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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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진상이나 트릭 등과 관련된 스포일러는 없지만, 등장인물이라든지 사건의 진행, 서술 방법 같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가 일부 적혀 있으므로 백지 상태에서 책을 보시길 원하시는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유카와 데쓰야를 처음 알게 된 건 역시 “세계의 명탐정 44인”입니다. 세계적인 명탐정들 명단에 일본 출신으론 유일하게 포함된 오니쓰라(鬼貫) 경감은, 범인의 지능적인 알리바이 조작을 열차시간표를 들여다보며 차근차근 격파해 나가는 노력형 탐정이라는 점에서 크로프츠가 창조한 프렌치 경감을 연상시키는 탐정이었습니다. “세계의 명탐정 44인”에서도 ‘프렌치 경감의 일본판’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간문춘(週刊文春)에서 1985년에 추리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동서 미스터리 100 일본편’ 앙케트에서 오니쓰라 경감의 대표작인 ‘검은 트렁크(黒いトランク)’가 탑텐 안에 든 것을 보고 부쩍 관심이 생겼더랬습니다.

이번에 아유카와 데쓰야의 작품 중에서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리라장 사건’도 위 앙케트 순위에 들어있었기에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선 읽기 전에 들었던 생각은 예전부터 가졌던 것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어쩐지 아유카와의 장기인 열차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깨기 트릭은 아닐 것 같다는 선입견이었습니다. ‘리라장’이라는 장소를 제목에 떡하니 내걸었다는 점에서 어쩐지 ‘Y의 비극’이나 ‘그린가의 살인’ 같은 ‘홈 머더’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크로프츠의 일본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고 어떤 점에선 니시무라 교타로(西村京太郎)가 즐겨 쓰는 ‘트래블 미스터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본격물 중에서도 가장 정격적인 장르에 도전한다는 게 왠지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이미 저는 읽기 전부터 아유카와에게 된통 당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도 이길까 말까 한 게 세상 이치인데, 작가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갖고서 독서에 임하였으니 작가와의 싸움에서 제가 이길 리가 만무하겠지요. 일단 처음부터 작가는 저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리라장의 주인이 자살을 했다는 책머리의 언급에서 죽은 집주인과 관련된 가문의 저주와 얽힌 사건이 아닐까 섣불리 예단을 했으나, 웬걸 갑자기 리라장이 학생들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숙소로 전락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더니 젊은 대학생들이 하나씩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건 뭐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게임’이나 긴다이치 하지메 류의 여름 캠프장 같은 느낌으로 급변하는 데야 어느 정도 단련된 저도 대경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런 식의 안이한(?) 접근법으로 괜히 좋은 배경만 망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섣부른 저의 판단은 여지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작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리라장’을 완벽한 본격 미스터리의 무대로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흡사 폭풍우가 몰아치듯 정신없이 튀어나오는 사건! 사건들! 이 작품이 52년 전에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요즘 나온 어줍잖은 신본격 미스터리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읽는 제가 현기증이 다 날 정도였습니다. 오랜 만에 보는 고전 미스터리라는 생각에 느긋하게 머리싸움이나 해야겠다는 저의 여유만만함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입니다.

더욱 분한 것은 작가가 대놓고 이것이 사건을 푸는 열쇠라는 것을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건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도 저는 도저히 그 해답을 모르겠더라는 거였습니다. 대부분의 소설들은 사건이 다 끝날 때쯤에는 범인이나 트릭에 대한 윤곽을 대충이라도 잡을 수 있는 법인데, 이 책은 용의자가 자꾸만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오히려 혼란만이 가중되어 가니 사람 참 미치겠두만요. 더구나 이 사건은 김전일 류의 소위 ‘클로즈드 서클’이 아니고 경찰이 버젓이 수사하고 있는 와중에도 사건이 벌어지는데도 경찰은 물론 읽는 저 역시도 사건의 진상을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트릭과 관련된 어떤 사실 하나만은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어떤 신본격 작가의 어떤 책에서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치 챘어야 했는데 잠깐 그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사건의 진상과 연결시킬만한 추리력은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부끄럽게 느껴지더군요. 아예 숟가락으로 밥을 떠줘도 먹질 못 하니 구제불능이라고 할 밖에요. 저의 추리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새삼 회의가 밀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독자가 충분히 밝혀낼 수 있을 만큼 공정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텐데요. 저로선 충분히 공정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단서를 떡밥으로 깔아놓으면서도 되도록 그게 단서라는 걸 숨기려고 애쓰는 것에 비해, 아유카와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 스스로 이게 단서라고 떳떳이 밝히고 있을 정도니까요. 약간 짐작하기 힘든 부분도 전혀 없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다른 작가에 비해 크게 언페어했다고 생각되진 않았습니다. 그저 깨끗하게 속아 넘어간 제 탓을 해야죠, 누굴 탓하겠습니까...

이 책의 사건은 역시 오니쓰라 경감과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누가 탐정 역을 맡을까 궁금해지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엔 탐정이 아주 늦게서야 등장하거나 편지나 전화로만 등장하는 작품들도 많기 때문에 더욱 맞추기가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이 책에는 명탐정 후보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패트리셔 맥거의 “탐정을 찾아라”를 보는 것처럼 개인적으론 누가 최종적인 사건 해결사인지를 맞추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누가 탐정이 될지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미리 읽으시면 안 되겠죠.

시공사 책들이 늘 그렇듯 이번에도 풍부한 작품 해설이 책말미에 덧붙여져서 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월광게임’을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아유카와 데쓰야는 신인작가들을 발굴하는데도 비상한 재주를 지녔었던 모양입니다. 작가 스스로 밝힌 일본 미스터리 문단의 뒷얘기들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오니쓰라 경감이 나오는 알리바이 깨기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 작품 ‘리라장 사건’ 같은 본격 미스터리에도 출중한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어 아유카와 데쓰야의 다른 작품들이 더욱 보고 싶어졌습니다. 앞으로 ‘검은 트렁크’ 같은 오니쓰라 경감의 대표작은 물론 ‘리라장 사건’ 풍의 다른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도 국내에 더욱 많이 소개되길 희망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호쾌한 본격 미스터리 걸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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