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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6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추영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평점 :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은 소위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라고 불리는 괴작이다. 그런데 이 3대 미스터리에 속하는 작품 중에서 전후에 나온 ‘허무에의 공물(허무에의 제물로 번역됨)’을 제외한 두 작품, 이 ‘흑사관’과 ‘도구라 마구라’가 모두 1930년대에 나왔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물론 1930년대는 추리소설 전체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최고의 황금기에 속하는 시기이기는 하다. 일본은 물론 서구에서도 경쟁하듯이 우수한 작품들이 연달아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 때문이다. 추리 기법적으로도 여러 획기적인 실험들이 등장한 시기로서 그 전까지 선보인 적이 없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속속 등장한 각종 지혜의 경연장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 ‘흑사관 살인사건’ 같은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난해하기로 치자면 현학적인 지식을 수시로 뽐내느라 여념이 없는 S. S. 반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능가함은 물론, 가독성에 있어서도 어려운 철학서적쯤은 우습게 여겨질 만큼 독자들은 힘겨운 사투를 각오해야 하니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온갖 서양 학문들이 요사스럽게 휘감아 도는데, 맥락이나 문맥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이로선 정신이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흥미로운 건 서양의 흑마술에 관련된 온갖 지식들이 줄줄 흘러나오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이런 분야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필자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인물과 책들이 마구 등장하는 데는 그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 속에서도 직접 언급되는 ‘비숍 살인사건’, ‘그린 살인사건’, ‘한스 그로스의 예심판사 요람’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선 S. S. 반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노리미즈 린타로의 캐릭터가 파일로 밴스와 상당히 유사하며, 그의 동료인 하세쿠라 검사에게서 매컴 검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일로 밴스가 ‘비숍 살인사건’에서 챕터 하나를 할애해 가면서까지 수학자의 기이한 정신세계를 설명하거나, ‘딱정벌레 살인사건’에서 이집트 상형문자로 쓰인 편지를 공들여 해석해 본다 한들 이 작품의 난해함과 겨루어 본다면 새발에 피 정도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만큼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난해한 지식의 깊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단순히 어려운 지식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지식을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는 과정이 일절 없다 보니 독자로선 더욱 막막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모두 다 읽고 난 뒤에도 어째서 그런 사건이 벌어지게 됐는지 잘 와 닿지 않는 초유의 사태마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이 이 책을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기서로 탄생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일까? 작가와 직접 대화해 보기 전에야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름대로 추측해 본 결과, 이 작품이야말로 전형적인 시대적 산물이 아닐까 싶었다. 이 작품이 나온 1930년대는 일본 자체적으로 볼 때 서양문물 수용에 있어서 어떤 정점에 이른 시기가 아닌가 싶다. 메이지 유신을 거쳐 본격적으로 근대화의 길로 나선 일본이 어느덧 60여년이 지나고 보니 웬만한 서구문명보다도 서구적인 색채가 더 농후해졌던 것은 아닐까? 비록 일반사회로는 아직 미흡했다 하더라도 지식인 사회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일 것이 없을 만큼 서구 문명에 대한 연구 성과가 어느 때보다 무르익었던 시점이었기에 이런 기이한 작품마저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또한 일본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어떤 분야든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어서는 종국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거기에 파묻혀버리는 경향이 강해서, 약간 정신병으로까지 여겨지는 증상이 사회 전반적으로 강한 나라다 보니, 다른 나라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런 괴상한 작품마저 출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서양이 하면 나도 한다는 생각에서 모든 분야를 열심히 따라 하기는 하는데, 너무 지나쳐서 나중엔 그 열정이 자기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열중하고 마는 게 바로 일본인들이 아닐는지... 그래서 어느 나라보다도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미스터리 분야에서마저 이런 엽기적인 결과물을 내놓고야 말았던 것은 아닐까?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또 다른 문제작인 ‘도구라 마구라’가 좀 더 일본이나 중국 색채가 강한, 상대적으로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의 무대인 흑사관은 건물 자체가 이미 일본을 벗어나서 서양보다도 더 서양적인 이색적 공간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건물 외부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 내부 곳곳에도 서양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온갖 기이한 문물들로 가득 차 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저택 안에는 자살한 선대주인 후리야기 산데쓰가 서양에서 직접 데려온 서양인 입양아 네 명이 거주하고 있어, 이 곳이 더욱 일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작가인 오구리 무시타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이상세계를 창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1930년대라는 시기는 난해한 작품들이 다투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대작들이 이미 전 시기에 등장하고 있었으며,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같은 작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남들보다 어렵게 쓰면 쓸수록 인정받는 괴벽이 유행한 시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오구리 무시타로도 이런 추세에 편승한 작가였던 것일까?
해답은 소설 속 결말처럼 그저 짐작만 해볼 수밖에 없다. 어찌 됐든 이 작품은 후대 일본 미스터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다. 좀처럼 자국의 미스터리를 포함시키지 않는 하야카와 미스터리 신서에 이 작품 ‘흑사관 살인사건’ 과 ‘도구라 마구라’가 당당히 들어간 것만 봐도 그렇고,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신본격 작가가 노리미즈 린타로를 흉내 낸 게 아닐까 의심되는 필명을 사용하는 걸 봐도 그렇고... 일본인들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경외감마저 품고 있는 것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게임’에서도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회장인 에가미가 회심의 역작인 ‘적사관 살인사건’을 몇 년째 쓰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건 분명 ‘흑사관 살인사건’을 의식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베스트 미스터리 2000 2권’에 수록된 단편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에선 미스터리 전문 ‘독서 레스토랑’이 등장하는데, 특제 고서 메뉴에는 ‘흑사관 살인사건’의 1935년 신조사 초판 값이 무려 50만 엔으로 매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일본 미스터리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 작품이 어떤 신화적인 작품으로까지 숭앙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양 미스터리의 황금기와 동일한 시기에 질적으로도 우수한 이런 이색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일본의 저력이 부럽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면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피로감을 참아가며 어렵게 끝까지 독파해 낸 책이라서 그런지, 과연 오구리 무시타로의 작품 세계는 어디까지 뻗어나갔을지 궁금해졌고, 오기(?) 때문에라도 꼭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노리미즈의 활약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