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8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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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초반만 해도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엘런. 그야 당연히 가만히 있는 뉴런드와 메이의 사이를 흔들어놓는 악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작품을 완독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야말로 뉴런드와 메이 사이에서 가장 상처받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연민이 생겼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처받은 마음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야했던 사람이 엘런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메이에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미스터리급 반전이라고 할까요.

작품의 제목[ 순수의 시대] 가 정말 '순수'를 의미하는 걸까요. 어쩌면 여성인 작가는 뉴런드의 시각으로 작품을 완성해냄으로써 오히려 그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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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의 손길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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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등장인물들이 전해주는 주어진 시간에 대한 소중함,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에 대한 각성. 이런 감정들을 그 어떤 작품들보다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의학소설인 것 같다.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자꾸 읽게 되는 것일텐데, 비슷한 책들을 계속 읽게 되면 으레 그렇듯 -의학소설도 이제는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 때 읽은 책은 치넨 미키토의 [구원자의 손길]. 여러 개의 수식어 중에서도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일본 전국 서점 직원이 '가장 팔고 싶은 책''이라는 문구였다. 서점대상을 받은 책들과 서점 직원들이 추천하는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히 읽고 싶어질 수밖에.

 

주인공은 대학병원 흉부외과에서 힘들게 근무하는 다이라 유스케. 가족조차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만나는 것이 다인 그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흉부외과 의사이자 의국 최고의 권위자인 아카시 과장을 존경하며,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아카시 과장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다이라에게 내린 지시는 인턴 세 명을 지도해 그 중 두 명 이상은 반드시 흉부외과로 입국 시키라는 것. 그렇게 되면 다이라가 원하는 병원으로 파견을 보내주겠다는 당근을 거부하지 못하고, 다이라는 결국 인턴 세 명-고노, 마키, 우사미-의 지도를 맡게 된다. 꿈을 향한 여정이지만 순탄하지만은 않다. 아카시 과장의 조카이자 같은 흉부외과 의사인 하리야 준을 향한 열등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열패감 속에서 인턴들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아카시가 돈을 받고 논문을 날조했다고 고발하는 괴문서가 돌기 시작하고, 유스케는 범인 찾기 역시 지시받게 된다.

 

지금까지 읽은 의학소설 속의 의사들은 하나같이 우수하고 능력이 출중했다. 개인적으로 사정은 있을지언정 실력 면에서 뒤지는 캐릭터는 없었던 듯한데, 다이라는 그에 비하면 예상 외의 인물이라고 할까. 의국 안에서 중요인물도 아니고 수술의 기술적인 면도 하리야에 비해 낮은 다이라. 하지만 그에게는 하리야나 다른 흉부외과 의사들에게는 없는 장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따뜻한 가슴으로 진료한다는 것. 그리고 응급 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하며 외과 및 내과 처치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이라 자신은 스스로를 평범한 의사, 주어진 상황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그의 장점을 주위 사람은 알아봐준다. 초반에는 삐걱거렸던 인턴들과의 관계도, 인턴들이 다이라의 진심과 능력을 알아봐주면서 따뜻하게 변화해 가는데, 그 과정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오열은 아니어도 눈과 코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맺혔을 정도!!

 

대개의 작품은 주인공이 원했던 방향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번에는 어떨까. 다이라는 과연 괴문서를 돌린 범인을 잡고, 인턴 세 명 중 두 명도 흉부외과에 입국시키고, 자신이 원하던 병원으로 파견을 나가게 될까. 여기서 다 언급하면 재미가 없어지니 꼭 작품으로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책은, 중간중간 오타가 있어 처음에는 오타 찾기에 열중하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오타고 뭐고 상관없어질 정도로 정말 재미있다!

 

치넨 미키토의 작품 중 [기도의 카르테]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주인공은 스와노 료타. 이 스와노 료타를 [구원자의 손길] 에서도 다이라의 조언자로 만날 수 있다. [기도의 카르테] 때는 못 느꼈는데 어째 이번 작품에서는 살짝 가벼운 이미지. 그래도 다이라의 곁에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충고해주는 그를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종영되고 한동안 마음이 허했는데, 그 허한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던 작품. 의학소설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꼭 추천드립니다~!!

 

** <소미미디어>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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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게 시끄러운 오르골 가게
다키와 아사코 지음, 김지연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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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줄 오르골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울려퍼지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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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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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내가 있다. 모습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나 자신이므로.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는 것, 바로 3개월간의 기억이다. 그는 3월의 나, 나는 6월의 나.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분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겠지만 정말로 눈 앞에 나타날 거라 확신하지는 못했을 이야기. 과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눈 앞에 나타난 또 다른 나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아니, 그를 과연 '나'라고 인정할 수는 있을까. 갖가지 의문 속에서 흥미롭게 읽기 시작한 [아노말리] 는 다양한 장르를 복합적으로 맛볼 수 있는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다.

 

2021년 3월 10일,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여객기가 예고에 없던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었지만 무사히 착륙한다. 세 달 뒤 6월 24일, 동일한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고, 동일한 착륙 지점을 향해 간다. 기장과 승무원은 물론 탑승객까지 완전히 똑같은, 3월 10일의 상태 그대로.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소설을 몇 편 읽어봤지만 기존의 작품이 한 명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아노말리]는 자신의 분신을 만난 여덟 명의 경험을 엿볼 수 있다. 살인 청부업자,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기장, 동성애자임에도 진실을 숨기고 활동하는 뮤지션, 성공한 듯 보이는 변호사, 사랑이라는 인연의 끝에 다다른 연인,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못할 비밀을 간직한 소녀까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각각의 인물들에 따라 장르적 변환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릴러같은 미스터리함을, 때로는 정체성을 찾아 나아가는 성장소설처럼, 또 때로는 잔혹한 동화를. 특히 자살 후 명성을 얻게 된 소설가 빅토르 미젤이 등장하는 부분은 [아노말리]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한 작가의 도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라며 발코니에서 몸을 던진 그는,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아노말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에게 있어 '아노말리'는 무엇일까.

 

자신의 분신을 마주한 여덟 명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끝내 그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멸시키거나 영원히 연락을 취하지 않기로 약속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타협점을 찾아내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진실 앞에서 어렵게 입을 떼기도 한다. 상대방이 같은 나임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 사람? 돈?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면 공존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아노말리]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에 '인간=프로그램'이라는 가설을 내놓는다. 우리가 프로그램의 일부라면, 결국 우리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전부 그 어떤 존재에 의해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일텐데,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인간들 대부분은 아니라고,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울부짖겠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로 머리가 아프지만, 이 작품이 주는 기이한 SF적 상상력에 전율이 일었다.

 

작품에 푹 빠져 순식간에 읽어내려갔지만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도 있을 수 있는 법. 계속해서 똑같은 비행기와 똑같은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그 때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 중 하나도 (소설 속이지만) 살짝 엿볼 수 있다. 부디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신선한 상상력과 '아노말리'에 압도되어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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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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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세상을 얼마 살아보지 않은 당신, 어느 날 중병에 걸렸는데 눈 앞에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악마가 나타나 하루에 한 개씩 무언가를 없앤다면 하루치의 생명을 연장해준다고 속삭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악마가 정해요. 무엇을 없애라고 할 지 궁금하고 두렵겠죠. 하지만 선택의 시간은 짧고, 악마가 지정한 그것을 없애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곧 세상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들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계속 없애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없앨 수 없는 존재가 있지는 않나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앞에 나타난 악마가 다소 경망스러워 보였거든요. 야자수에 미국 자동차가 그려진 샛노란 알로하셔츠에 반바지,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선글라스. 적어도 생명을 두고 거래하는 자리에 나타날 법한 악마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악마와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도 핑퐁핑퐁. 슬플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어디 한 번 볼까나?-라며 책을 든 채 드러누운 저. 얼마 후부터는 벌떡 일어나 앉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하루씩 생명을 연장해 나가기 위해 선택한 것들에 대한 단상이 무척 심도있게 다가오거든요.

 

악마가 없애라고 명령한 것은 전화와 영화와 시계. 불편할 것 같지만 어쨌든 생명이 걸린 일이니 결국 없애기를 선택한 주인공은 물건들과 관련해서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 또한 되새깁니다. 만나서는 별 말 못했지만 전화로는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었던 연인, 살면서 보았던 영화들과 순간순간이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였다는 깨달음,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멀어지고 말았던 아버지와의 관계. 왜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두거나, 그 정도의 큰일을 맞닥뜨렸을 때가 되어서야 겸손해지고 삶의 의미를 찾아보게 되는 걸까요? 어쩌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뒤로 하고, 지금이라도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해 감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에 아버지가 문병 왔을 때, 시계가 멎었다고 했더니 말없이 들고 가버렸어. 고칠 생각이었구나."

"그렇지만 하필 이럴 때 고칠 건 없잖아."

"괜찮아. 물론 네가 여기 있어주는 것도 기쁘지만, 사람의 애정이란 게 꼭 그런 표현 방식만 있는 건 아닐 때도 있으니까."

p192

 

악마가 네 번째로 제시한 없애야 할 것은 바로 주인공의 고양이 양배추같은 고양이들. 앞의 세 가지는 망설이기는 했으나 없어지는 것에 동의했지만, 주인공은 고양이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나봐요. 양배추는 그저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고, 자신의 삶을 이루어온 모든 것이라는 걸 알아버린 거죠. 가볍게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결국 이 이야기는 무거운 삶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입니다.

 

각 영화에 등장하는 명언들과 전화와 영화와 시계가 없어졌을 때 깨닫게 된 생각들까지, 처음 예상과는 달리 근사한 글들이 가득 담긴 책이에요. 더불어 당연하게 우리 생활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당연하지 않은 진귀함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 양배추를 자전거에 싣고 눈물을 흘리며 페달을 밟는 마지막 모습까지 가슴에 스며드는 완벽한 이야기였어요!

 

** <소미미디어>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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