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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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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추리소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딕슨 카의 대표작을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야겠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추리소설 중에 가장 기본적인 셜록 홈즈 책조차도 완역본은 헌책방이 아니면 구할 수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추리소설 팬들을 모두 헌책방으로 내몰았던 암울한 시기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될지 난감할 정도로 하루가 멀다하고 추리소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절로 실감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추리소설 출간 홍수 속에서도 유독 구하기 힘든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이 책 '구부러진 경첩'을 쓴 '존 딕슨 카'였습니다. 물론 다시 부활한 동서 미스터리 북스라든지 몇몇 출판사의 책들을 통해 예전에 소개됐던 카의 작품들이 일부 재간되긴 했지만,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 G.K.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처럼 전집화 또는 미번역된 작품이 새로 소개되는 재평가 대열에는 여전히 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추리소설에 미친 영향이나 그의 대표작들이 지닌 역사적 가치 등을 봤을 때 딕슨 카는 이들 작가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거장인데도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홀대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코난 도일 아들과 합작해서 셜록 홈즈를 충실하게 재현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 번역되더니 마침내 그의 전성기 대표작인 '구부러진 경첩'마저 선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딕슨 카의 작품이다 보니 기대가 많이 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 깔끔한 셜록 홈즈물이라면, 이 작품은 골수 딕슨 카물입니다. 그의 불가능 범죄 취향과 오컬트적 기호가 십분 발휘된 작품인 것입니다.

사실 딕슨 카는 웬만한 추리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주류작가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비주류 작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정통파인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같은 작가들에 비해선 이른바 B급 정서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B급 정서란 그가 데뷔작 때부터 줄곧 집착해 온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들, 마녀라든지 몽마라든지, 길로틴, 흡혈귀 전설, 밀랍인형, 강신술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초자연적 현상과 사악한 흑마술 등에 대한 그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에서 우러나온 독특한 작품 경향을 두고 하는 얘깁니다.

이런 그의 남다른 취향은 이런 걸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그의 작품에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의 작품을 꺼리게 만든 원인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일종의 컬트 작가로 불려왔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예전에 이런 딕슨 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소화불량에 걸릴 여지가 다분했던 모양인지 다른 정통파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 독자들도 기이하고 괴기스런 작품들에 거부감이 적어지면서 오히려 이런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으려는 단계까지 도달했기에 카의 작품은 이런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최적의 작품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딕슨 카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각광받을 수 있는 절호의 시기를 드디어 맞이한 셈이죠.

위에서 설명한 딕슨 카의 암흑 취향은 이 작품 '구부러진 경첩'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책 도입부에선 영국 추리소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누가 진정한 유산 상속자인가를 다투는 치밀한 법정 공방을 보는 듯한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지만, 결국 뒤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처음엔 멋모르고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다가 갑자기 기분 좋게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푸코의 진자'에서 볼 수 있는 '서양 문화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늘'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저에겐 '이런 분야까지 관심을 뻗칠 줄이야...' 하고 감탄했을 정도로 아주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 많은 공부가 됐다고나 할까요? 저처럼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한편 딕슨 카의 또 다른 기호이자 특기인 '불가능 범죄'에 대한 도전도 이 작품에서 역시 제대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딕슨 카 하면 흔히 '밀실파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철통같은 밀실에서 시체만 남겨둔 채 홀연히 사라진 범인의 수수께끼를 기막히게 풀어내는 귀신 뺨치는 솜씨에 절로 경탄하게 되기 때문이겠죠. 이번엔 오픈 된 정원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런! 밀실이 아니구나' 하고 내심 실망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변형된 밀실'로서 역시 변함 없는 불가능 범죄였습니다. 불가능 범죄에 대한 딕슨 카의 정열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트릭에 있어선 불가능 범죄를 다루는 대부분의 본격 추리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만족스러웠습니다. 그의 다른 대표작인 '흑사장 살인사건' 같은 작품과 비교해 봤을 때 크게 무리가 있다고 보이진 않았고, 상당히 맹점을 찌른 아이디어라고 생각되더군요. 오히려 딕슨 카의 기이한 색채가 더욱 강화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기데온 펠 박사를 헨리 메리베일 경보다 조금 더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엔 왜 기데온 펠 박사 시리즈가 더 많이 나오는 걸까요? 기데온 펠 박사가 나오는 작품 중에 걸작이 더 많아서? 아니면 역시 딕슨 카의 대표 탐정은 펠 박사이기 때문일까요? 심지어 아동용 책 중에 '장님 이발사의 면도날(The Blind Barber/1934)'이란 작품에도 펠 박사가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이에 비해 헨리 경은 '흑사장 살인사건(The Plague Court Murders/1934)'과 단편인 '기적을 푸는 사나이(All in a Maze/1956)' 외엔 본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러나 제가 진짜 좋아하는 딕슨 카의 탐정은 앙리 방콜랭(Henri Bencolin)과 그의 조수 제프 말(Jeff Marle)입니다. 아직까진 '밤에 걷다(It Walks by Night/1930)'와 '해골성(Castle Skull/1931)' 밖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콜랭 작품들도 꼭 전부 다 소개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딕슨 카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의 개인적인 독서 취향을 알 수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중간중간 언급되어서 아주 흥미로운데요. 이번에도 에드거 앨런 포가 또다시 언급되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다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늘 관심이 갔던 '유돌포 성의 비밀'도 보이니 이 책도 진짜 읽고 싶어지네요. 거기에다 반 다인의 책에 등장했던 그 범죄학 서적도 나오니까 왠지 반갑더군요.

이 책의 또 다른 의의는 반가운 고려원의 부활입니다. 고려원 하면 미스터리 팬들에겐 '양들의 침묵'과 '독수리는 내리다', '마지막 형사',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 등등 주옥같은 미스터리 책들을 많이 내놓았던 출판사로 유명합니다. 1990년대에 한차례 불었었던 추리소설 붐을 주도했던 고려원 미스터리 책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독자 입장에선 딕슨 카의 책으로 다시 돌아온 고려원 북스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아무쪼록 예전 고려원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알차고 좋은 책들을 예전만큼 꼼꼼하고 치밀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진정한 미스터리 팬이라면 이 작품은 절대 놓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딕슨 카의 책 한 권 읽어보기 위해 또다시 20여 년을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만은 반드시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이 발표된 지 70년이 지나서야 소개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에겐 꼭 읽어야 할 황금기의 보물 같은 작품들이 얼마든지 많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되기에 어떤 점에선 행복하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세계는 정말 깊고도 끝이 없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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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증인'은 작가 김성종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읽을만하고 추리 애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나 예술가 중엔 지나치게 성공한 데뷔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데뷔작인 'Tubular Bells'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Mike Oldfield'나 데뷔 앨범으로 사실상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던 호주의 팝그룹 'Men At Work', 그리고 데뷔작인 '지푸라기 여자'의 작가로만 기억되기 쉬운 프랑스의 추리작가 카트린느 아를레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성종의 경우도 이 작품이 제일 처음 내놓은 작품은 아니지만 장편으로선 처음 내놓았던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 이후 내놓았던 작품들은 신문연재라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인지 이 작품을 능가하는 완성도를 보여주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대표작들 중엔 '여명의 눈동자'라는 대하소설과 '제5열' 같이 일본에까지 수출됐던 성공작도 존재합니다만, '여명의 눈동자'는 신문연재소설이라는 한계를 지닌 데다 그의 작가적 본령인 추리장르로 보긴 힘들고 '제5열' 역시 이 작품 만한 아우라 내지 오리지낼리티는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최후의 증인'이 주는 감동이나 작품성은 김성종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추리문학을 대표할만한, 아니 어쩌면 한국문학 전체를 통틀어봐도 다른 명작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보기 드문 성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추리문학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최후의 증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추리소설적인 완성도로 승부하기보단 6.25 같은 역사적 비극을 작품소재로 활용하면서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탐정역인 오병호 형사가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나름대로 현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외국의 유명한 추리걸작들처럼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엄청난 반전이나 트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담담한 문체로 약간은 허무적인 오병호 형사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사악한 탐욕이 빚어낸 놀라운 비극을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법이 오히려 작품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품 속 인물들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마치 진짜로 벌어졌던 사건처럼 우리를 분노케 하는 효과를 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6.25라는 혼란을 틈타 탐욕에 일그러진 인간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모습들을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는 냉혹한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인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데, 그 흡인력이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추리적 재미도 선사해주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작가가 생각했던 어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한 장치를 활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결국 '최후의 증인'이라는 장편소설이 보여주는 한계와 미덕은 어떤 점에선 그동안 한국 추리문학이 당면했던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몸소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정서상 추리 장르는 이런 정도의 선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는 건가 싶은 아쉬움과 함께, 그래도 우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우리만의 소재를 잘 이끌어낸 작품이라는 뿌듯함이 공존하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최후의 증인'을 영상화한 작품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김성종은 독자들 사이에서 호오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작가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추리소설계의 대표작가였던 만큼 그의 많은 작품들이 영상화되었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물론, 미니 시리즈 '제5열', '국제열차 살인사건'도 있었으며, 단막극 '백색인간', 원작보다 훨씬 좋았던 단막극 '피아노 살인' 등등 상당수가 존재합니다.

이 중에서 '최후의 증인'은 작품이 영상소재로 괜찮아서 그랬는지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 영상화됐는데요. TV 드라마는 특집극(1979.6.25∼1979.6.27)과 주간연속극(1987.6.1∼1987.6.29)으로 두 번, 영화는 1980년 이두용 감독의 같은 제목 영화와 2001년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으로 두 번 만들어졌습니다. 출연진은 1979년 드라마에는 오지명, 전운, 김해숙 씨 등이 출연했고, 1987년 드라마에는 유인촌, 최불암, 김영란 씨 등이 출연했습니다. 특이한 건 최불암 씨 같은 경우 1980년 영화에도 출연했었는데요. 모두 똑같은 '황바우' 역을 맡았습니다.

제가 오늘 얘기하려는 영상물은 이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되는 1980년 판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예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한번 꼭 보고 싶었지만, TV 같은데서 방영될 때 운 좋게 걸린 적이 없어서 지금까지 감상하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이 작품에 큰 기대를 가졌던 건 아니었고, 그 당시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나 드라마들을 하나하나 챙겨볼 때와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읽어본 책을 영상으로 한번 확인해 보자는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라디오에서 팝송이 더 많이 흘러나왔을 만큼 서구에 대한 동경이 강할 때라 한국영화에 대한 저의 인식 역시 상당히 좋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이 영화 '최후의 증인'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걸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저주받은 걸작'이라느니 '숨겨진 걸작'이라느니 하면서 칭송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사연인즉슨 이 영화가 개봉 당시 1시간 30분 정도의 러닝타임이었지만 원래는 2시간 40분에 육박하는 것을 심의에 걸려서 그렇게 난도질당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흥행에도 실패하고 말았다고요. 과연 그렇다면 '저주받았다'고 표현할 만하겠더군요. 거기에 오승욱 감독이나 박찬욱, 류승완 감독 같은 쟁쟁한 젊은 감독들이 나서서 이 영화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형편이니 저 역시도 왠지 마음이 동하게 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체크하려던 영화였는데 저렇게까지 좋다고들 하니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그렇게 해서 기회를 기다렸는데 마침 이 영화의 신도(?)들이 DVD마저 내놓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한 차례 유행이 지났지만 DVD 발매 기념으로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다시 상영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 눈으로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기 전에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가 28년 전 영화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아직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을 할 때였고 화면이나 음악의 질 같은 것도 지금과는 현격한 차이가 날 때였습니다. 28년 된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을 줄 거라는 각오를 하고 봐야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해서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는데, 느닷없이 튀어나온 감독의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1980년이라는 특별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희망과 절망을 반반씩 안고서 그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던가 그런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좀 어두울 거라는 그런 말이었죠. 그 당시 가졌을 '앞날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 같은 게 느껴지더군요.

마침내 시작된 영화는 눈길을 사로잡는 씬들을 이어 붙여 감각적으로 처리하는데 인상이 나쁘지 않더군요. 전 첫인상을 중시하는 편인데 이 영화의 첫인상은 합격 수준이었던 겁니다. 원작소설 도입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깔끔한 기법으로 관객에게 알리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이었죠.

뒤이어 등장하는 오병호 형사 역의 하명중 씨 모습도 감독이 처음 밝혔던 어쩐지 어두침침해 보이는 풍경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습니다. 사실 하명중 씨는 제가 책을 보면서 상상했던 오병호 형사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흑수선'의 이정재 씨나 TV 드라마의 오지명 씨, 유인촌 씨보단 낫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1980년이라면 그래도 가장 최적의 캐스팅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시 영화는 후시녹음의 한계를 감추지 못했고 몇몇 장면에선 극장이라 그랬는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음악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면의 질감이나 주인공이 계속해서 이동하는 풍경 풍경들은 괜찮더군요. 거친 듯하면서도 잘 계산된 듯한 화면 구성이 몇 개 눈에 띄었고 엄청나게 고생하면서 찍었을 듯한 수많은 씬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인 제작진의 수고가 새삼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과연 10개월 넘게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었다는 날것 그대로의 화면이 28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제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 영화상영이 끝나고 있었던 오프라인 코멘터리에서 이두용 감독님이 직접 밝힌 회상에 의하면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어쩔 수 없는 몇 장면 빼고는 세트 촬영을 최대한 배제한 채 로케이션 촬영을 고집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방안 장면을 찍을 때도 미술팀에게 벗겨져서 늘어진 벽지조차 그대로 두라는 지시를 할 정도로 촬영지로 선택된 로케이션 장소의 살아있는 느낌을 살리려 애썼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오병호 형사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느낌을 주는 한편의 로드무비 같은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거의 차이가 없는 1970년대 말 당시 한국 사회의 리얼한 모습이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파노라마 같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우리 자신의 과거 모습을 갑자기 눈앞에 마주하다보니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를 들킨 것 마냥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대신 '흑수선'이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에서 느껴지던 세련됐지만 왠지 가짜 같아서 위화감이 드는 '지나간 과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듯한 영화들'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그 시대 그대로의 살아있는 느낌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론 '하녀'나 '마의 계단'처럼 사람들에게 전설로 회자되는 영화들을 막상 볼 때마다 느꼈던 것처럼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한계를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는 교훈 역시 '최후의 증인'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최후의 증인'에선 어떤 여배우가 나올 때마다 관객석 뒤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요. 아마도 이 여배우 역할을 맡은 성우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목소리연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158분에 달하는 기나긴 장편 영화이기 때문에 중간 부분에 약간 루스한 부분이 있는데 그런 데서 느껴지는 그 시대만의 순박한(?) 장면도 역시 있었습니다.

그래도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자 사건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 알려주기 위해 그 과정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배경으로 사건의 진상을 묘사하는 화면을 보여주는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의 전형적인 기법이 사용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해서 그랬는지 신선하게 다가오더군요. 또한 원작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어떤 설정을 이 영화에서 바꿔버린 것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원작소설에서 오 형사가 선택하는 결말의 경우 김성종의 초기 단편들에서 보여주는 허무적인 색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해했었는데, 영화를 통해 영상으로 보니까 오 형사의 선택이 어쩐지 이해가 됐습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르지만요.

무엇보다 이 영화 최대의 장점은 캐스팅의 성공이 아닐까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인공 오병호 형사 역의 하명중 씨도 좋고, 황바우 역의 최불암 씨도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최상의 적역이었습니다. '흑수선'에서 같은 역을 맡은 안성기 씨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명확해 보입니다. 또한 손지혜 역의 정윤희 씨도 이 영화를 살려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양달수 역의 이대근 씨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연기자들도 각각의 역할과 큰 무리 없이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이 스크린 위에 살아서 움직이는 듯 생동감 있게 다가올 수 있었던 건 이런 좋은 캐스팅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정윤희 씨는 제가 가진 기억 이상으로 뛰어난 매력을 지닌 배우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지혜 캐릭터를 정윤희 씨가 하니까 너무나도 참혹한 일을 연거푸 겪다 보니 정신이 멍해져 버린 여자의 느낌이 진짜 사실감 있게 다가와서 저절로 그녀에게 동정이 갈 정도였습니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다시 만난 정윤희 씨는 저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흑수선'에서 이미연 씨가 맡았던 손지혜와 비교해 보니 왜 흑수선의 감동이 덜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작품은 결코 그런 식으로 리메이크를 해서는 안 되는 작품이었던 겁니다.

오병호 형사가 단서를 얻기 위해 찾아간 어느 국민학교(당시는 그랬습니다)의 여교사로 나오는 한혜숙 씨는 하명중 씨와 함께 임권택 감독의 '족보'라는 영화에도 함께 출연했었는데요. 이런 인연 때문인지 작년에 하명중 씨가 정말 오랜만에 만든 영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에 주연으로 흔쾌히 출연했던 모양입니다. 하명중 씨는 '바보들의 행진', '한네의 승천' 등을 만든 비운의 감독 고 하길종 씨의 동생이기도 하죠.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큰 틀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각색자인 윤삼육 작가 특유의 해학적인 대사를 집어넣음으로써 자기만의 색깔을 내비친 것도 원작과는 다른 이 영화만의 매력이었습니다. 특히 추리 과정이나 사건의 연결 과정을 그 당시 영화치곤 꽤나 치밀하고 개연성 있게 제시한 것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건 이런 추리영화가 우리 영화사에서 매우 드물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고작해야 '살인의 추억'이나 '혈의 누' 정도를 추리 영화라고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이런 장르는 우리 영화 역사에서 너무나도 귀하기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누가미 일족'이나 '옥문도' 같은 영화가 나오고 그 영화들이 대중들에게 열띤 반응을 얻어낼 일은 앞으로도 결코 일어날 리 없다고 봤을 때 이 영화 '최후의 증인'이 지니는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극찬하듯 희대의 걸작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제작연도를 감안해 볼 때 전체적으로 잘 뽑아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 외에 '흑수선' 밖엔 못 봤지만 TV 드라마라는 매체 상의 한계를 생각해 볼 때 이 영화가 현재까진 '최후의 증인 영상물의 결정판'이라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제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퇴행적 심리에 도움을 주는 과거 회상적 영화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폄하하고 말기에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어떤 진정성이 담겨 있는 작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원작소설을 꺼내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한동안 포기했던 김성종을 다시 재평가해보고 싶어졌으며, DVD를 구입해서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고 얘기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평가는 충분한 게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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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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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역시 '내가 죽인 소녀'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읽어 봤던 이 소설은 나오키 상을 수상한 하라 료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나에겐 일본추리소설 뿐만 아니라 일본소설 자체가 낯설 때였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일종의 놀라움의 대상으로 다가왔었다. 일본이라는 사회 자체에 한참 호기심이 왕성할 때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이처럼 서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 일본이 이런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를 대입해 놓아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고도사회라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주인공 '사와자키'라는 사립탐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본사회의 생생한 범죄들과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의 활약은 '이니셜 M이라는 사나이' 와 '소년을 본 남자' 라는 두 단편에서 더 확인할 수 있었지만, 워낙 작품 자체가 과작인데다 국내에는 더 이상 그의 작품이 소개되지 않아서 그렇게 잊혀져버리는 듯 했다.

그렇게 십 수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데뷔 장편이 번역된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왔다. 원서 출간과 거의 동시에 번역됐던 '내가 죽인 소녀'에 비하면 20년 정도의 시차가 벌어진 시점이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약간 우려 섞인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월의 격차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오래된 옛친구를 다시 만나는 듯한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나온 하라 료의 첫 장편소설 첫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나는 책을 볼 때 첫인상을 중시하는 편인데 이 책의 첫 장면은 '내가 죽인 소녀'보다 어쩐지 나은 것 같았다. 탐정사무소로 의뢰인 또는 어떤 사람이 찾아오는 도입부는 셜록 홈즈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 방식이긴 하지만, 그만큼 친근감을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과연 이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호기심을 갖게 하는 좋은 구성이다.

결국 사와자키 탐정은 실종된 누군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선 사람들을 만나러 다녀야 한다. 사람을 만나서 정보를 얻어야 하고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읽으면서 탐정이야말로 가장 외로운 직업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어떤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 채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한 채 사건에 온전히 매달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데뷔작에는 주인공 사와자키 탐정에게 그의 없어진 파트너 와타나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두 번째 장편인 '내가 죽인 소녀'에선 잘 느껴지지 않았던 파트너의 부재가 이 작품에선 짙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 때문에 몸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와타나베는 이제 사와자키 곁에 없지만 사와자키는 여전히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홀로 지키고 있다. 둘이 함께 하던 사무실을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고독한 현실은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사와자키가 텅 빈 사무실 문을 열고 어두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한 줄기 독한 담배연기를 가볍게 날려보지만 그의 얼굴엔 어쩐지 짙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외로움을 '전화응답서비스 회사'의 친한 여직원과 농담하듯 정겹게 안부를 교환하면서 해소하는 장면이라든지, 상당히 당돌하고 거침없는 말투에 비하면 의외로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서 드러나듯, 사와자키는 사람을 끄는 은근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한번 의뢰 받은 사건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사건을 추적하는 성실한 모습은 더욱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든다. 위에서 언급한 한 단편에선 사건 당사자가 직접 의뢰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죽기 전에 나눈 전화 통화 하나만으로 끝까지 진상을 추적하는 작품마저 있을 정도다.

사와자키의 기사도적인 무용담은 자연스럽게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의식하도록 만들지만, 사와자키는 필립 말로의 단순한 일본식 적용 이상의 매력을 선사해 준다. 물론 필립 말로가 없었다면 사와자키가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사와자키는 사와자키만의 매력으로 충분히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그러면서도 단순한 아류라고 하기엔 너무도 세련되고 탄탄하게 구축된 작품 안에서 사와자키는 나름의 생명력을 지닌 채 생생하게 살아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탐정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품도 그런 점에서 예외가 없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와자키의 시점에서, 사와자키의 시선으로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다 보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사와자키의 눈을 통해 일본사회를 들여다보게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언뜻 보면 미국 작품을 일본식으로 비튼 것 같지만, 실상은 일본의 얘기인 것이다. 미국 작품에선 느낄 수 없는 일본 특유의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하라 료의 작품은 그 나름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사회에 공통되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본만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탐정의 눈을 통해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일본이 아닌 우리 자신의 얘기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탐정의 눈을 통해 인간사회의 여러 모순들과 얽히고 설킨 난맥상을 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탐정이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은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실종된 누군가를 찾아다니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러 다니든, 탐정은 언제나 누군가를 만나러 떠돌아 다녀야 한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닌지 판단하고 그들의 내면까지 추적해야 하는 탐정의 수사과정은 어떤 점에선 인간존재의 탐구일는지도 모른다. 탐정은 사람들의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을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과 대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매력은 정교한 트릭으로 구축된 완전범죄가 끝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의 그 강렬한 쾌감에도 있지만, 어쩌면 진정한 매력은 그 숨겨진 가장 내밀한 비밀이 드러났을 때 느껴지는 충격적인 느낌에 있는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감춰져 있는 가장 내밀하고 사악한 속내, 그 암흑의 심연이 폭로됐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 내지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것 때문에 나는 자꾸만 추리소설을 보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해치면서까지 절실히 감추고 싶었던 그 깊고 깊은 비밀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내가 생각하는 이런 추리소설의 진정한 매력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엔 번듯하고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잘난 사람들에게도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추고 싶은 저마다의 비밀이 존재한다는 그 냉혹한 현실을 통해 나는 다시금 인간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오늘도 그 인간들을 찾아 길을 떠나고 있을 사와자키의 외로운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두운 밤거리를 쓸쓸히 걸어가고 있을 그의 뒷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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