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킬러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36
제프 린제이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한 번이라도 미드 <덱스터>를 봤거나, 드라마까지는 아니어도 오프닝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덱스터 시리즈>가 결코 쿡쿡 웃으며 볼 수 있는 즐거운(?) 장르는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덱스터가 요리하는 장면이나 그 장면에서 보여지는, 평소 생활에서라면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재료들에서는 그 색감마저도 소름끼치게 만드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데요, 드라마나 소설에서 그려지는 덱스터의 사건들은 굉장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가 묘사되는 것은 물론 그 동안 시리즈를 통해 덱스터를 강하게 압박해 왔던 독스 경사의 경우에는 신체절단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이번 [달콤한 킬러 덱스터]에는 뱀파이어를 자청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해요. 작가의 기괴한 상상력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잠시 멍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멍. 그런 책을 제가 누워서 킬킬 웃으며 읽고 있으니 동생이 기겁하는 것도 당연하겠죠. 하지만 저는 사건을 즐기며(?) 웃은 것이 아니라 이번 작품에서 변화된 캐릭터를 보여주는 덱스터의 약간 멘붕스러운 정신세계와 독백을 엿보며 웃은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습니다.

덱스터라는 캐릭터가 인기를 끈 이유는, 그가 물론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살인범임에도 그의 범죄가 특정 인물들만을 향해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특정인물이란 소아성애자, 성범죄자, 살인범 등 큰 범죄를 저지르고도 너무나 잘 살고 있는 이들을 말하는데요, 결국 덱스터는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범죄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어두운 이면을 ‘검은 승객’이라 부르며 자신의 또 다른 자아처럼 여기고 있고, 그런 덱스터의 이면을 알아본 양부에 의해 그나마 옳은(?) 방향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죠. 게다가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감식반. 현장에 출동하는 경찰은 아니지만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검증하는 직종이다보니 경찰서 내의 독스 경사처럼 매의 눈을 가진 형사에게는 의심을 당하기도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덱스터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건이 빵! 터집니다. 리타와 결혼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릴리 앤이라는 딸을 얻었거든요. 꼼지락거리는 10개의 손가락과 10개의 발가락. 자신을 향해 지어보이는 맑은 웃음에, 덱스터는 그 동안 검은 승객과 함께 해왔던 생활을 청산하려 합니다. 오로지 릴리 앤의 아버지로서, 이 새로운 세상을 만끽하려 해요.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불만스러운 애스터와 코디. 리타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이 아이들은 친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과거로 인해 가슴 속에 덱스터와 같은 검은 승객을 태우고 있습니다. 특히 코디의 경우는 그 검은 승객, 자신의 용어로는 그림자라 부르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고 그 검은 기운을 발산하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인데요, 그런데!! 그들 앞에 덱스터와 혈연으로 이어진 친형, 브라이언이 짠! 나타난 겁니다. 서로를 알아본 브라이언과 코디. 두 검은 승객이 씨익 미소를 짓는 장면이 그려지시나요? 그 와중에 터진 소녀 실종 사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우왕좌왕하는 덱스터 앞에 펼쳐진 수많은 의문들-릴리 앤은 천사인가, 브라이언은 왜 나타났는가, 브라이언으로부터 코디와 다른 가족들을 지켜야 해, 코디 가슴 속에 숨어든 그림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은 곧 그를 멘붕의 상태로 이끕니다.

[달콤한 킬러 덱스터]의 경우는 독립된 에피소드가 아니라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죽 진행형으로 이어져오긴 했지만 이렇게 뭔가 미적지근하게 마무리 맺은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브라이언이 등장한 이유라든지, 코디의 가슴에 살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좀 더 확실해지길 바랐습니다만 이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는 뭔가 다음을 위해 남겨둔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줄곧 확실한(?) 정체성을 자랑했던 덱스터가 릴리 앤의 탄생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작품 자체가 정리되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또 이번에 발생한 사건이 저의 비위를 엄청 상하게 해서 약간 멍해지는 순간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은, 역설적이게도 정리되지 않은 덱스터의 멘붕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달콤한 아버지로 릴리 앤의 세상을 지켜주자 마음 먹은 덱스터이지만 그도 역시 오랜 세월 함께 한 검은 승객을 일격에 내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 때문에 이어지는 덱스터의 독백과도 같은 문장들은 스릴러 소설, 그 중에서도 엄청 징그러운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스릴러임에도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진행은 이제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 코디의 그림자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 덱스터 집안이 평화로운 시절을 보낼 수 있을지 매우 의심이 되는 상황이지만 릴리 앤을 얻고 기뻐하는 덱스터를 보니 이렇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작가가 이대로 덱스터를 가만 놔둘리 없다는 안쓰러움도 느껴지네요. 앞편의 이야기들이 잘 생각나지 않으니 이렇게 화창한 날임에도 앞 이야기들을 좀 뒤적거려보는 즐거움(?)을 만끽해 볼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왕의 꽃 1~2권 세트 - 전2권 블랙 라벨 클럽 9
이수연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마세요]

로맨스 소설 시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접하고 있는 작품들 중 <블랙 라벨 클럽>은 나름 괜찮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출간되는 작품들의 성향도 다양하고 출간 속도도 안정되어 있어 매달 출간되는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성향의 다양성’으로 인해 재미있는 작품도 있었고,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 작품도 있었지만 <블랙 라벨 클럽> 시리즈의 [버림 받은 황비]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큰 즐거움이었다. 회귀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지중지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것도 성향에 따라 누군가는 ‘별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래서 사실 새로운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복불복’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귀왕의 꽃]은 입소문도 잘 듣지 못하고 있다가 출간예정과 함께 그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사실 나의 귀를 팔랑거리게 한 것은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보다 1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야광귀-라는 존재였다. 보송보송 하얀 털에 웃고 있는 듯한 입매. 고양이 같기도 하지만 고양이는 아닌, 뭔가 마음을 몽실거리게 하는 귀여움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역시 이야기는 좋다. 숨겨진 사연과 비밀, 마치 보물을 찾는 듯한 기분. 이야기를 좋아하는 작가가 우리나라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한국 돗가비(도깨비) 전설을 바탕으로 아귀, 효문조, 그슨대 등 다양한 우리 귀신들이 등장하는 데다 인간세상과 별세계를 넘나들며 진행되는 판타지. 배경은 현대지만 등장인물들과 여주인공의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내력 등은 어렸을 때 읽었던 전래동화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져 귀신들이 등장함에도 무서움보다는 정겨움이 먼저 느껴진다.

먼 옛날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귀신의 왕 백야의 저주를 받은 금씨 일족. 오늘은 그 가문의 셋째이자 막내인 도화의 귀신의 날이다. 그 해 열여덟이 되는 자손이 악귀를 달래기 위해 지내는 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도화는 까무룩 정신을 놓고, 신발을 물어가면 귀신의 신부가 되게 한다는 야광귀가 나타나 도화의 신발을 가져가버린다. 두 오라버니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을 빠져나온 도화는 귀신의 추격을 받던 도중 귀왕 백야의 도움으로 별세계(귀신의 세계)로 이동한다. 그제야 알게 된 가문의 진실, 제물의 존재, 자신의 처지. 암담하기만한 현실이지만 별세계 속 귀신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게다가 백야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도화. 예전 자신의 반려라 믿었던 예영에게 배신당했다 여기는 백야는 예영의 환생이 도화라 여기고, 도화는 백야가 자신이 아닌 예영만 바라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작가가 그려내는 별세계는 무섭다기보다 신비롭다. 창문을 열면 쏟아져들어오는 구름, 아름다운 하늘, 인간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생활을 영위하는 귀신들. 인간 세상에도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있고 흉포한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별세계에도 착한 귀신과 악령이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분위기는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질질 끄는 부분 없이 속도감있게 진행되는 내용 전개, 엉성하지 않은 구성과 스토리라인, 얼토당토않게 사랑에 빠지지 않는 주인공, 2권의 끝부분에 가서 공개되는 -시간과 공간에 얽혀 몇 번이나 같은 생을 산다-는 설정 모두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가지각색의 개성을 뽐내는 인간 및 귀신들의 캐릭터가 작품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버림 받은 황비] 이후 만난 <블랙 라벨 클럽> 시리즈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가격적인 면. 각 권의 분량으로 봤을 때 두 권의 분량으로 한 권을 만들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굳이 분권을 고집한 이유가 있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접 옆에서 바라본 그는 ‘자유롭다’는 단어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약간 주저하며 던진 질문에도 거리낌없이 대답해주고, 오히려 대화를 이끌어나가기도 했죠. 굉장한 행운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작가와의 만남. 실제로 만난 요 네스뵈는 작품 속 해리 홀레가 글 밖으로 뛰어나온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사람이었어요. [박쥐]에 등장하는 해리, 조금은 고독해보이지만 아직은 장난스러움과 여유를 간직한 해리는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작가가 자신의 모습에서 그를 창조해냈다고 생각될 정도로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시작이었기 때문일까요. 해리 홀레 시리즈의 장대한 포문을 연 작품이자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박쥐]는 지금까지 읽은 시리즈와는 달리 약간은 가벼운 분위기, 뭔가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정겨움을 지니고 진행되지만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라는 생각에 훌쩍 떠난 곳은 오스트레일리아. 단지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서 훌쩍 떠난다는 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렇게 떠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죠. 해리 홀레 역시 오스트레일리아에 첫발을 디디며 등장합니다. 살해된 노르웨이 여성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죠. 그 곳에서 파트너로 만난 앤드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그 곳 원주민들에 얽힌 역사, 갖가지 전설과 민담들을 흥미롭게 들려줘요. 해리는 이곳에서도 자신의 매력을 활용해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이전부터 시작된 자신의 알콜홀릭 역사와 그로 인해 빚어진 비극 등을 그녀와 함께 나누며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는 다른 귀여운(?) 모습들을 드러내죠. 약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사건은 맹수같은 감을 가진 해리가 단서를 포착하며 급물살을 타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작품의 초반에는 잘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만난 앤드류가 들려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사건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거든요. 마치 해리 홀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행기 같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소개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글이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앤드류의 입을 빌려 작가가 들려주는 그 이야기들에 푹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런 느낌도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지만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죠. 그리고 앞에서 장황하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사실은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었음을, 그 장치들을 작가가 활용하기 위해 사전작업을 했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요 네스뵈, 역시 해리 홀레!-로 장식되죠.

 

출간 순서대로 꾸준히 해리 홀레를 만나 온 독자라면 그의 알콜경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표지-술병에 들어가 있는 박쥐-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작품 안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동물로 등장하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늘 죽음과 함께 하게 되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지 못하는 외로운 해리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마음이 아프네요. 언젠가 그가 그 병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일년에 한 권씩 출간되다가 2월 요 네스뵈의 방한에 맞춰 [네메시스]와 함께 출간된 [박쥐]. 요 네스뵈와 해리 홀레의 팬이라면 그의 방한도, 한꺼번에 출간된 두 권의 작품도 모두 큰 기쁨이었을 겁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레드 브레스트]나 그의 가장 위대한 히트작인 [스노우맨]에 비하면 깊이 면에서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으로서는 다른 작가들에 뒤지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박쥐]를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이 전 세계 독자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었을까요. 약간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뜻모를 빛을 감추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더는 용납하지 못할 때 처벌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 같아. 아무튼 나도 그러고 싶었어. 처벌받고 채찍질당하고 고문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싶었어. 내 죄를 청산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한테 벌을 내릴 사람이 없었어. 내게 발길질한 사람도 없었어. 공식적으로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언론에는 내가 근무 중에 중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장에게 표창까지 받은 걸로 보도됐어. 그래서 나 스스로 벌주기로 한 거야.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리기로.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청접대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2
아리카와 히로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마음을 전달해주는 아리카와 히로 작가입니다. 이번 [현청접대과] 책날개에는 작가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그 동안 계속 책날개 안쪽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가 외면했던 것인가요, 아님 이제야 얼굴을 공개한 것일까요. 단발머리에 살짝 보일락말락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작품의 분위기와 잘 맞는 듯해서 어쩐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한 느낌입니다. 자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금방이라도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호탕하게 웃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 동안 읽은 그녀의 작품 때문이겠지만 작가가 이런 얼굴이라 다행이다(?)라는 생각마저 드네요.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를 시작으로 [스토리셀러]를 거쳐 세 번째로 만나게 된 [현청접대과]. 처음에는 발음하기도 힘든 제목으로 인해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귀여운 판다그림과 이 봄에 잘 어울리는 민트색 표지만으로도 유쾌똥꼬발랄한 작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문학잡지로 유명한 월간 <다빈치>가 선정한 ‘올해의 책’ 부문에서 1위, 연애소설 1위를 차지했고 쟈니즈의 NEWS 멤버인 니시키도 료가 주인공 가케미즈 역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어졌을만큼 무척 사랑받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조금 먼 예전. 작품에는 이십몇 년 전...이라고 나와있답니다. 고치 성이 서 있는 산자락 밑에 있는 시립동물원의 이전과 현립동물원 신설 계획이 동시에 부상했던 당시, 소리높여 ‘판다유치’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기요토 가즈마사. 하지만 소위 ‘머리가 딱딱한’ 공무원들에 의해 그의 의견은 간단히 묵살되고 한직으로 밀려난 기요토는 결국 현청을 떠나게 됩니다. 그로부터 이십몇 년이 지난 후. 현청에는 혁신적(?)으로 접대과라는 부서가 생기고, 고치 현을 관광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요런저런 구상들을 시작하죠.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관광홍보대사’를 임명하고, 임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의 진행이 더딘 가케미즈와 현청직원들에게 따끔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요시카도 교스케가 떡! 등장한 겁니다. 유명 작가인 그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게 된 가케미즈는 벌벌 떨면서도 요시카도가 말하는 내용을 납득하기 시작하면서 공무원으로서는 드문 유연한 머리를 가지게 됩니다. 결국 과거 ‘판다 유치론’을 주장했던 기요토를 찾아내고 그와 함께 고치현의 레저랜드화를 추진시켜 나가는, 소설을 읽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 묘하게 생동감 넘치는 작품이랍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리카와 히로 작품의 장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할까요.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있어요. 정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있을 법한 성향으로 극이 전개되어 갑니다. 처음에는 여느 직원들처럼 현청의 분위기에 젖어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던 가케미즈가 기요토와 요시카도의 조언으로 점점 성장해가는 모습도 그렇고, 그의 곁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현청의 일을 어시스트하는 묘진 다키와, 점잖으면서도 능력 있는 상사 시모모토, 처음에는 밉상이었지만 점점 호감형으로 변해가는 동료 지카모리 등 인물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게다가 최강 캐릭터를 자랑하는 기요토와 요시카도의 매력은 모든 사람을 그들의 편으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두 번째는 내용 전개가 산뜻하고 깔끔하다는 점이에요. 질질 끌지 않고 상황이 금방금방 전환됩니다. 심지어 갈등상황조차 순식간에 해치워버리고 앞으로 돌진. 전혀 예상치 못한 진격으로 ‘어라?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쑥쑥 달려나가요. 쓸데없는 지면 낭비를 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러기보다는 ‘나에게는 아직아직 에피소드가 많이 있지.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으하하하’ 의 느낌을 전달해주는 전개여서 작가가 펼쳐보이는 상황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져요. 덕분에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잘 읽었다. 재미있었다’같은, 뭔가를 끝냈을 때 느낄 수 있는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답니다.

 

연애소설 부분에서도 1위를 차지했길래 -대체 어디의 어떤 부분에 연애가 등장하는 거야!-했더니, 이거이거 또 가슴을 설레게 하네요.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은 연애묘사인데도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살살 간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성있는 연애이기 때문인 걸까요. 괜히 기대하게 되는 그런 연애. 우헤. 연애와 여행은 뗄 수 없는 관계인데 그렇지 않아도 여행상사병에 걸린 저를 또 한 번 발버둥치게 만드는 작품이었어요. 레저에는 전혀 관심 없는 저인데도 실제 고치현에 대해 부쩍 관심도도 높아졌고요. 교토의 왕벚꽃이 유난히 그리워지게 만드는 참으로 몹쓸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 잘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갑자기 누군가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없이 꺼내놓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에 누군가가 귀기울여주고 있다는 것, 나의 마음에 같이 동조해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되는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마저도 견딜 수 없을 때, 나를 아는 사람이 이 모든 사정을 안다는 것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고, 혼자서 이겨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마저 느껴질 때는 일기장에 제 마음을 털어놓곤 합니다.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다짐도 해요. 그래도. 응답을 원합니다. 곁에서 등을 토닥여줄, 설령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상황이어도 ‘괜찮아’라는 한마디로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해요. 그래서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 것일까요. 누군가는, 그리고 저도 ‘힐링’이라는 말 뒤에 숨는 나약함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힐링’을 원하는 저는 모순된 존재이지만, ‘힐링’이 갖는 따스함을 완전히 모른 척 하기란 힘든 일이란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저에게 그 ‘힐링’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마치 한군데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절은 돌고, 상황은 변하고,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p116

일본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서였지만 그 세계로 더욱 빠져들게 만든 것은 요시모토 바나나였어요. 제가 처음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무렵, 어느 정도 중급과정까지 끝내고 새벽에 함께 공부하던 자료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었으니까요. (그 때 저를 이끌어주신 박*희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요. 보고 싶습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가서 1시간 동안 함께 읽었던 [키친]. 물론 그 때부터 그녀의 작품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가벼운 듯도 해서 잘 읽지 않았던 일상문학작품 중에서도 바나나님의 작품은 꼬박꼬박 챙겨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가 위로받는 느낌을 받은 것은 [왕국]을 읽을 때였어요. 어쩐지 편안해지는 느낌, 어깨에서 조금 힘을 빼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심, 봄날의 가벼운 바람조차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겠다는 기분을 그 작품을 통해 알았답니다. 그 후 그녀의 작품은 저에게 부쩍 의미를 갖게 되었죠.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번 [도토리 자매]는 유독 그런 ‘힐링’과 ‘위로’의 느낌이 강하네요.

 

가난했지만 딸들의 이름을 돈코와 구리코-앞글자를 따서 합치면 돈구리, 즉 도토리가 됩니다-로 지을 정도로 귀여웠던 부모님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도토리 자매. 숙부님의 집에서 지낼 때는 몰랐지만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돈많은 의사와 결혼한 이모 집에서 지내게 된 자매는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길 소망합니다. 언니 돈코는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가고, 그렇게 떠나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구리코는 그 때의 외로움이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의 병을 얻어요. 언니는 정말 데리러 왔고 지금은 함께 잘 지내고 있지만 구리코는 가끔 마음 깊은 곳으로 침잠할 때가 있습니다. 이모집을 나와서 같이 살게 된 할아버지. 무뚝뚝했지만 그들이 같이 살기 전부터 이미 유산을 돈코와 구리코 앞으로 정해놓을 정도로 마음 따뜻한 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그녀들은 ‘좋은 일을 하자!’며 ‘도토리 자매’라는 이름으로 메일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냥 가볍게, 메일을 받고 일상 얘기를 하듯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죠. 그리고 어렸을 적 첫사랑이었던 무기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 구리코.

맞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마음 안의 것을 깎아 내다 보면 사람은 병이 드는 거로구나. 그렇게 깨닫고 나서는 인간의 강함과 약함에 놀랐다. -p33

이 작품의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작품입니다!!-을 떠올렸어요. 그 책에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한 문장이 제 마음 깊은 곳에 박혀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 문장이 그 작품의 감동을 배로 느끼게 해주었다고 할까요. [도토리 자매]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는 달리 타인보다는 내면의 자신을 향해 보내는 편지 같은 느낌이에요. 깊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정적이고 일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 흘러가고 있다는 기분. 돈코와 구리코의 성장소설이면서, 여전히 ‘아, 조금은 어깨 힘을 빼고 살아가도 되는 거구나, 세상에는 분명 즐겁고 좋은 일이 있는 거구나’를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이번 작품의 해석 중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고 할까요. 원서를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그것’과 같이 앞의 말을 가리키는 지시어가 많이 쓰였는데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는 부분도 있어서 확실히 의미가 와닿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쩐지 이 작품은 원서로 읽는 것이 더 맛이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까지 다소 충격을 받은 경험은 있지만, 내 영혼의 심지는 짓눌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조금 이상해졌다 해도, 거기에 집착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상처도 아물고 또 어디서든 행복이 쏙쏙 생겨난다. 그것은 아마도 생명력과 같은 것이리라. 그러니까, 어렸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해서 자신이 비뚤어진 것은 아니다. 가령 약간 비뚤어졌다해도, 조금씩 펴 나가면 펴질 것이다. 그러자고 교정 기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트라우마 치유나 점이나 적당한 운동이나, 나중에 약간의 전환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지금은 필요없다. 무엇보다 자기 영혼의 심지를 갈고 닦으면서 따뜻하게 살며시 품어, 다시금 심지로서 지위를 되찾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