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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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초등학교 때부터 미드 <CSI> 시리즈를 좋아했다. 토요일 오후,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1시쯤 방영되었던 것을 우연히 본 것이 첫만남. 그 이후로 이 <CSI> 와 비슷한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지만 내 마음 속에 이 드라마를 뛰어넘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과학수사대원들이 현장에까지 나가는 것은 다소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말도 있었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다. 그 중 라스베가스 편의 길 그리섬 반장은 곤충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꽃은 알고 있다]를 보니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자신의 전문지식을 통해 범인을 잡는 이야기를 접하니 오랜만에 그리운 길 반장님이 떠오르는 새벽이랄까.

이 책의 저자 퍼트리샤 월트셔는 영국의 식물학자, 화분학자이자 고고학자로, 지난 25년간 300건 이상의 까다로운 범죄 사건을 해결해온 법의생태학의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유년시절 기관지염과 폐렴을 앓아 병약했던 그녀는 주로 백과사전 전집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때 접한 지식들은 어린 그녀가 세상을 폭넓은 시선과 왕성한 호기심으로 대하게 이끌어주었다. 의학 연구실과 건축 회사를 거쳐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식물학을 공부한 그녀는 미생물과 일반생태학을 강의하다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 부임, 환경고고학자로서 영국 전역을 누비며 과거의 환경을 재구성하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의 분석을 의뢰하는 전화를 받은 뒤부터 살인, 강간, 납치, 은닉 등의 다양한 강력 사건에 수십 년간 쌓아온 과학 전문 지식을 동원, 현장의 이미지를 명징하게 그려내고 무고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며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는 데 기여해왔다.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놀라운 정확성과 호기심, 겸손, 그리고 진실에 대한 열정 덕에 이제는 ‘법의학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현재 영국 동남부 지역인 서리(Surrey)에 거주하며, 세계법의학협회·영국왕립생물학협회·린네협회 회원으로서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누비며 왕성한 연구와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건에서 증인들의 증언이나 용의자의 자백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에는 누군가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뻔한 경우도 있다. 범죄 현장에서 항상 지문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므로. 저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큰 증거가 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겨울 숲 속, 늘어진 나뭇가지가 몸에 닿을 때 코트 소매가 나무와 마찰하면서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만한 작은 포자와 꽃가루가 옷에 묻고, 부츠에 묻은 흙탕물과 흙 부스러기에는 비가 내리던 날 떨어진 포자와 꽃가루가 포함되어 있고, 흙에는 토양을 서식지로 삼는 수많은 생물들과 이전에 여기에 살았던 죽은 생물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는 25만종 이상의 식물, 합하여 3만 5,000종에 달하는 포유류와 조류와 어류와 양서류, 500만 종이 넘는 균류, 3000만 종이 넘을 곤충과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법의학생태학이 상당 부분 의존하는 방대한 미생물들의 존재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자연의 흔적이 남는다는데, 이런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럼에도 여러 가지 사건은 일어났고 저자는 다양한 죽음들을 접해왔다. 울창한 숲, 음습한 도랑, 낡은 아파트. 그 공간들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을 찾아 연구하고, 마침내는 시체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범인에게 어떤 표식이 남아있을 지 예견했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꽃가루로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지 반신반의했는데 저자가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차근히 따라가다보면 추리소설에서 느끼는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자연과 죽음의 결합, 그 안에서 활동하는 퍼트리샤의 경험담과 인생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섞여 한 편의 소설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법의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이 책도 흥미롭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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