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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창 - 제주4.3 ㅣ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김홍모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창비 출판사에서 출간된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시리즈 중 [빗창]은 제주 4.3에 대해, 그 중에서도 해녀들의 활동에 대해 다룬다. 1920년에 설립된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은 20년대 중반 일본인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직하면서 관제조합이 되어버렸고, 조합은 소수의 일본인 상인이나 조선인 중간상인과 결탁해 시가보다 저렴한 지정가격으로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판매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관제조합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해녀들은 마을 단위의 해녀회를 조직해 단결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항일운동은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 230여회에 달하는 집회와 시위에 해녀들을 포함해 연간 1만 7천여명이 참여했고, 해녀들은 해조류를 캘 때 사용하는 빗창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고 한다.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했던 생존권 투쟁에서 시작되어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저항한 항일운동으로 발전한 싸움들.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해녀들이 제주4.3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나 사례는 찾기 어렵지만, 그들 역시 다른 제주 사람들과 함께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회의 부당한 탄압에 저항했으리라는 개연성은 생각해볼 수 있겠다. [빗창]은 그런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녀시위와 제주 4.3을 연결해 그려낸 것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악랄한 사건에 대해 더 이상 눈 돌리지 않고 정확히 바라보기를 촉구하는 작품이다.
해녀 야학을 만들고 가르치던 선생님들과 함께 해녀시위를 준비한 그녀들. 그 중심에 련화가 있다. 비록 독립운동을 향한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자신조차 알지 못하지만 '여자'라는 성별에 갇히지 않고 용감무쌍하게 시위의 선봉에 섰다.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해방된 조선의 새로운 상을 그렸지만, 친일파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둔갑하여 탄압을 주도한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친일파들. 해방이 되었지만 바라던 세상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1일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과 민주국가를 쟁취하자는 기치 아래 행진이 시작된다. 이 행진에서는 좌우익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와 평등을 부르짖지만,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사람이 숨지고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1947년 3월 10일 제주도청 직원 140여명이 파업을 시작, 이후에는 제주 전역 166개 기관 단체, 4만명이 넘는 사람들에 의한 민관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총파업으로 체포된 제주도민은 수백명에 달했고, 이들은 좌익분자들로 분류되어 신임도지사 유해진과 서븍청년회에 의해 소탕 대상이 되어버린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서북청년회의 만행.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경찰과 행정기관에서 일하며 '좌익 척결'이라는 이름 아래 테러를 일삼았다. 주인공 련화의 친구 아들 또한 동맹 휴업의 배후로 낙인 찍혀 고문받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게 해방된 세상이냐고 울부짖는 사람들. 이후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10 선거 강행을 결정하고 이에 제주도민은 분단에 반대해 들고 일어난다. 결국 입산하며 투쟁을 준비하고, 1948년 4월 3일 도내 12개 지서와 서북청년회 숙소를 습격하며 도민에게 유격대 호소문을 보내기에 이른다. 미군정은 유격대와 9연대의 협상을 깨기 위해 오라리 마을에 방화 살인을 자행하고, 이 장면을 찍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으로 조작했다. 그럼에도 이남에서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무효화하는 사람들.
그러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치러진 5.10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948년 8월 15일 이남만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다. 한국군에 대한 지휘 권한은 여전히 미군에게 있었고, 일본군 나카무라 사다오 상사였던 송요찬 소령이 토벌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내려온 뒤 1948년 10월 17일 초토화 작전 개시를 알리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에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모습이, 이 [빗창]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2003년 발간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 희생자 수는 2만 5천에서 3만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에 불과하며 그 인원의 80퍼센트 이상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어린이, 노인, 여성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빗창]을 읽은 후 생생하게 살아나는 잔인함과 비극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해방된 나라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가슴을 칠 수밖에 없다. 특히 친일파 고문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둔갑하여 도민들 탄압에 앞장서는 부분에서는 정말 분통이 터졌다. 얼마 전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과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같이 읽어서인지 그 비극성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기에 적힌 내용 대부분은 [빗창]의 줄거리와 작품 해설을 인용한 것인데, 한 번쯤은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제주 4.3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 비극성을 짐작만 했었고, 그 아픔에 대해 눈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나마 [빗창]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아프고 부끄러운 부분을 마주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명확하게 알고 진실을 후세에 전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그 아이의 핏빛 서린 눈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지켜보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리즈로 계획된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은 어느 것 하나 빠트릴 것 없이 우리가 알아야 할 현대사의 중요 사건을 다룬다. 어렵게만 여겨지고 잘 몰라 혼란스러웠던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물려줘야 할 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