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도시의 역사로 보는 인류문명사
벤 윌슨 지음, 박수철 옮김, 박진빈 감수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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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수메르인이 남긴 작품 <길가메시 서사시>. 여기에 등장하는 엔키두는 원시적 자연 상태의 인간을 대변한다. 그는 황야의 자유로움과 도시의 부자연스러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가 사랑한 샤마트는 세련된 도시 문화의 화신이다. 고대 서사시에서조차 앞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맞닥뜨려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예고하는 듯 하다. 문명인가, 자연인가.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으며,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우루크에서부터 시작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로마, 뤼벡, 리스본, 런던, 맨체스터와 시카고, 파리, 뉴욕, 바르샤바 등을 거쳐 라고스까지 이르는 거대한 여정에서 짐작할 수 있다. 도시별로 바라보는 인류의 흥망성쇠.

 

기원전 3,000년 경 전성기를 누리던 우르크는 '도시'의 대명사다. 세계 최초의 도시였고, 1,00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심으로 군림했다. 기후 변화를 거쳐 기존의 생존방식이 통하지 않자 습지대의 농부들은 우루크로 몰려들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건축이나 공학과 관련한 오랜 전통을 지속시켜온 인구집단은 기후변화를 극복, 농업혁명을 이끌어냈고, 우루크의 격렬한 역동성과 고속성장은 우루크가 교역의 발상지 역할을 맡은 데서 비롯되었다. 도시에서는 농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직업이 생겼고, 문자와 화폐체계가 생겨났으며, 갖가지 발명품이 등장한다. 막강했던 우루크는 또다시 다가오는 기후변화와 야만인들의 습격으로 쇠퇴해갔고, 결국 폐허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등장하는 이상적 대도시. 타락한 도덕성과 성적 욕망을 부추긴 도시 바빌론의 등장. 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며, 인간들과 한데 어울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고대의 사람들은 깨닫고 있었을까.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가 거둔 놀라운 성공은 대부분 외부적 영향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자유민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외국 태생이라는 점 덕분이었다. 그리스의 도시 문명, 특히 아테네인들이 그토록 진취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은 뱃사람에 의한 도시화 때문이었다. 그리스 사회의 핵심은 폴리스였다. 폴리스는 도시 환경 속에서 조직된 자유(남성) 시민들의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경제적 공동체였다. 그리스인들의 관점에서 도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였고,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었다. 그리스인의 정체성에는 도시 생활을 둘러싼 강한 흥미, 권위에 속박된 삶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개인적 독립을 중시하는 경향이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폴리스를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며 스스로를 야만인보다 더 자유롭고 인간다운 존재로 인식했고,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며, 도시 거주라는 생활방식도 공유했다.

 

아테네의 불규칙적인 외곽선과 개방적인 문화는 길거리에서 토론과 논쟁이 가능하게 했다. 반면 거리가 합리적이고 직선적으로 설계된 알렉산드리아는 엄격하게 관리된 곳으로, 관념이나 사상이 도시 생활과 유리된 채 제도 속에 갇혀 있던 곳이었다. 아테네는 자발적이고 실험적, 알렉산드리아는 백과사전적이고 순응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는 철학과 정치학, 연극 분야에서, 알렉산드리아는 과학, 수학, 기하학, 역학, 의학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문명 충돌이 허용되고 장려되었던 알렉산드리아. 후에 이곳의 이국적 분위기는 로마를 불러들인다.

 

목욕탕을 통해 바라본 로마의 쾌락적인 문화사를 지나, 다채로운 식도락의 향연을 보여준 바그다드를 거쳐, 자유도시의 모범사례인 뤼벡을 만난다. 뤼벡은 효율적이고, 번창하고, 무장을 갖춘 소규모 자치적 독립체제인 '자유 도시'의 가장 훌륭한 사례다. 자유 도시는 유럽이 세계의 지배적 위치에 오르는 데 필요한 토대가 되었다. 뤼벡은 나무와 흙으로 지은 하나의 성채였다. 화재로 불에탔던 예전의 '읍'은 2년 뒤 하인리히 사자공에 의해 재건되었다. 성전과 도시 건설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서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은 새로 건설된 도시들을 정복과 개종, 식민지 개척 활동을 펼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고, 하인리히 사자공은 그런 이들에게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했다. 지도자들은 독자적 입법권과 자치권을 확보했고, 사절단을 파견해 상인들에게 통행세 없이 뤼벡에 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후 한자동맹으로 인해 무역이 발달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곧장 동아시아로 갈 수 있는 항로가 개척됨에 따라 유럽인들에게 방대한 시장이 새로 열렸고, 암스테르담이라는 신흥 도시의 등장으로 귀벡의 무역 패권이 무너졌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도시는 역시 파리다. 내가 파리에 갔어도 역시 '파리 증후군'에 시달렸을까. 낭만적이고 이상화된 도시인 파리를 동경했지만, 냉담한 현지인들과 붐비는 대로, 불결한 지하철역과 무례한 웨이터들 때문에 겪는 '정신적 붕괴', 파리 증후군. 예리한 품평가, 도시의 인파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사람들과 동떨어진 채 도시를 탐색하는 은밀하고 초연한 관찰자인 '플라뇌르'.어떤 도시에 존재하든 '플라뇌르'는 내가 그리는 이상향이자, 도시를 걸어다니는 것은 그 도시를 더 잘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될 것이다.

 

가장 마음 아팠고 가장 감동받은 도시는 '바르샤바'다. 바르샤바에서 자행되었던 그 모든 잔혹한 행동들. 중요한 것은 그런 총체적 파괴의 현장에서도 삶의 자취는 남아 있었다는 것. 사람들이 돌아오자 도시는 다시 살아난다. 안타까운 것은 유럽 도시들의 모습이 전쟁과 전후의 이상주의 물결에 의해 전혀 딴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용케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건물들이 불도저에 밀려 사라진다.

 

교외로 평창하는 도시의 역사 로스앤젤레스, 마천루가 드리워진 뉴욕, 역동성으로 꿈틀대는 미래도시 라고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미래도시'의 이미지는 '미래'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기 쉬운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저자는 라고스, 뭄바이, 마닐라, 다카, 리우 같은 도시들의 빈민가를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인간 생태계로 꼽았다. 생존은 인간 생태계에 달려있다면서. 라고스의 피상적 혼돈 상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와 창의성이 분출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인간의 생명력과 적응력, 그리고 도시와의 화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어떤 환경이 닥치든 인류는 해결책을 찾아내 그 환경에 적응하며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결코 쉬운 독서는 아니었지만, 이제 도시를 더 이상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그 무언가로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도시를 중심으로 바라본 인류의 역사. 마치 긴 꿈을 꾼 듯, 아주 오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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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인 볼가강의 영혼 클래식 클라우드 27
정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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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의 숨은 걸작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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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맞지 않는 아르테 미스터리 18
구로사와 이즈미 지음, 현숙형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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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난데없이 발병하기 시작한 기이한 병.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리는 이 병은 '이형성 변이 증후군'이라 불리며 젊은 층을 대상으로 급격히 퍼져 나간다. 불가사의한 점은 젊은 층 중에서도 직장인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이들은 이 병과 무관하다는 것. 오직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족이라 불리는 부류에서만 발병한다는 것이다. 변이된 이형의 모습이 하나같이 흉측해서 환자를 혐오하고 돌보기를 포기하는 가족들이 끊이지 않았다. 엉겁결에 환자를 폭행해서 결과적으로 죽이고 마는 비극적인 사례도 보고되면서 가해자 측의 정신 쇠약도 인정되기 시작한다. 결국 정부는 사람이 이형으로 변한 순간부터 사망 신고를 할 수 있게 조치했고, 이후 '변이자'는 두 번 다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했다.

 

어느 날은 아들 유이치가 저렇게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미하루는 줄곧 생각했었다. 갑자기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에 틀어박혀버린 아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명확한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아들의 칩거는 시작되었고, 그 후 미하루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아들이 언제 변할 지 모르는 두려움을 마주하기보다는 피하려 했던 미하루는, 결국 '벌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유이치를 맞닥뜨린다.

 

소중한 아들이 방에 틀어박힌다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한데, 그런 아들이 '벌레'로 변해버린다니! 생각도 하기 싫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마음으로 아들과 마주하게 될까. 변해버린 유이치를 발견한 미하루가 처음 느낀 감정은 생리적인 혐오감이었다. 말 그대로 징그러운 벌레를 보고 피하거나 내다버리거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의 기분. 남편 이사오는 당연하다는 듯이 서둘러 아들의 사망신고를 수리하고, 미하루에게 저 '벌레'를 갖다버리자고 제안한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아들을 향한 사랑이 이미 예전에 말라버렸다지만, 그는 유이치를 향해 거리낌없이 '쓰레기'라고 지칭하면서, 그런 '쓰레기'를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찬스라고 미하루를 설득한다. '쓰레기'라니.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솟구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래도 미하루에게는 아직 유이치를 향한 애정이 남아있었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 흉측하게 변해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유이치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그렇게 간단히 버릴 수는 없다! 결국 이사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하루는 유이치를 돌보기로 결심하고, 똑같은 증상으로 시달리는 가족들이 모인 물방울회에 가입한다. 그 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통해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었다.

 

육아란, 늘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나'를 잊어야만 하는 날들이 계속될 때도 있고,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지 못해 고함을 치는 날도 있다. 지금이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는 '보육'의 날들이지만, 아이가 조금 더 커서 '학습'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의 엄마로 자리하고 있을까. 결국 돌고돌아 결심한 한 가지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튼튼하고 건강하게' 커주기를 바랐던 그 마음을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전부였으므로. 너무 큰 욕심을 갖지 말자고 내 자신을 다독여본다. 그리고 하나만 더. 아이가 '내가 엄마'라는 것이 힘들지 않기를, 다른 누구보다도 아이가 '엄마가 내 엄마여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자고도 결심했다. 여러 가정에서 변해버린 아이를 다루는 모습을 읽어나가면서 그 어떤 육아서를 읽을 때보다 더 깊이 아이의 존재와 나의 육아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한 번 잡았더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은 자리에서 내리 읽어버렸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했더니만 결말 부분에서 진행되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깜짝 놀라기도. 재미와 작품성 모두 훌륭한 소설!

 

**출판사 <아르테>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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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충동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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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조학교에서 주3일 스쿨 카운셀러로 근무하는 오쿠누키 지하야에게 노즈 아키나리라는 소년이 '순수한' 살인 충동을 고백해온다. 교내에서 일어난 염소 상해 사건도 자신이 한 짓이며, '죽여 마땅한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키나리. 그는 이성을 잃은 무차별 살인마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고 담담하게 꿰뚫고 있는 이상적인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마침 지하야가 사는 곳 근처에 16년 전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이리이치 가나메가 터를 잡는다. 절대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민들과, 대학에서 '포용과 공생에 이르는 심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지하야. 과연 진정한 '받아들임'이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주변 어른들과 친구, 반 아이들이 최대한 따뜻이 받아주는 것. 저는 그것이 진정한 반성과 갱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요.

P 25

이론적으로는 지하야의 의견에 동의했다. 동의했었다.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가 정해진 형량을 다 채웠고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한다면, 두 번째 기회를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지하야의 은사인 데라카네 교수가 자신의 책 [이단의 꽃]에서 던진 질문에 나는 역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받아들인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동을 살해한 사람이 사회에 복귀했을 때 과연 그에게 베이비시터를 맡길 수 있을까요?'. 이 문장을 본 순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올라온다. 소중한 아이들을 그런 사람에게 맡긴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길하게 여겨질 정도. 결국 지하야가 원하는 길은 이렇게나 힘들고 이상론적인 이야기로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지하야는 아키나리와 이리이치에게 '필사적'이다. 어떻게든 소년을 도와주고 싶어하고 '받아들이고' 싶어하며, 다른 주민들은 모두 두려워하는 데 반해 지하야만큼은 이리이치를 향한 태도 또한 긍정적이었다. 왜 이리 한 길만 고집하는가. 어떤 믿음을 근거로 사회가 이리이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밖에. 지하야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이리이치와 가나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또 다른 이웃과 사회를 받아들인다는 것, 언젠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남편 노리후미를 받아들인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는 같은가, 다른가.

지하야가 말하는 '하얀 충동'의 정체를 깨닫고,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버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혹은 그 자부심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나 많은 약속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가. 그 하얀색이 유지되는 사람과 더럽혀지는 사람의 차이는, 마지막까지도 그 사람의 손을 놓지 않는 또다른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런지.

 

작품을 읽은 지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 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읽는 내내 거센 파도처럼 일렁였던 가슴에 남은 것은 그저 먹먹함. 마지막으로 머리에 남은 의문은 '우리 사회가 떠안은 악'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존재'가 향하는 방향에 대해서였다. 지하야가 애초에 기록으로 남긴 '고찰은 끝났다. 나는 이제 그저 기도할 뿐이다'라는 문장이 아키나리를 향한 것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의 나를 향한, 간절한 기도.

 

이 작가님, 어떻게 이런 글을 쓰시나. 리뷰가 의미가 없다. 그저 추천할 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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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이성과 감성으로 과학과 예술을 통섭하다, 개정증보판 미술관에 간 지식인
전창림 지음 / 어바웃어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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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술관련 서적을 연달아 몇 권 읽었더니 제목과 화가의 이름만 들어도 몇 작품 정도는 저절로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에게 느끼는 뿌듯함. 으쓱으쓱. 보통의 미술책은 그림과 그에 관한 시대적 배경, 화가가 그림을 그릴 당시의 상황 등에 대해 설명해준다면, 이 <미술관에 간 지식인>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의 시각에서 그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학, 의학, 수학, 물리학. 학창시절 자연계와 관련된 분야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터라 늘 고생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시험과 관련 없이, 게다가 좋아하는 그림과 연관지어 접하다보니 흥미가 생긴다. 학교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이렇게 사용되는 걸 들여다보니, 내가 무지해서 몰랐을 뿐 전혀 '쓸 데 없는' 학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리즈 중 처음으로 읽은 책은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사를 뒤흔든 거장들의 작품이 화학자의 시각에서 재탄생되는 신비로운 경험! 과학 과목 중 그나마 화학은 쉽게 느껴져서 열심히 했었는데(물론 지금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책에 실린 설명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닌지라 더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다. 다만, 그 몰입의 시간이 너무 과해서인지 왜 이리 책 한권을 읽어내기가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 페이지마다 밑줄이 넘쳐난다.

 

그 중 인상깊은 작품들 몇 개를 소개해보자면, 먼저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서쪽 벽에 그린 <최후의 심판>. 6년의 작업 끝에 1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에 391명의 육체들을 그려낸 이 작품에는 예수 바로 곁에 고개 숙인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는데, 치마를 '울트라마린'이라는 염료를 사용하여 칠한 것으로 추정된다. 울트라마린의 어원은 '바다', '멀리'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료는 청금석, 황금 다음으로 비쌌다. <그리스도의 매장> 오른쪽 하단에는 누군가를 그려넣기 위해 빈자리를 남겨 놓았는데,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 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성모 마리아를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파란색 울트라마린 안료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이 '울트라마린'이라는 염료는 책을 읽다보면 여러 번 등장하는 염료 중 하나다.

 

이전의 그림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화려한 색채와 살아 있는 것 같은 표현의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유화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이크의 이 작품은 식물성 불포화지방산인 아마인유를 이용하여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정교한 붓질이 가능한 유화 기법을 완성하였다. 불포화지방산은 지방산 사슬 중에 불포화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녹는점이 낮아 상온에서 액체 상태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포화기가 가교결합을 하며 굳어져 단단한 도막을 형성하는데, 이 점을 그림물감에 이용한 것. 특히 신부 드레스를 칠한 녹색이 눈을 끄는데, 이 녹색은 말라카이트 그린이라는 성분으로, 구리 광맥 속에서 가끔 출토되는 구리 리간드의 구리 카보네이트다. kg당 100만원이 넘는 고가의 안료를 화면의 넓은 부분에 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의 의뢰인은 대단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작품들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 중 김홍도에 비해 비교적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았던 신윤복의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서민들의 생활을 주로 그린 김홍도와는 달리 양반과 기녀 간의 애정사를 주로 그렸고,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색채의 달인이었다. 신윤복 이전까지 조선의 그림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그린 적이 없었고 여인의 심리상태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조선의 미인도는 이상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기려는 목적으로 그려졌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작품 중 색채 구사가 잘 되어 있다는<미인도>. 치마의 옥색과 속치마 고름의 붉은 색이 눈에 띤다. 특히 이 붉은 색은 진사라는 광물에서 얻어지는 주(朱) 색인데 황화수은으로서 독성이 매우 강하지만 변색이 잘 안되고 색이 아름다워 오랫동안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서양의 버밀리온이 바로 이 색이다.

 

한국화에 있어서 수묵화와 채색화의 차이도 이번에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한국화에서는 수묵화는 먹으로만 단색으로 그린 그림, 채색화는 색을 칠한 그림 등으로 단순하게 나누지 않는다. 수묵화와 채색화의 구분은 채색 기법에 따른 것이다. 수묵화 기법은 종이나 비단에 물감이 스며들게 하는 기법으로, 일반적인 한국화의 산수화가 이에 속한다. 채색화는 종이에 아교를 먹여 물감이 스며들지 못하게 준비 작업을 하고 세필붓을 사용하여 물감을 표면에 부착시키는 방식으로 그린다. 여러 색이 보이는 수묵화가 있을 수 있고, 단색으로 그린 채색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이 외에도 김홍도의 풍속화에 담겨 있는 '입체이성질체', 왜상기법이 사용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생각보다 많은 그림들 속에 숨어 있는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 드가와 페르메이르 등 다른 거장들의 작품도 색다른 시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으로 예술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들. <미술관에 간 지식인> 시리즈에 화학편만 두 권인데, 저자가 들려줄 다른 화학 이야기도 기대된다. 일단은 [미술관에 간 의학자] 부터 먼저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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