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
김지수 지음 / PageOne(페이지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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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곤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 원작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해석된 의미에 맞추어 문제를 풀어야 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문제를 맞추어야 하는 기묘한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을 이제서야 수줍게 고백할 수 있게 된 저로서는, 시는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들이, 이 가을에 비로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는 것처럼, 시가 저에게 다가온 지금이, 바로 시와 제가 친밀함을 느끼게 될 적정시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직까지 어느 한 작가의 시를 몰두해서 읽을 용기는 나지 않아 고심 끝에 고른 책이 바로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입니다. 여러 작가의 시를 두루 만나볼 수 있다는 점과 '가난하다'와 '사치'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사진이 포착해내는 것처럼, 시인들은 단어로 그 순간을 포착해내는 거겠죠. 시와 더불어 김지수님의 잔잔한 글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김지수님의 글을 통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또 어떤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납니다.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

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

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

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서정주 시인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드물다-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한 국어 선생님의 의견이었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는 평소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고운 시를 쓰는 사람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참 안타깝습니다. <신부>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에서 발견한 순간, 그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죠.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련함, 슬픔, 고통, 분노가 아니라 깊은 해학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 작품도 있었습니다.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얼마나 놀라운 실수인가!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해서 '부부'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이 시를 읽는 순간,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더라구요.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라는 시와 <부부>라는 시도 꼭 한 번 찾아 읽어보고 싶네요.

 

이 외에도 정윤천 시인의 <천천히 와>, 신현림 시인의 <침대를 타고 달렸어>, 마종기 시인의 <전화>가 마음에 들었어요. 얼마 전 한 예능프로에서도 남자들이 시를 짓고 있던데, 그러고보면 우리의 모든 순간순간은 위대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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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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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슈테판 츠바이크의 장편소설입니다. 뛰어난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이기에 소설을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연민]이후 읽게 된 이 작품은, 그 평이 어떻든 반가울 따름입니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의 황홀한 표정만 보면 주인공 크리스티네가 얼마나 변신에 도취해 있었는지 그 기쁨과 열락을 표현한 소설이라 오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요, 이 작품은 전쟁이 끝난 후 변신에 도취했던 크리스티네가 그 변신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지를 밀도있게 그려낸 심리소설이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우체국에서 일하는 크리스티네. 그녀는 전쟁 중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고 병을 앓는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스물 여덟의 아가씨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우체국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각에 퇴근하고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죠.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는 이모 클레르가 스위스로 여행을 왔다며 자신과 남편을 보러 오라는 초대의 편지를 보냅니다. 몇십 년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낼 수 있었던 크리스티네의 삶은 이모를 만나는 순간 급격하게 변화하죠.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명랑쾌활해지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진정한 삶은 이런 것이라 느꼈던 시간들. 그러나 변화의 시간은 꿈처럼 끝나버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자리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어머니의 무덤가입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네가 스위스에 도착해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된 순간부터 빛을 발합니다. 특히 꿈같은 시간을 뒤로 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해 어울리던 무리의 어떤 독일남자에게 매달리는 순간의 대사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크리스티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쁜 드레스, 맛있는 음식, 솜털같은 이불과 편안한 잠자리, 지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일상, 유쾌한 사람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남자들.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병든 어머니와 초라한 집, 단조로운 업무가 기다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전해들은 크리스티네의 절망이 생생히 느껴져요.

 


 당신과 함께 갈래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우리 함께 떠나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고향에는 죽어도 가기 싫어요. 못 견디겠어요. 어디든지 가요.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언제까지라도!...내일은 안 돼요, 내일 아침에 나는 떠나야 해요. 그 분들은 저를 쫓아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소포처럼, 우편물처럼...그렇게 가기는 싫어요. 싫어요!...저를 데려가세요. 지금 당장. 도와줘요. 더는 견딜 수 없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크리스티네의 마음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전같을 수 없겠죠. 자신이 전쟁 때문에 포기하고 살았던 것, 자신이 놓치고 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누리고 사는지 보아 버렸으니까요. 지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것인지 느껴버렸으니까요. 그런 그녀 앞에 페르디난트라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귀향했지만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서글픈 삶. 남자가 토해내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에 대한 내면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어떤 의사도 6년간의 젊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어. 누가 내 젊음을 보상해주지? 국가가? 그 고위층 사기꾼들이? 그 고위층 도둑놈들이? 40명이나 되는 장관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대봐. 법무부 장관? 복지부 장관? 산자부 장관? 공정하게, 사리사욕 없이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급 공무원이 있으면 단 한명이라도 이름을 대봐.

남자가 토해내는 현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한탄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했다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유대인인 작가의 마음이 녹아들어있는 듯 해 한층 생생하게 다가오죠. 이런 상황 속에서는 두 남녀가 느끼는 끌림은 절망의 또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는 그런 두 남녀가 우체국 강도를 계획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이게 진정 끝인가 싶을 정도로 갑자기 끝나는 느낌이 강한데요, 츠바이크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한다는 점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페르디난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야 할 때뿐 아니라 스스로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유일하게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다-를 실천이라도 하듯 1942년 부인과 함께 약물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의 욕망,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서글픈 현실을 감각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 자신도 결국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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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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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리노 여사의 히로인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어둠(?)의 기운이 가장 충만하다는 [다크]를 제외하고는 미로 시리즈를 전부 읽었는데요, 사실 조금씩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줄곧 받아왔답니다. 어떤 때는 분위기가 그랬고, 어떤 때는 스토리라인이 그랬어요. 완벽한 만족감을 주지 않는 미로이기에 자꾸 읽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왕이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로즈 가든]에서는 표제작인 <로즈 가든>에서 아버지 무라노 젠조와 미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지만, 내용 상으로는 조금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로즈 가든>의 주인공은 그 동안 살짝살짝 공개돼 왔던 미로의 남편 히로오입니다. 고교시절 만난 히로오와 미로의 관계, 미로와 젠조의 관계가 히로오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분위기상으로 아주 끈적끈적한 것이, 몽환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이기도 해서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내용들로 아리송하기도 하면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안개에 가린 것처럼 묘사되어 답답한 느낌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 성인 미로와 연결하기 쉽지 않은 학생 미로의 분위기인지라, 어쩌면 이것이 <다크>의 미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그동안 궁금했던, 자살한 히로오의 어두운 심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표류하는 영혼>은 현재의 미로가 사는 맨션에서 가네코라는 사람이 죽은 후의 유령소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령의 정체와 맨션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일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의뢰를 받은 미로가, 맨션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악의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랄까요. '유령'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음습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가 메마르고 무서운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 같아 섬뜩했습니다. 결론이 조금 허술하다는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입니다.

 

<혼자 두지 말아요>는 감성적인 제목만큼이나 감성적인 러브스토리라면 참 좋았을텐데, 역시 미로의 세상에는 해피해피 사랑이야기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상하이 클럽에서 일하는 중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미로에게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달라는 기이한 의뢰를 들고 찾아오지만, 얼마 후 그 남자는 살해당합니다. 뒤늦게 그의 의뢰를 받아들인 미로는 잔혹하면서도 슬픈 진실에 다가서는데요, 이 단편의 또 다른 매력은 그녀가 조사하는 다른 여자입니다. 바람을 의심받는 의뢰인의 아내. 그녀와 관계된 내용들도 평범하지는 않지만 뭐랄까, 거부감도 들지 않고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예뻐(?)보이기도 하는 것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실린 <사랑의 터널>은 한 아버지의 의뢰로 시작됩니다. 도쿄에서 성실하게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믿었던 딸이 어느 날 사고로 사망하는데, 그녀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가 미로에게 그 뒷처리를 부탁하죠.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그녀의 비밀. 그리고 숨겨져 있던 사고의 진상과 음습하게 가려져있던 인간의 헛된 욕망, 무서운 집념, 잔혹한 마음들이 드러나면서 <로즈 가든>과는 다른 끈적함을 선사(?)합니다. 기본적으로 읽기 편안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다크]를 제외한 미로 시리즈를 읽으면서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어둠의 기운이 낮아 안심했었는데, [로즈 가든]은 그 수위가 한 단계 올라갔다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마음과 끝없는 욕망, 그리고 집착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들에 독서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답니다. 어쩌겠어요, 취향인 것을. 다만, 이런 마음들을 묘사할 줄 아는 기리노 여사의 마음에는 어떤 구멍이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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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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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는 오늘 동생과 다퉜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퉜다기보다 제가 일방적으로 동생을 삐지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니고 너무 치사스런 일이라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창피하지만, 제가 요즘 무척 예민해져 있는 데다가 여기저기 몸도 안 좋아서 저기압인 상태였다-고 하면 변명일까요. 결국 동생은 저녁도 안 먹고 수원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버렸는데요, 외출하셨던 부모님이 밥도 안 먹고 갔다고 어찌나 서운해하시는지요. 무슨 일이 있나, 서운하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내가 치사하게 굴어서 삐졌다!'고는 차마 말도 못하고, 따끔따끔 속이 찔려서 심장이 벌렁벌렁하다가, 결국 미안하다고 먼저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청 서운한 모양인지 답문도 없네요, 흑흑. 지금 상태로는 앞으로는 절대 동생과 다투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제가 앞으로 동생과-가볍게라도-다투는 일이 없을지, 저조차도 의심이 들어요.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동생과 다투느냐고 하시면, 쩝, 할 말은 없지만 저희 집 식구들의 성격이 워낙 불같고 직접적이라 마음 여린 저도 나름 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를 위한 공격을 할 때가 있거든요. 요즘 라디오에서 '당신은 밖에서의 행동과 안에서의 행동이 다르십니까' 가 주제인 광고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저는 그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밖의 사람들과 안의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안의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이 더 좋아야 하겠지만, 가끔 우리는 남에게는 관대한 일도 가족에게는 그렇지 못한 적도 있잖아요. 밖의 사람에게는 이미지도 지켜야 하고 이것저것 따져서 행동해야 할 때도 있지만, 가족을 상대로는 감정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 좋은 말과 행동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는 생각합니다. 가족이니까요.

 

하지만.

 

이 '가족'이라는 게 참 어렵습니다. 애증의 관계죠, 애증. 전 이것보다 가족의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사랑의 감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위에 미움과 증오가 쌓일 때도 있으니까요. 그 미움과 증오가 어떤 가족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가족에게는 순간뿐인 감정이 되기도 하겠죠. 분명한 하나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우리가 가족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그런 말 자주 하잖아요. 엄마가 날 다 알아?, 당신이 내 마음을 다 알아? 같은.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가족'이 주제입니다. 친구가 자살한 후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 반, 보호하려는 마음 1/4, 감시하려는 마음 1/4이 더해져, 아들의 컴퓨터에 기록을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바이 부부. 신장이식을 해야 하는 아들을 둔 로리먼 부부. 아들이 자살한 힐 부부. 이야기는 이런 다양한 가족들 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자를 납치해서 잔인하게 살해하는 범인,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려는 경찰들의 이야기가 버무려져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대체 이 사람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게 될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읽어나가다보면 결국 접점을 갖게 되고 하나로 모아지죠.

 

사실 [아들의 방]은 제가 지금까지 읽어온 할런 코벤의 작품과는 조금 달라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 반전의 자리를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속도감과 스릴은 기존의 작품에 비해 떨어지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들의 삶이 과연 '가족'이라서 행복한지 등을 생각하게 해주죠.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타당한 것인지,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인지, 아이들을 키울 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고 할까요. 때문에 평소보다 좀 더 꼼꼼하게 읽어나갔답니다.

 

작가는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강아지가 새장에 갇혀 있다가 날개달고 날아가는 표지도 그렇고, 바이 부부가 인터넷 상에서 아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한 그 선택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세요. 그리고 로리먼 부부, 특히 아내인 수전이 간직한 비밀을 남편이 끝까지 모르게 진행된 전개과정은 암묵적으로 앞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힐 부부 같은 사람들은 어쩌면 아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면 그 아이가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서 하나의 주체인 아이들의 순간순간의 선택까지 부모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닐테니까요. 참 어렵습니다, 가족은.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마치 원으로 연결된 것처럼 설정된 것은 좀 억지스럽고, 여자들을 납치해서 잔인하게 폭행하는 사이코패스의 등장은 개인적으로 미스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는. 할런 코벤의 작품스럽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할런 코벤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주제로,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전개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과 사이좋게 지내세요. 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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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차일드
팀 보울러 지음, 나현영 옮김 / 살림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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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미스터리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입니다. 이로써 저의 책읽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 며칠 동안 읽었던 책들이 재미가 없는 작품이었거나 혹은 저와 아주 맞지 않는 이야기였던 듯 해 기쁘기까지 해요. 더불어 책읽는 즐거움 지수 급상승.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끔 재미없는 책들만 줄줄줄 손에 잡히는 때가 있나 봅니다. 그럴 때는 아주 재미있는 책을 찾아읽어서 침체된 책읽기 즐거움 지수를 올려야 한다는 지인의 충고가, 이번에는 특효약이었던 듯 합니다. 사실은. 팀 보울러도 그리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기에 '이 책마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 어쩌나. 나는 이제 책 말고 다른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건가'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지만요. 반대의 결과가 나와 다행이죠. 

 

'소년'을 내세워 할아버지와의 아름다운 교감과 상실을 통한 성장을 그렸던 [리버보이]와 마찬가지로, [블러드 차일드]의 주인공 역시 '소년'입니다. 다만, 뺑소니 사고를 당해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미스터리를 풀어나가야 하는 조금 힘겨운 소년이죠. 의식을 회복하는 단계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정체불명의 소녀 영상과 어두운 그림자로 나타나는 얼굴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편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헤이븐스마우스 마을에 깃든 '병'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소년의 이름은 윌.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환각을 봐왔다는 주변사람의 증언과 적대적인 눈길 속에서 소년은 또 다시 곤경에 처합니다. 소년이 보는 환영들의 정체, 헤이븐스마우스에 숨겨진 비밀, 그리고 윌을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스터리가 격하지 않게,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전 [리버보이]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만약 팀 보울러의 작품이 죽 이런 방향이라면 그의 골수팬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더랬습니다. 물론 성장소설을 좋아하기는 해도 같은 작가의 성장소설이 뭐 그리 큰 재미가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블러드 차일드]를 읽고나니 그런 점을 팀 보울러도 고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표면적으로는 미스터리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역시 '소년의 성장'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거든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는 하지만 [리버보이]와는 다른 설정을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의 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글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의 윌이 환영을 보고 '병'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적대적인 시선 속에서 약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면, 사고 후 기억을 잃은 윌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겪는 고초나 위험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이 되어 그를 성장시키고 있어요.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을 감수하고 결국에 모든 문제를 해결한 그의 성장은 작품의 마지막 문장, '여기 남겠어'로 귀결됩니다.

 

미스터리 방식을 취했고 전개 과정에 약간 공포도 느꼈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순수한 느낌을 전달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윌의 능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팀 보울러가 창조한 세계였기 때문일까요. 미스터리와 감동, 가슴 먹먹함이 한 데 어우러진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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