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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꿈결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6월
평점 :
활화산처럼 뜨겁게 주목받는 것이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휴화산으로 담담히 우리 기억에 사장된다.
그러나
여기, 멈춤이
없는 화산이 있다.
꿈결
출판사의‘꿈결
클래식 시리즈’1번으로
새롭게 번역된 <데미안>!
새 번역본
<데미안>을 다시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맨 처음
<데미안>을 접했던
시절.
<데미안>은 그
시절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읽은 <데미안>이 주는
감동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감동의
내용은 다소 달라졌지만 화산처럼 가슴을 뜨겁게 하는 열기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00년
전,
헤르만
헤세가 살았던 시대,
그 시대의
언어와 사회가 배경이 된 소설.
그리고
청춘시절의 <데미안>이 주었던
감동.
그리고
지금의 이 강렬한 느낌.
나는
여전한 감동으로 가슴이 뜨겁다.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정신이 나를 흔들고 있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젊다고
밖에 할 수 없던 시절,
흔히
청춘이라고 부르던 그 때,
알 수
없는 미래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보장된 미래가 없고,
뚜렷한
확신과 방향도 없이 방황하던 대학 시절에 처음으로 <데미안>을
읽었다.
감동을
받은 기억은 있지만 내용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당시,
나는 그
구절 하나로 나의 불안을 알아챘고,
알을
깨뜨리는 용기로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다.
주는
메시지는 달라졌지만 <데미안>은 여전히
활화산이다.
청춘
시절에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안주’라는
‘알’을
깨뜨리는 용기를 주었다면 지금은 ‘인간
성찰’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알’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선과 악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를
믿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선과 악의 본성 중에서 선을 강조 한다.
중세를
넘어서 헤세가 살았던 20세기 초의
유럽도 신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기독교의 억압이 여전하였고 그러면서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신뢰하는 세계관도 자리 잡아 두 개의 세계관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엄격한 개신교 가정에서,
강압적인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성품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부적합했다.
따르지
않으면 상처가 되었을 흑백논리의 융통성 없는 세계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인간적 해방을 추구하는 그의 기질과는 너무나 다른 사회 분위기.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 고통을 아프게 느낄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의 어두운 터널.
그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마침내 밝은 세상을 마주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두운
터널’의 아픔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 탄생을 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필명을 ‘에밀
싱클레어’로 바꾸어
발표한 소설 <데미안>이다.
<데미안>의
주인공‘에밀
싱클레어’를
통해
그는 당시
기독교적 가치관과 그 세계가 요구하는 질서에 대해서,
그 질서가
요구하는 자연스럽지 못한,
우주의
섭리에 위배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금지된 세계의 욕망과 그 두려움과 매혹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방황,
신과의
합일 과정,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에 대하여,
군더더기
없이,
시대를
관통하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우리에게
웅변한 셈이다.
***
내게
용기를 주었던 문장!
“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는 신이 허용한 선의 세계 속에서 안전한 어린양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금지된,
그러나
강렬한 유혹에 이끌리는 소위 악으로 규정된 다른 세계가 신이 허용한 선의 세계와 동일한 것으로 깨닫고 인정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동시에 신을 벗어나 자아를 회복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자아를
회복한 싱클레어는 자신의 인도자 친구인 ‘데미안’에
이르고자 끊임없이 ‘내면의
길’을
찾아다니고 마지막 데미안이 곧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264쪽
“싱클레어”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말을 알아들었다는 눈짓을 보냈다.
그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연민에
찬 미소였다.
“꼬마야!”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의
입은 내입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프란츠
크로머를 지금도 기억하니?”
그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는 뜻의 눈짓을 했고,
미소도
지어 보일 수 이었다.
“꼬마
싱클레어,
내말
잘 들어!
나는
떠나야 할 거야.
언제가
프란츠나 그 밖의 다른 일로 다시금 내가 필요할지도 몰라.
그땐
나를 부르면 말이나 기차를 타고서 단번에 달려오진 못할 거야.
그러면 너는 네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 게 될 거야.
알겠니?
한
가지 더!
에바 부인이 내게 입맞춤하고는 말했어.
너한테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내가
받은 키스를 네게도 나눠 주라고...
싱클레어,
눈을
감아!”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멈출 기미 없이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내 입술 위로 누군가 가볍게 입맞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누군가 나를 깨웠다.
붕대를
감기 위해서였다.
가까스로
잠을 깬 나는 얼른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싱클레어가
걸어가는 내면의 길에 동참하면서,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수많은 가치관을 서로 나타내고 얽혀있는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이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가 인간 내면에 들어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내면에 깃든 선과 악을 사용하는 주된 자가 나란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의
유전인자에 들어있는 불교철학과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을 배운
나에게는 외부의 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 <데미안>의
싱클레어의 깨달음은 어렵지 않게 와 닿았다.
그리고
어떤 종교를 가졌던 간에,
사실,
신(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같다는 생각도 하게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를 내려본다.
<싱클레어의
친구이자 인도자인‘데미안’은 사실
싱클레어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이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은
성모마리아다.>
라고.
물론
헤세가 정의한 신의 모습과 마리아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