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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62년 8월 5일 미국의 영화배우 ‘마릴린 몬로’가 죽었다.
마릴린 몬로를 좋아한 30세 ‘다나카 가즈미치’란 남자, 남자는 일본도로 동네 주민에게 칼을 휘둘러 3명이 죽고 5명이 다치고 사건현장에 한 살의 여아가 살아남았다.
그는 왜 칼을 휘둘렀을까?
붉은 막대기처럼 보였다는 피에 젖은 ‘일본도’, 그리고 살아남은 한 살 여자아이.
난 책속으로 뛰어들어 주인공 ‘아카야마 리노’를 따라 간다.
‘리노’는 오늘 사촌오빠가 갑자기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사촌오빠 ‘도리이 나오토’는 ‘팬드럼’이란 밴드에서 키보드를 맡고 있고 친구 ‘오스기 마사야’와 공동 작곡도 하는 재능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촌오빠의 이유가 분명치 않은 자살.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난다.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의 타살, 그리고 할아버지가 키우던 나팔꽃 화분이 사라진다. 에도 시절에 있었다던 이제는 사라져 버린 ‘노란색 나팔꽃’. 이 나팔꽃 씨앗을 먹으면 환각 증세가 나타나므로 ‘몽환화’라고도 불린다.
몽환화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밀스런 일들. 거기에 관련된 사람은 한두명이 아니다. 사건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주인공 리노, 나도 리노의 뒤를 따른다.
나는 ‘리노’를 따라 도쿄의 거리로 나선다.
오모데 산도 거리의 카페에서 몽환화를 뒤쫓는 경찰관 ‘가모 요스케’를 만나고,
그 인연으로 ‘요스케’의 동생 ‘소타’도 만난다.
‘리노’와 ‘소타’는 사건의 중심에 떠오른 몽환화에 대한 같은 궁금증으로 뜻이 통한다.
둘은 진실을 찾아 함께 길을 나선다.
나도 그들을 따라 신주쿠, 시부야 지하철 역 그리고 시나가와, 요코하마까지 걷기도하고 지하철을 타기도 한다.
‘몽환화’에 얽힌 사건을 따라가자 뫼비우스의 띠처럼 붉은 깃발의 일본도를 든 ‘다나카 가즈미치’를 다시 만나게 되고, 새로운 진실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노란색 나팔꽃 ‘몽환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그리고 흥미를 가지고 읽을 독자를 위해 줄거리 소개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만드는 따뜻한 세상이다.
이번 <몽환화>도 예외는 아니다. 살해당한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는 정의로운 사람이고 그의 도움을 받은 형사 ‘하야세 료스케’는 사건 해결에 전력을 다하는 의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 ‘소타’와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인 형 ‘요스케’와의 관계에서 독자들은 인간의 궁극의 목표인 ‘따뜻하고 행복한 삶’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은 2011년 대지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 문제는 일본만이 아닌 세계적인 문제였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작가로서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원자력 문제를 ‘노란색 나팔꽃’을 쫓아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과 절묘하게 엮어서 <몽환화>에 담았다.
주인공 ‘소타’는 원자력 공학과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대지진 이후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는데,
<책 속에서, 75쪽>
“소타,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취직?”
소타의 물음에 후지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아버지는 원자력발전과 관계없는 회사에 들어가길 바라셔.”
“뭐, 지금은 그게 타당한 생각이겠지.”
후지무라는 차를 마시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애써 몇 년씩이나 원자력을 공부했는데 관계없는 회사에 들어가라고? 어쩐지 아깝다고 해야 하나 허무하다고 해야 하나, 받아들이기 힘들어.”
우동 정식을 다 먹은 소타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동감이지만 앞으로를 위해 필요한 생각이야. 세상 이미지가 너무 나빠. 예를 들어 결혼하려는데 여자 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써야 하고 태어난 아이가 따돌림을 겪는다면 견딜 수 있겠어?“
후지무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결국 얘기가 그렇게 되나?”
“우리가 속은 거야. 국민도 속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우리라고. 도대체 뭐가 꿈의 핵연료 사이클이냐! 꿈도 희망도 아니었어.” 소타가 내뱉듯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원자력과는 연을 끊겠다고?”
“당연하지!”
그러나 <하가시노 게이고>는 결말 부분에서, 일본에 만연해 있는 원자력 기피에 대해, 학교로 돌아간 주인공 ‘소타’의 입을 통해 일본이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
<책 속에서, 418쪽>
“결론부터 애기하자면 계속하기로 했어” 소타가 말했다.
“계속해? 뭘?”
“물론 연구지. 나는 평생 원자력을 연구할 거야.”
후지무라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정말?”
“응, 정말.”
“무슨 소리야? 장래성이 없다고 전에 말했잖아.”
후지무라는 몸을 웅크리듯 팔짱을 꼈다.
“2030년에 가동하는 원자력 발전소가 제로가 된다고 햐도 원자력 발전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폐로문제는 그대로 남아. 게다가 오십 기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대량의 폐연료봉이 보관되어 있는 상태겠지.”
“그야......그렇지.” 후지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집은 방치하면 폐가가 돼. 하지만 원자력 발전은 달라. 방치한다고 저절로 페로가 되는게 아니야. 이를테면 발전을 중지해도 엄중하게 관리하고 신중하게 폐로 절차를 밟아야 해.
-중략-
“실질적으로 이 나라는 이제 원자력발전에서 도망칠 수 없어. 그런 무서운 선택을 수십 년 전에 이미 내려버린 거야.“
-중략-
“네가 얘기하는 바는 알겠는데 그거, 엄청 배고플 거야.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시선도 받아야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게 돼”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냥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탄탄한 구조와 사건위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궁금증이 가속도가 붙어 단숨에 읽어나가게 만든다. 넓은 강물이 거칠 것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시원스럽다.
하지만 너무 빨리 지나와 버려 남는 아쉬움.
일사천리로 전개되는 그의 이야기를 물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는 굽이 없고 경계 없는 넓은 강물처럼 흘러만 갔다. 너무나 잘 흘러가기만 해서 요란한 소리로 떨어지는 폭포의 장쾌함을 맛볼 수도, 깊숙한 계곡을 흘러가는 아름다운 물소리와 빛깔을 느낄 수도 없었다는 것.
감상이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주인공 ‘소타’의 첫사랑 정도랄까....
아님 내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심각한 사랑의 삼각관계를 기대했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욕심을 내자면 그런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
물론 ‘감상’에 젖기를 원한다면 그런 소설을 찾아 읽으면 되지 않느냐는 비난이 예측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게 인간의 심리인 모양이다. 김연아에게 끊임없이 기대와 염원을 품고 있었듯이 말이다. 원래 ‘기대’란 감정은 ‘능력자’에게 품는 감정이 아니던가. 좋아하고 능력 있는 작가에게 ‘기대’를 하고,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도 사랑의 한 방법이라면, 그런 사랑을 누구를 향해 품어볼 것인가.
히가시노를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내 심정을 이해해줄 것 같다.
내가 그를 무척 사랑하는 독자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