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이 너무 많다 귀족 탐정 피터 윔지 2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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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윔지 경 시리즈는 대망의 첫 번째 데뷔작인 '시체는 누구?'와 단편집 '귀족 탐정 피터경', '나인 테일러스'까지 이미 갖고는 있습니다만, 아끼고 아껴뒀다가 나중에 비장의 독서 대상으로 만끽하려고 아직 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를 기화로 사실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피터 윔지 경과의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아주 처음은 아니고 어렸을 때 청소년판으로 '알리바바의 주문'이던가 하는 단편 또는 중편으로 윔지 경 시리즈를 본 적은 있습니다. 검은 두건을 쓴 악당 무리가 나오고 전서구(傳書鳩)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도로시 세이어즈하면 반드시 소개되는 '의혹(Suspicion)'을 비롯한 몇 편의 단편들도 본 적은 있습니다. 결국 성인용 완전판으론 이번 '증인이 너무 많다'가 피터 윔지 경과의 생애 최초의 만남인 셈입니다.

어렸을 때 처음 접했을 땐 셜록 홈즈 이후 그 당시 한참 새롭게 알게 된 여러 탐정들인 브라운 신부라든지, 포와로, 맥스 캐러도스, 엉클 애브너, 사고기계 반 두젠 교수처럼 유니크한 명탐정 중 하나로 각인됐었습니다. 거기다 보기 드문 귀족 신분의 탐정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여겨졌더랬죠. 추리작가들은 저마다 자신이 창조해 낸 탐정들에게 남과는 다른 색다른 개성을 안겨주기 위해 애썼는데, 윔지 경 역시 그런 작가의 남다른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산물로 여겨집니다.

도로시 세이어즈 하면 흔히 애거서 크리스티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영국 작가인데다 흔하지 않은 여성 작가이며,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라는 점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전 이번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세이어즈와 비교해야 할 작가는 크리스티가 아니라 미국의 반 다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피터 윔지 경이 작품 안에서 시종일관 선보이는 현학적인 대사들 하며, 온갖 현란한 지식들의 향연이야말로 세이어즈의 유일한 라이벌은 반 다인밖에 없겠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더군요. 역시나 옥스퍼드 출신의 재원이었던 세이어즈다 보니 만만치 않은 인문학적 내공을 소설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내뿜을 수밖에 없었을 걸로 보입니다.

이 점은 이런 고풍스런 스타일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겐 환영을 받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이런 스타일을 고리타분하다고 꺼리는 독자들에겐 질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피터 윔지 경 시리즈가 크리스티의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덜 받았던 이유도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윔지 경은 반 다인이 창조해 낸 파일로 밴스 탐정에 비하면 훨씬 매력적인 탐정입니다. 파일로 밴스가 한 가지 주제를 붙잡고 몇 시간이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라면, 윔지 경은 유머 감각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품성이 너그러운 호인이기 때문에 천재형의 비인간적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혹시나 귀족 신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일부 독자들의 반감을 샀을 수도 있겠으나 윔지 경은 거만한 귀족이라기보단 순수하게 탐정일에 열성을 가진 진정한 미스터리 매니아 타입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A  A. 밀른의 '빨강 집의 비밀'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데가 많았는데요. '빨강 집의 비밀'에 나오는 길링검과 베벌리 콤비가 순수한 아마추어적 동기에서 사건의 진상을 즐겁게 추적해 가는 것처럼, 또다른 홈즈와 왓슨 격인 윔지 경과 그의 하인 번터 역시 자신들 앞에 굴러 떨어진 흥미로운 사건을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듯 오락하는 마음으로 다뤄 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관심사들에 몰두하는 수많은 매니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순수한 열정을 이들 콤비에게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겁니다. 피터 윔지 경의 경찰측 파트너인 파커 형사조차도 윔지 경의 절친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직업 속에 매몰된 매너리즘이 느껴지기보단 진정한 프로다운 면모를 선보인 것도 흥미로운 점이었습니다.

흔히들 포와로가 나타나는 곳엔 사건이 지겹게 따라다닌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포와로만 가면 남프랑스든 이집트든 메소포타미아든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어서 그랬을 겁니다. 이건 김전일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김전일이 사건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김전일이 행차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이죠. 하지만 김전일은 상대도 안될 만큼 더 대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피터 윔지 경이더군요. 지금까지 수많은 탐정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자신의 형제 자매가 직접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증인이 너무 많다'에선 윔지 경의 형인 제럴드 윔지 덴버 공작이 살인사건의 피고로 기소되기에 이릅니다. 무려 '공작 각하'께서 말이지요.

그런데도 윔지 경은 다른 사건과 변함 없이 여전히 활기 차게 사건에 빠져듭니다. 사건이 없어 지루해 죽을 듯 하다가도 막상 사건만 터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활력 있는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셜록 홈즈처럼 윔지 경 역시 자신에게 떨어진 사건이라는 먹이를 놓치지 않고 냉큼 낚아채는 사냥개 기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적 열정으로 사건 자체를 완전히 즐긴다는 태도는 여전한 채로 말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친형제인 형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지도 모를 위급 상황이라 해도 차이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타고난 탐정가인 셈이지요.

개인적으로  A. A. 밀른의 '빨강 집의 비밀'을 아주 즐겁게 보았고, S. S.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이런 식의 황금기 본격 미스터리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분께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본격 미스터리의 순수한 재미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웃 일본은 이미 오래 전에 피터 윔지 경 시리즈를 모두 번역했지만 우리도 이제부터 이 주옥 같은 작품들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장마다 붙어 있는 '제사(題詞/epigraph)'의 출처라든지 윔지 경의 대사 속에 등장하는 인용구들을 일일이 찾아 내어서 각주를 덧붙인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원작 그대로의 맛을 살리기 위해 애쓴 세심하고 충실한 번역에 감탄하였으며, 우리도 드디어 중역판의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실감케 해준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아무쪼록 피터 윔지 경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들을 모두 우리말로 감상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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