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말들
천경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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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Journey. 인도 뭄바이에서 이루어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제목이다. 저자는 기차역에서 만난 사람들을 작품에 참여시켜 프로젝트를 함께 완성하는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행복하지만은 않을, 각자의 삶의 무게 속에서 허덕이는 인도 사람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역설적으로 들렸을지. 저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버리고 싶거나 타인에게 주고 싶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이름과 함께 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를 적어주십시오'라고 요청하며 기차역에서 익명의 여행자들을 참여자이자 조력자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켰다. 그들 삶의 일부를 공유하면서 하나의 공동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눈여겨보고 기꺼이 자신의 일부를 제공했을까. 누군가는 토끼 발을, 누군가는 간단한 이력이 적힌 기차표를,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물건을 건네주고 사라지지만 누군가는 며칠을 오가며 지켜보다가 귀한 무언가를 집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쓸 데 없는 물건이 대부분일 것이라 예상한 저자와 큐레이터에게, 누군가는 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었던 분홍색 양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20년간 팔에서 끼고 다니던 팔찌를 빼서 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단순한 사진 에세이집인 줄 알았는데, 울랄라, 당장 첫장부터 독특하다. 사진작가가 피사체를 정해두고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주변 사람들을 모두 이 과정에 동참시킨다. 작가는 이미지가 아닌 실재의 과정을 불러들인 것은 그것을 감지하는 지각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함이라고 했다. 우리가 손으로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실재. 공공장소에서 이동하는 사람들을 작품에 참여시키는 불안정하고 도전적인 일을 통해 작가가 얻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자신의 물건을 전달한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행한 도전이, 사람들이 건넨 물건들이,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스페인의 섬마을 안드라치의 중심가에서는 주민들에게 100개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타인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들, 하지만 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그리고 그 질문의 형식은 반드시 '애' 혹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고통의 무게>라는 제목을 가진 챕터에서는 스페인 북부와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당신이 생각하는 고통의 무게만큼의 돌을 모아 보자기에 담아주십시오'라는 요청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출생지, 생년월일이 적힌 보자기에 돌을 담아 가져왔다고 한다. 왜 그는 고통받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까? 빌바오의 일간지 <베리아>기자에게 받은 이 질문에 저자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스스로 얼마나 행복한지를 묻는 물음과 같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1000개의 이름들>은 암스테르담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설치 작업으로, 시민들이 빈 공간을 채워 작업을 완성시키는 주체로 참여하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슬렁슬렁 넘겨나가던 페이지가 점차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괴상해보이기만 하는 작업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퍼포먼스들에 점점 빨려들어갔다. 사진에서는 피사체가 그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피사체조차도 작가의 의도 아래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 실린 퍼포먼스들은, 물론 작가와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실행한 것이지만 그 안에서 민낯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점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소통과 교감을 강조한 작가의 퍼포먼스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실제로 이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 '당신은 지금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라는 말이 전하는 내적 교감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작가가 던지는 하나하나의 질문 앞에서 마치 내 자신을 찾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어떤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보다 훌륭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고 싶은 사람들, 마음이 혼란으로 가득차 괴로운 사람들이 읽는다면 차분하게 안정시켜줄만한 책인 듯하다. 읽을 수록 커지는 매력.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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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갈 곳이 없을까요? 웅진 세계그림책 197
리처드 존스 그림,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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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바탕 표지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강아지 한 마리.

이 강아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요?

페르는 집도 없이 혼자 떠도는 개입니다.

가진 거라곤 목에 두른 빨간 스카프 뿐이에요.

새카만 털은 비에 흠뻑 젖었고, 발밑도 축축한 풀 때문에 차가웠죠.

무엇보다 페르의 마음을 외롭게 하는 것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

편안하게 몸을 뉘이고 쉴 데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페르의 눈 앞에 팔랑팔랑 춤을 추며 물에 내려앉는 나뭇잎이 보입니다.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는 나뭇잎을 따라가보는 페르.

냇물이 밀려왔다 가면서 나뭇잎을 데려가버리고

페르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페르의 발밑은 어느새 콘크리트 바닥으로 바뀌었죠.

탁,탁,탁,탁 소리가 났어요.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페르도 머물 곳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온종일 돌아다녀도 쉽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계속 페르를 쫓아내기 위해 소리쳤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먹을 것을 찾아 식당으로 들어가 난동을 부리게 된 페르.

그건 정말이지 고의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놀란 사람들이 페르에게 소리쳤고

무서워진 페르는 더 크게 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겁에 질려 도망치고 만 페르.

정신없이 달린 페르는 한 공원에 도착했어요.

잔뜩 웅크린 페르 앞에 나타난 한 소녀!

 

그 아이가 페르에게 빨간 스카프를 내밀며 다정하게 이야기합니다.

'이거, 네 거지?'

 

과연 이 소녀와 페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으로 페르는 이 소녀와 함께 하게 될까요?

그토록 원하던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페르의 눈에 비친 도시는 차갑기만 합니다.

아무도 페르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 볼 일 보느라 발걸음들을 재촉하죠.

하지만 그림책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 소녀는 항상 페르를 지켜보고 있었네요!

페이지마다 이 소녀를 발견했을 때의 가슴 벅참이란!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을 때 페르의 심장도 이렇게 뛰었겠죠?

페르에게 소녀는 엄청난 위로가 되었지만

분명 소녀에게 페르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어가는 이야기!

이 겨울을 따스하게 비춰주는 아름다운 동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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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부모들은 어떻게 키웠을까 - 명문대 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추적 조사한 하버드 프로젝트가 밝힌 성공의 8가지 공식
로널드 F. 퍼거슨.타샤 로버트슨 지음, 정미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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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곰돌군들이 하버드라. 그래, 아이들이 원한다면 가도 좋겠다.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고 편향되지 않은 사고의 시간을 얻을 기회. 단, 아이들이 원해야 한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고보니 하버드로부터 이미 러브콜을 받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런데 사실 나는 공부, 학습에 대해 곰돌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 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미 대학을 나온 것만으로는 소위 말하는 성공을 이루기란 어려운 시대, 공부가 전부가 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현장에서 공부에 치인 아이들의 내면이 어떻게 피폐해져가는 지 듣기도 보기도 했기 때문에, 학습에 있어서의 부모 역할이란 무엇인가 너무나 고민스럽다. 또또 게다가. 아이가 병에 걸려 근심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는 엄마도 간접적으로 지켜본지라 그저 건강하고 튼튼하고 행복하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바뜨.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과연 무엇이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잘 맞을 지 앞으로 잘 생각하고 가족 간의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하버드 부모들은 어떻게 키웠을까]를 읽은 이유는 '우리 곰돌이들을 반드시 하버드에 보내고 말겠어!'라고 다짐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 교육에 정답은 없지만 공식은 있다-는 문구에 과연 그 공식이 뭘까 궁금하기도 했고, 자식들을 하버드에 진학시킨 부모의 가정교육은 어땠을 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 외곽에서 태어나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타임>지에서 선정한 아프리카의 미래 지도자 25인에 꼽힌 산구 델레. 그는 최고 우등생의 영예를 안으며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경영학 석사와 법학 박사까지 모두 하버드대학교에서 이수했다. 줄리아드 음대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전 음악감독인 앨런 길버트와 카네기 홀에 오른 메기 영, 농장집에서 자라며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묘목 세는 일을 하면서 산술능력과 끈기를 키웠고 아홉 살 때는 근면한 성격과 우수한 성적으로 주의회 의사당에서 사환으로 선발되어 일찍이 정계 진입의 기회를 가졌던 것을 발판으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주 선출직 관리가 된 라이언 퀄스. 이 세 사람의 성공의 근원은 부모의 양육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하버드 학생들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버드대 로널드 퍼거슨 교수와 언론인 타샤 로버트슨은 이 질문에 체계적으로 답하기 위해 15년간 하버드생들을 비롯해 큰 성공을 거둔 수백 명의 사람들의 성장 과정을 직접 인터뷰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 부모로서 자녀의 성공을 돕는 ‘공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놀라운 점은 이 성공의 공식이 부모의 학력이나 지위, 경제적 능력과는 무관하며 부모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퍼거슨 교수와 로버트슨은 이 하버드 프로젝트가 찾아낸 전략적 교육을 ‘양육 공식(The Formula)’이라 부르며, 이 책을 통해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우는 부모의 8가지 결정적 역할을 알려준다. 조기학습 파트너, 항공기관사, 해결사, 계시자, 철학자, 롤 모델, 협상가, GPS 등 수많은 실제 사례와 검증된 학습이론, 뇌 과학과 아동발달 등 최근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밝혀낸 이 양육 공식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분석적이고 전략적인 해답을 알려준다. 또한 자녀를 잘 키우는 전략가가 되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그 중 무엇보다 당연한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자녀의 성향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그렇게 알아낸 성향에 따라 교육방식을 조정한다. 또 부모의 비전과 그 비전을 떠받쳐줄 강렬한 동기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자녀를 하버드에 보낸 부모들의 특징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읽기와 기본적인 산술을 이미 익히게 한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부모마다 의견에 격차가 있는데, 어떤 부모는 어차피 익힐 거 한글도 최대한 빨리, 셈하기 등의 산술도 최대한 빨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경우에는 최대한 늦게라고 할까. 한글을 일찍 깨우치면 그림책을 볼 때 그림이 아니라 글자에만 집중해 아이의 상상력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한글이나 간단한 셈하기 등은 자연히 해결될 문제이므로 안달복달 하며 괜히 아이를 잡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글 중에서 역할놀이와 글짓기(어려운 수준이 아닌 아이들이 놀면서 하는 말짓기?) 등은 나도 흥미롭게 생각하던 부분이라 더 관심있게 읽었다.

 

처음부터 끌까지 유용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연령별로 적용해 볼 수 있는 방법도 있고 다양한 학생과 그 부모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계기로 자신의 교육관은 무엇인지, 지금 아이의 학습 상황은 어떠한지, 학습이 개입한 후 아이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등 현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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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 출간 70주년 기념 갈리마르 에디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정장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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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적어놓고보니 무슨 책 판매하는 사람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받아들어 실물을 영접했을 때부터의 솔직한 감상이다. 어린 왕자의 팬이라면 무엇을 망설이는가. 주저할 시간이 없다. 무려 출간 70주년 기념 갈리마르 에디션이라니, 내 나이의 거의 두 배나 되는 그 긴 시간동안 사랑받아온 작품의 특별판이다.



어린 왕자의 탄생부터 미출간된 한 장, 초반본, 어린 왕자의 친구들, 어린 왕자와 관련된 데생과 수채화, 어린 왕자 본문, 어린 왕자가 담고 있는 테마들과 신화, 어린 왕자 나는 이렇게 읽었다까지 그야말로 '어린 왕자'와 관련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작가인 생텍쥐페리는 프랑스 사람이지만 <어린 왕자> 초판은 1943년 4월 6일, 미국 뉴욕의 레이널&히치콕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에서 하드커버로 출간된 것은 그 후 3년이 지난 1946년 4월로,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작가가 죽고 없어서 사후 유작 형식이었다고 한다. 작가가 프랑스 사람인데도 외국에서 초판이 나온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작가가 비행 조종사로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생텍쥐페리의 소설 대부분이 프랑스를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 쓰여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린 왕자>는 작가가 뉴욕에 머물 당시 깊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완성한 작품으로 그의 창작 활동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책에는 작가를 추억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회고 형식으로 담겨있기도 하다. 그의 아내, 친구, 친구의 아내, 작가가 미국에 머물 당시의 여자친구, 영화감독에 기자,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친구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는 것 같다. 그들 모두, 각각의 위치에서 <어린 왕자>의 탄생을 직접적, 간접적으로 지켜보았다. 생텍쥐페리의 첫 초고와 데생들이 실린 부분은 아련한 향수마저 느껴진다. 그가 이 작품에 가지고 있던 애정과 어른을 위해 동화라는 형식을 고민한 작가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리고 등장하는 <어린 왕자> 본문. 읽을 때마다 새롭고, 읽을 때마다 온 마음을 다해 읽게 되는데 신기한 것은 이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어느 때는 어린 왕자에게 집중하게 되고, 어느 때는 여우에게, 어느 때는 장미의 눈으로 이야기를 읽기도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린 왕자>를 읽고 느낀 리뷰가 여러 편 실려 있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글도 보인다.



1944년 7월 31일 지중해 근처에서 정찰업무를 보던 중 행방불명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를 처음 읽고나서 작가의 사정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쩐지 그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그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70년이라니. 그는 여전히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일까-라는 생뚱맞은 의문을 떠올려보면서, 요 책은 고이 소장하련다. 잘 모셔두었다가 우리 곰돌이들에게도 물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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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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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부터 미드 <CSI> 시리즈를 좋아했다. 토요일 오후,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1시쯤 방영되었던 것을 우연히 본 것이 첫만남. 그 이후로 이 <CSI> 와 비슷한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지만 내 마음 속에 이 드라마를 뛰어넘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과학수사대원들이 현장에까지 나가는 것은 다소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말도 있었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다. 그 중 라스베가스 편의 길 그리섬 반장은 곤충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꽃은 알고 있다]를 보니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자신의 전문지식을 통해 범인을 잡는 이야기를 접하니 오랜만에 그리운 길 반장님이 떠오르는 새벽이랄까.

이 책의 저자 퍼트리샤 월트셔는 영국의 식물학자, 화분학자이자 고고학자로, 지난 25년간 300건 이상의 까다로운 범죄 사건을 해결해온 법의생태학의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유년시절 기관지염과 폐렴을 앓아 병약했던 그녀는 주로 백과사전 전집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때 접한 지식들은 어린 그녀가 세상을 폭넓은 시선과 왕성한 호기심으로 대하게 이끌어주었다. 의학 연구실과 건축 회사를 거쳐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식물학을 공부한 그녀는 미생물과 일반생태학을 강의하다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 부임, 환경고고학자로서 영국 전역을 누비며 과거의 환경을 재구성하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의 분석을 의뢰하는 전화를 받은 뒤부터 살인, 강간, 납치, 은닉 등의 다양한 강력 사건에 수십 년간 쌓아온 과학 전문 지식을 동원, 현장의 이미지를 명징하게 그려내고 무고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며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는 데 기여해왔다.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놀라운 정확성과 호기심, 겸손, 그리고 진실에 대한 열정 덕에 이제는 ‘법의학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현재 영국 동남부 지역인 서리(Surrey)에 거주하며, 세계법의학협회·영국왕립생물학협회·린네협회 회원으로서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누비며 왕성한 연구와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건에서 증인들의 증언이나 용의자의 자백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에는 누군가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뻔한 경우도 있다. 범죄 현장에서 항상 지문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므로. 저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큰 증거가 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겨울 숲 속, 늘어진 나뭇가지가 몸에 닿을 때 코트 소매가 나무와 마찰하면서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만한 작은 포자와 꽃가루가 옷에 묻고, 부츠에 묻은 흙탕물과 흙 부스러기에는 비가 내리던 날 떨어진 포자와 꽃가루가 포함되어 있고, 흙에는 토양을 서식지로 삼는 수많은 생물들과 이전에 여기에 살았던 죽은 생물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는 25만종 이상의 식물, 합하여 3만 5,000종에 달하는 포유류와 조류와 어류와 양서류, 500만 종이 넘는 균류, 3000만 종이 넘을 곤충과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법의학생태학이 상당 부분 의존하는 방대한 미생물들의 존재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자연의 흔적이 남는다는데, 이런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럼에도 여러 가지 사건은 일어났고 저자는 다양한 죽음들을 접해왔다. 울창한 숲, 음습한 도랑, 낡은 아파트. 그 공간들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을 찾아 연구하고, 마침내는 시체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범인에게 어떤 표식이 남아있을 지 예견했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꽃가루로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지 반신반의했는데 저자가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차근히 따라가다보면 추리소설에서 느끼는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자연과 죽음의 결합, 그 안에서 활동하는 퍼트리샤의 경험담과 인생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섞여 한 편의 소설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법의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이 책도 흥미롭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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