경우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겠죠. 이 부분에서 사회적 편견에 대해 작가가 보내는 일종의 야유처럼 느낀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사실 실제 역사적 사건은 개인적으론 그냥 일반적인 소송 사건처럼 느껴졌지만, 이 소설 속 사건은 좀 더 현대화되고 구체화돼서 그런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의 유력한 피의자로 몰린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사회적 지탄이나 집단 린치 같은 경우, 일종의 마녀사냥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특히 그랬습니다.

이런 부분에선 마이클 크라이튼의 ‘긴급할 때는’에 나오던 그 중국계 의사가 떠오르기도 했고, 미네트 월터스의 ‘냉동창고’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특히 ‘냉동창고’는 영국 시골의 전원주택이라는 배경도 유사한 데다 그 속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 집에 가해지는 여러 위해들이 ‘프랜차이즈 사건’과 너무나도 유사해서 혹시나 월터스가 ‘냉동창고’를 쓸 때,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을 대단히 많이 참고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의 위상을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죠.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인터넷 상에서 대중들에게 안 좋게 낙인찍히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공격 앞에 금세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전락하는 걸 볼 수 있지만, 여론을 형성하는 도구만 달랐을 뿐 인간 사회는 과거에도 별 차이가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겐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맛을 채워줄 먹잇감만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물어뜯을 수 있는 먹이만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가 돼 있는 게 바로 우리 인간들이라는 서글픈 진실을 말이죠.

비록 소설 속 인간의 추악한 본성은 읽는 이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소설 자체는 요즘에 나오는 소설들처럼 막장(?)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영국 전원을 배경으로 하는 다른 미스터리소설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온화한 느낌도 충실한 편입니다. 어떤 점에선 요즘 소설들이 주는 롤러코스터 식 극적 긴장감이나 극적 반전은 상대적으로 적을지 모르지만, 역사를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에 뛰어난 식견을 지닌 작가여서 그런지, 지금 읽어도 결코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진실은 어느 시대든 진심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명편이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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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
에드 맥베인 외 지음, 린다 랜드리건 엮음, 홍한별 옮김 / 강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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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강한 작품 평이 일부 담겨 있어서 작품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는 일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추리단편집들은 그 숫자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여러 단편집들을 접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서로 겹치는 작품들도 많았었고,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전부 흡족하게 만족스러웠던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취향이 고전 쪽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정통 추리소설의 맛을 제대로 살렸던 하서 추리문학전집에 실렸던 ‘세계 추리명작 단편선’이 지금까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걸작추리소설 모음’도 네 권 모두 탄탄한 작품 수준을 보여주었구요. 동쪽나라에서 내놓은 ‘페이퍼백 앤 스릴러 시리즈’에 들어 있었던 ‘미스터리 컬렉션 1, 2, 3권’ 도 정예작가들의 정예작품들만 엄선한 걸작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새로 선보인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은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창간 5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 2006년에 내놓은 앤솔로지입니다. 예전에 고려원에서 나온 적이 있는 ‘히치콕 서스펜스 걸작선’에선 예전 편집자인 엘리너 설리번이 편찬해서 내놓았었고, 이번엔 린다 랜드리건이 맡아서 내놓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작품 수준은 두 작품집 모두 막상막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부 32편이 실려 있는 이번 앤솔로지는 예전 엘리너 설리번 편이 약간은 짧은 단편들도 적지 않게 포함시켰던 것에 비해 대체적으로 아주 짧은 단편들은 적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740쪽 정도 되는 두꺼운 볼륨에도 불구하고 전체 수록 작품은 32편뿐이므로, 평균 23쪽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각각의 작품이 그 안에 충분한 얘기를 펼쳐 놓을 만한 분량이라는 얘기가 되는 셈인가요?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에 수록되어 있던 작품들인 만큼 작품들은 거개가 미국을 배경으로 한 미국 미스터리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1956년부터 2006년까지 50년 동안 잡지에 실렸던 작품들 중에서 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엄선한 걸작들만 추려냈기 때문에, 어찌 생각해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단편 미스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미스터리 매니아라면 반드시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어질 작품들만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이런 주옥같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저의 시선을 끌었던 작품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단편 미스터리 작가 중 한 사람인 빌 프론지니의 ‘별 볼일 없는 자의 죽음’이었지만, 아쉽게도 어디선가 한 번 읽어 본 작품이더군요. 분명히 읽어 본 작품인데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몹시 당황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덤벼든 작품은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에드워드 D. 호크의 ‘내려가는 동안’이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탐정인 레오폴드 경감이 등장하지 않아서 약간 실망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작품 자체도 베스트라고 말하기는 조금은 미흡한 수준이었구요.

그렇다면 수많은 단편들 중에서 저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요? 조금은 의외의 결과이지만, 윌리엄 브리튼의 ‘역사적 오류’가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습니다! 사실 읽기 전에는 윌리엄 브리튼이라는 작가가 무척 낯설게 여겨졌는데요. 해설을 보다가 “∼를 읽은 사나이” 시리즈로 유명하다는 구절을 보고 얼른 찾아보니 맞더군요! 저의 혼을 쏙 빼놓았던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를 쓴 장본인이었던 겁니다. 이 제목을 전면으로 내세운 모음사의 추리 단편집이 예전에 나오기도 했었죠? 일단 아이디어 자체가 상당히 기발한데다가 점점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전개가 예상을 뛰어넘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2연타석 홈런을 치기는 정말 힘든데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

로렌스 블록의 ‘쇼핑백 아줌마를 위한 촛불’은 제목에서 준 선입견과는 달리 역시 여전히 거장다운 안정감이 돋보여서 인상에 깊이 남았습니다. 유일하게 두 작품이 실리는 영광을 차지했던 에드 맥베인의 작품 중에선 ‘웃음거리가 아니야’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시 거장의 향취가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윌리엄 브리튼의 작품 다음으로 아깝게 최우수상을 놓친 작품은 스티븐 워질릭의 ‘올가 바토를 찾아서’입니다. 세월을 뛰어 넘는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작품의 대단원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제가 좋아하는 고전적인 향취가 점수를 높이는 데 기여했겠지요?

윌리엄 브리튼과 스티븐 워질릭의 작품과 함께 1, 2위를 다퉜던 작품 중 하나였던 조지 C. 체스브로의 ‘사제들’은 나름대로 깔끔한 결말과 전반부의 진중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괜찮았던 수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특이한 작품은 I. J. 파커의 ‘오봉 고양이’였는데요. 대부분이 미국을 배경으로 한 현대 미스터리였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대담하게도 고대 일본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색 역사 미스터리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중 ‘박꽃(夕顔)’ 에피소드를 읽는 듯한 고아한 정취가 읽는 저를 놀라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탐정 역인 아키타다 스가와라에게서 로베르트 반 훌릭의 적인걸 판관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져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검색해 보니 적판관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나오더군요. 그런데 작가가 일본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아 놀랐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일본 문화가 여러 방면에 걸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또 다른 역사 미스터리 작품인 제임스 링컨 워런의 ’검은 스파르타쿠스’는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해상보험회사 조사관으로 활약하는 앨런 트레비스코를 등장시켜서, 당시 영국 사회의 노예제도의 실상을 권투시합과 결합시켜 박진감 있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국 차이나타운의 세계를 중국계 여성 탐정과 그녀의 콤비인 백인 남성 탐정을 통해 설득력 있게 드러내준 S. J. 로잔의 ‘바디 잉글리시’와, 바둑이라는 동양적인 소도구를 적절하게 삽입해서 일본계 미국인을 비롯한 미국 내 동양인 사회를 실감나게 묘파해 낸 새러 패러츠키의 워쇼스키 시리즈 ‘다카모쿠 정석’이 이번 작품집에 포함된 건 미국 사회에서 동양인들의 사회적 비중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다카모쿠 정석’에선 한국계 미국인들도 등장하고 있군요. 찰리 챈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중국인조차도 대부분 하인이나 하층 노동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걸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네요.

그밖에 베이루트라는 이색적인 배경을 등장시켜 현대적인 시대감각을 유감없이 과시해 준 제프리 스캇의 ‘참을 수 없는 유혹’이나, 영리한 해결책으로 사건을 마무리해서 산뜻한 기분을 안겨 준 그레고리 팰리스의 ‘역경의 제왕’도 기억에 남습니다. 약간은 전형적인 전개긴 하지만 주인공의 심정에 십분 공감이 갔던 제임스 홀딩의 ‘살인 요리법’도 좋았습니다. 이 작품집 중에서 가장 짧은 작품이었지만, 반전만은 최고로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는 에드 레이시의 “스타니슬라프스키 방식’ 보안관”도 빼놓을 순 없겠지요.

마지막으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의 취지(?)를 제대로 살린 작품으로는 잰 버크의 ‘뮤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히치콕의 영화가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결정적인 사건 해결의 단서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니까, 아마도 히치콕이 가장 좋아했을(?) 작품이 아닐까 싶더군요. ^^ 히치콕 매니아를 위해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에 실릴 만한 작품이라면 단연코 이 작품이겠다 싶더군요.

일반적인 단편집들에 비해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지만, 저마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어서 그랬는지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가는 편이었습니다. 모두 다 읽고 난 전체적인 감상은 헨리 슬레서나, 잭 리치,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에드워드 D. 호크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의외로 기대에 못 미쳤던 것에 비해, 지금까지 잘 몰랐던 작가들의 작품들 중에 우수작이 넘쳐났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유명 작가들에 대한 기대치가 무명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동안 주로 유럽이나 일본 작가 위주로 편식을 해온 편이었던 저로선 이번 미국 작가의 물량 공세를 통해 어느 정도 나쁜 식습관이 개선되는 효과를 톡톡히 얻은 듯합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달달한 일본 맛이나 약간은 고리타분한 유럽 맛에 질리셨다면 화끈한 아메리칸 스타일로 이번 기회에 한번 과감히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풍성한 상차림만큼이나 체질 개선에는 그만이라는 걸 금세 실감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무쪼록 맛나게 즐기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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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6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추영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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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은 소위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라고 불리는 괴작이다. 그런데 이 3대 미스터리에 속하는 작품 중에서 전후에 나온 ‘허무에의 공물(허무에의 제물로 번역됨)’을 제외한 두 작품, 이 ‘흑사관’과 ‘도구라 마구라’가 모두 1930년대에 나왔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물론 1930년대는 추리소설 전체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최고의 황금기에 속하는 시기이기는 하다. 일본은 물론 서구에서도 경쟁하듯이 우수한 작품들이 연달아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 때문이다. 추리 기법적으로도 여러 획기적인 실험들이 등장한 시기로서 그 전까지 선보인 적이 없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속속 등장한 각종 지혜의 경연장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 ‘흑사관 살인사건’ 같은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난해하기로 치자면 현학적인 지식을 수시로 뽐내느라 여념이 없는 S. S. 반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능가함은 물론, 가독성에 있어서도 어려운 철학서적쯤은 우습게 여겨질 만큼 독자들은 힘겨운 사투를 각오해야 하니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온갖 서양 학문들이 요사스럽게 휘감아 도는데, 맥락이나 문맥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이로선 정신이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흥미로운 건 서양의 흑마술에 관련된 온갖 지식들이 줄줄 흘러나오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이런 분야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필자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인물과 책들이 마구 등장하는 데는 그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 속에서도 직접 언급되는 ‘비숍 살인사건’, ‘그린 살인사건’, ‘한스 그로스의 예심판사 요람’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선 S. S. 반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노리미즈 린타로의 캐릭터가 파일로 밴스와 상당히 유사하며, 그의 동료인 하세쿠라 검사에게서 매컴 검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일로 밴스가 ‘비숍 살인사건’에서 챕터 하나를 할애해 가면서까지 수학자의 기이한 정신세계를 설명하거나, ‘딱정벌레 살인사건’에서 이집트 상형문자로 쓰인 편지를 공들여 해석해 본다 한들 이 작품의 난해함과 겨루어 본다면 새발에 피 정도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만큼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난해한 지식의 깊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단순히 어려운 지식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지식을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는 과정이 일절 없다 보니 독자로선 더욱 막막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모두 다 읽고 난 뒤에도 어째서 그런 사건이 벌어지게 됐는지 잘 와 닿지 않는 초유의 사태마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이 이 책을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기서로 탄생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일까? 작가와 직접 대화해 보기 전에야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름대로 추측해 본 결과, 이 작품이야말로 전형적인 시대적 산물이 아닐까 싶었다. 이 작품이 나온 1930년대는 일본 자체적으로 볼 때 서양문물 수용에 있어서 어떤 정점에 이른 시기가 아닌가 싶다. 메이지 유신을 거쳐 본격적으로 근대화의 길로 나선 일본이 어느덧 60여년이 지나고 보니 웬만한 서구문명보다도 서구적인 색채가 더 농후해졌던 것은 아닐까? 비록 일반사회로는 아직 미흡했다 하더라도 지식인 사회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일 것이 없을 만큼 서구 문명에 대한 연구 성과가 어느 때보다 무르익었던 시점이었기에 이런 기이한 작품마저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또한 일본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어떤 분야든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어서는 종국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거기에 파묻혀버리는 경향이 강해서, 약간 정신병으로까지 여겨지는 증상이 사회 전반적으로 강한 나라다 보니, 다른 나라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런 괴상한 작품마저 출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서양이 하면 나도 한다는 생각에서 모든 분야를 열심히 따라 하기는 하는데, 너무 지나쳐서 나중엔 그 열정이 자기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열중하고 마는 게 바로 일본인들이 아닐는지... 그래서 어느 나라보다도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미스터리 분야에서마저 이런 엽기적인 결과물을 내놓고야 말았던 것은 아닐까?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또 다른 문제작인 ‘도구라 마구라’가 좀 더 일본이나 중국 색채가 강한, 상대적으로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의 무대인 흑사관은 건물 자체가 이미 일본을 벗어나서 서양보다도 더 서양적인 이색적 공간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건물 외부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 내부 곳곳에도 서양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온갖 기이한 문물들로 가득 차 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저택 안에는 자살한 선대주인 후리야기 산데쓰가 서양에서 직접 데려온 서양인 입양아 네 명이 거주하고 있어, 이 곳이 더욱 일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작가인 오구리 무시타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이상세계를 창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1930년대라는 시기는 난해한 작품들이 다투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대작들이 이미 전 시기에 등장하고 있었으며,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같은 작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남들보다 어렵게 쓰면 쓸수록 인정받는 괴벽이 유행한 시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오구리 무시타로도 이런 추세에 편승한 작가였던 것일까?

해답은 소설 속 결말처럼 그저 짐작만 해볼 수밖에 없다. 어찌 됐든 이 작품은 후대 일본 미스터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다. 좀처럼 자국의 미스터리를 포함시키지 않는 하야카와 미스터리 신서에 이 작품 ‘흑사관 살인사건’ 과 ‘도구라 마구라’가 당당히 들어간 것만 봐도 그렇고,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신본격 작가가 노리미즈 린타로를 흉내 낸 게 아닐까 의심되는 필명을 사용하는 걸 봐도 그렇고... 일본인들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경외감마저 품고 있는 것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게임’에서도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회장인 에가미가 회심의 역작인 ‘적사관 살인사건’을 몇 년째 쓰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건 분명 ‘흑사관 살인사건’을 의식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베스트 미스터리 2000 2권’에 수록된 단편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에선 미스터리 전문 ‘독서 레스토랑’이 등장하는데, 특제 고서 메뉴에는 ‘흑사관 살인사건’의 1935년 신조사 초판 값이 무려 50만 엔으로 매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일본 미스터리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 작품이 어떤 신화적인 작품으로까지 숭앙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양 미스터리의 황금기와 동일한 시기에 질적으로도 우수한 이런 이색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일본의 저력이 부럽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면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피로감을 참아가며 어렵게 끝까지 독파해 낸 책이라서 그런지, 과연 오구리 무시타로의 작품 세계는 어디까지 뻗어나갔을지 궁금해졌고, 오기(?) 때문에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노리미즈의 활약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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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특급살인사건 - 최신세계추리소설 4
西村京太郞 지음 / 추리문학사 / 198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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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스포일러 노출은 각오하셔야 할 듯...)


이미 한 번 읽어보았던 니시무라 교타로의 ‘침대특급 살인사건’을 다시 읽어보는 기회를 가져보았다.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내용이 가물가물해져 다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았다. 추리작가 김성종이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 잇따라 내놓았던 ‘최신세계추리소설’ 시리즈 중 한 편인 이 작품은 니시무라 교타로가 아직 필력이 건재했던 1983년 작품이다. 원제도 번역서와 비슷한 ‘寝台特急あかつき殺人事件’으로, 교통편을 사건트릭에 주로 이용하는 작가의 장기를 그대로 살려서 ‘침대특급 새벽호 살인사건’이라 명명하였다.

새벽호(あかつき)는 일본에선 소위 ‘블루 트레인’으로 유명한 야간 특급열차 중 하나인데, 재작년 3월에는 도쿄와 교토를 잇는 블루트레인 '하야부사'호가 운행 중단 결정을 내려서, 니시무라 교타로가 이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니시무라는 1978년에 “寝台特急(ブルートレイン)殺人事件 / 침대특급(블루 트레인) 살인사건”을 발표하면서 이번에 운행 중단된 ‘하야부사’호를 처음 등장시켰는데, 이 작품을 원점으로 니시무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트래블 미스터리’가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선 약 180편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작품 숲을 이루게 되었다.

새벽호(아카츠키 호)는 오사카와 사세보 사이를 운행하는 야간 특급 열차로 이름 그대로 침대차로 운행되는 블루 트레인이다. 도쿄 경시청 수사1과에서 형사로 근무했던 다나베 쥰(田辺淳)은 실수로 동료를 죽게 한 잘못 때문에 형사 직을 그만 두고 고향인 오사카로 돌아와 사립탐정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사무실로 사카구치 후미코(坂口文子)라는 50대 부인이 찾아와 자신의 아들이 이번에 사망했는데 아들이 근무했던 사세보 앞바다에 유해를 뿌리러 가는 며느리와 함께 동행 해 달라는 기묘한 부탁을 해온다. 며느리가 임신 4개월이라 에스코트가 필요한데 자신은 병든 남편 곁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나베는 후미코의 며느리 유미코(由美子)의 여행에 동행하지만, 유미코 측의 요구로 사세보까지 블루 트레인 새벽호를 타고 가게 되고, 그들이 사세보로 가는 동안 사가(佐賀)시의 한 맨션에서 기쿠치 이사오(菊池功)라는 남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현장에서 다나베가 20만 엔을 영수한 내용이 적힌 명함이 발견되면서 경찰에선 그에게 알리바이를 확인하지만, 유력한 증인인 유미코와 후미코는 다나베의 알리바이를 부정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니시무라의 전속 탐정인 도츠가와(十津川) 경부와 그의 부하인 가메이(亀井) 형사가 등장하고 있다. 다나베는 도츠가와의 부하였기 때문에 용의자로 몰린 다나베를 위해 도츠가와도 자연스럽게 사건 해결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트래블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열차 교통편을 이용한 트릭이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좀 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를 희생시키는 것쯤은 예사로 생각하는 비정한 인간을 냉정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빌 S. 벨리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 같은 작품을 연상시키는 소름끼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나베의 결백을 증명해 가는 과정에서 범인의 악마와 같은 정체가 하나하나 드러나는 과정은 제법 박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도츠가와가 근무하는 도쿄보다는 규슈를 비롯한 간사이 지방이 사건의 주 무대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마치 마츠모토 세이쵸의 소설을 읽는 듯한 여수(旅愁)가 절로 느껴지는 일본 시골의 어느 장면만이 유독 기억에 남아서, 줄곧 마츠모토의 대표작인 ‘0의 초점’과 비슷한 작품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어 보니 단순한 사회파 소설로만 보기에는 뭔가 아쉬웠고, 오히려 인간 본성의 사악함에 초점을 맞춘 수작으로 보는 게 정당한 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90년대 일본 미스터리 문제작들의 선배격이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범인의 존재감이 상당했으며, 범인의 동기나 행동 등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추리소설 중에서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범인을 뽑으라고 한다면 탑 텐에 들어갈만한 우수한(?) 범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가진 채 간직하고 있었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니시무라의 추리소설은 지금까지 이 책을 포함해서 “32년 만에 떠오른 침몰선(発信人は死者/1977)”, “하얀 여행 (夜行列車(ミッドナイト․トレイン)殺人事件/1981)”, “공포의 덫 (恐怖の金曜日/1982)”, “프로야구 殺人事件(日本シリーズ殺人事件/1984)”, “침대특급 장미호의 女人(寝台特急「ゆうづる」の女/1988)”과 단편집 한 권까지 모두 7권 정도를 읽어보았는데 역시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작품의 질이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장편 중에선 ‘32년 만에 떠오른 침몰선’과 ‘하얀 여행’, ‘침대특급 살인사건’이 인상적이었고, 단편 중에선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던 ‘친절한 협박자’가 기억에 남는다. 모리무라 세이치나 아카가와 지로처럼 너무 많은 작품을 양산하다 보니 작품 중에 범작이나 졸작도 많아져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작가이긴 하지만, 니시무라 교타로야말로 찾아서 읽어볼 만한 작품도 분명히 존재하는 일본 미스터리의 대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작, “종착역 살인사건(終着駅殺人事件/1980)”이 국내에도 꼭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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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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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진상이나 트릭 등과 관련된 스포일러는 없지만, 등장인물이라든지 사건의 진행, 서술 방법 같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가 일부 적혀 있으므로 백지 상태에서 책을 보시길 원하시는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유카와 데쓰야를 처음 알게 된 건 역시 “세계의 명탐정 44인”입니다. 세계적인 명탐정들 명단에 일본 출신으론 유일하게 포함된 오니쓰라(鬼貫) 경감은, 범인의 지능적인 알리바이 조작을 열차시간표를 들여다보며 차근차근 격파해 나가는 노력형 탐정이라는 점에서 크로프츠가 창조한 프렌치 경감을 연상시키는 탐정이었습니다. “세계의 명탐정 44인”에서도 ‘프렌치 경감의 일본판’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간문춘(週刊文春)에서 1985년에 추리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동서 미스터리 100 일본편’ 앙케트에서 오니쓰라 경감의 대표작인 ‘검은 트렁크(黒いトランク)’가 탑텐 안에 든 것을 보고 부쩍 관심이 생겼더랬습니다.

이번에 아유카와 데쓰야의 작품 중에서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리라장 사건’도 위 앙케트 순위에 들어있었기에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선 읽기 전에 들었던 생각은 예전부터 가졌던 것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어쩐지 아유카와의 장기인 열차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깨기 트릭은 아닐 것 같다는 선입견이었습니다. ‘리라장’이라는 장소를 제목에 떡하니 내걸었다는 점에서 어쩐지 ‘Y의 비극’이나 ‘그린가의 살인’ 같은 ‘홈 머더’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크로프츠의 일본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고 어떤 점에선 니시무라 교타로(西村京太郎)가 즐겨 쓰는 ‘트래블 미스터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본격물 중에서도 가장 정격적인 장르에 도전한다는 게 왠지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이미 저는 읽기 전부터 아유카와에게 된통 당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도 이길까 말까 한 게 세상 이치인데, 작가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갖고서 독서에 임하였으니 작가와의 싸움에서 제가 이길 리가 만무하겠지요. 일단 처음부터 작가는 저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리라장의 주인이 자살을 했다는 책머리의 언급에서 죽은 집주인과 관련된 가문의 저주와 얽힌 사건이 아닐까 섣불리 예단을 했으나, 웬걸 갑자기 리라장이 학생들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숙소로 전락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더니 젊은 대학생들이 하나씩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건 뭐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게임’이나 긴다이치 하지메 류의 여름 캠프장 같은 느낌으로 급변하는 데야 어느 정도 단련된 저도 대경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런 식의 안이한(?) 접근법으로 괜히 좋은 배경만 망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섣부른 저의 판단은 여지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작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리라장’을 완벽한 본격 미스터리의 무대로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흡사 폭풍우가 몰아치듯 정신없이 튀어나오는 사건! 사건들! 이 작품이 52년 전에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요즘 나온 어줍잖은 신본격 미스터리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읽는 제가 현기증이 다 날 정도였습니다. 오랜 만에 보는 고전 미스터리라는 생각에 느긋하게 머리싸움이나 해야겠다는 저의 여유만만함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입니다.

더욱 분한 것은 작가가 대놓고 이것이 사건을 푸는 열쇠라는 것을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건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도 저는 도저히 그 해답을 모르겠더라는 거였습니다. 대부분의 소설들은 사건이 다 끝날 때쯤에는 범인이나 트릭에 대한 윤곽을 대충이라도 잡을 수 있는 법인데, 이 책은 용의자가 자꾸만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오히려 혼란만이 가중되어 가니 사람 참 미치겠두만요. 더구나 이 사건은 김전일 류의 소위 ‘클로즈드 서클’이 아니고 경찰이 버젓이 수사하고 있는 와중에도 사건이 벌어지는데도 경찰은 물론 읽는 저 역시도 사건의 진상을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트릭과 관련된 어떤 사실 하나만은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어떤 신본격 작가의 어떤 책에서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치 챘어야 했는데 잠깐 그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사건의 진상과 연결시킬만한 추리력은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부끄럽게 느껴지더군요. 아예 숟가락으로 밥을 떠줘도 먹질 못 하니 구제불능이라고 할 밖에요. 저의 추리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새삼 회의가 밀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독자가 충분히 밝혀낼 수 있을 만큼 공정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텐데요. 저로선 충분히 공정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단서를 떡밥으로 깔아놓으면서도 되도록 그게 단서라는 걸 숨기려고 애쓰는 것에 비해, 아유카와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 스스로 이게 단서라고 떳떳이 밝히고 있을 정도니까요. 약간 짐작하기 힘든 부분도 전혀 없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다른 작가에 비해 크게 언페어했다고 생각되진 않았습니다. 그저 깨끗하게 속아 넘어간 제 탓을 해야죠, 누굴 탓하겠습니까...

이 책의 사건은 역시 오니쓰라 경감과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누가 탐정 역을 맡을까 궁금해지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엔 탐정이 아주 늦게서야 등장하거나 편지나 전화로만 등장하는 작품들도 많기 때문에 더욱 맞추기가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이 책에는 명탐정 후보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패트리셔 맥거의 “탐정을 찾아라”를 보는 것처럼 개인적으론 누가 최종적인 사건 해결사인지를 맞추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누가 탐정이 될지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미리 읽으시면 안 되겠죠.

시공사 책들이 늘 그렇듯 이번에도 풍부한 작품 해설이 책말미에 덧붙여져서 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게임’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아유카와 데쓰야는 신인작가들을 발굴하는데도 비상한 재주를 지녔었던 모양입니다. 작가 스스로 밝힌 일본 미스터리 문단의 뒷얘기들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오니쓰라 경감이 나오는 알리바이 깨기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 작품 ‘리라장 사건’ 같은 본격 미스터리에도 출중한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어 아유카와 데쓰야의 다른 작품들이 더욱 보고 싶어졌습니다. 앞으로 ‘검은 트렁크’ 같은 오니쓰라 경감의 대표작은 물론 ‘리라장 사건’ 풍의 다른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도 국내에 더욱 많이 소개되길 희망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호쾌한 본격 미스터리 걸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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