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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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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내가 있다. 모습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나 자신이므로.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는 것, 바로 3개월간의 기억이다. 그는 3월의 나, 나는 6월의 나.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분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겠지만 정말로 눈 앞에 나타날 거라 확신하지는 못했을 이야기. 과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눈 앞에 나타난 또 다른 나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아니, 그를 과연 '나'라고 인정할 수는 있을까. 갖가지 의문 속에서 흥미롭게 읽기 시작한 [아노말리] 는 다양한 장르를 복합적으로 맛볼 수 있는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다.
2021년 3월 10일,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여객기가 예고에 없던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었지만 무사히 착륙한다. 세 달 뒤 6월 24일, 동일한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고, 동일한 착륙 지점을 향해 간다. 기장과 승무원은 물론 탑승객까지 완전히 똑같은, 3월 10일의 상태 그대로.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소설을 몇 편 읽어봤지만 기존의 작품이 한 명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아노말리]는 자신의 분신을 만난 여덟 명의 경험을 엿볼 수 있다. 살인 청부업자,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기장, 동성애자임에도 진실을 숨기고 활동하는 뮤지션, 성공한 듯 보이는 변호사, 사랑이라는 인연의 끝에 다다른 연인,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못할 비밀을 간직한 소녀까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각각의 인물들에 따라 장르적 변환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릴러같은 미스터리함을, 때로는 정체성을 찾아 나아가는 성장소설처럼, 또 때로는 잔혹한 동화를. 특히 자살 후 명성을 얻게 된 소설가 빅토르 미젤이 등장하는 부분은 [아노말리]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한 작가의 도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라며 발코니에서 몸을 던진 그는,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아노말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에게 있어 '아노말리'는 무엇일까.
자신의 분신을 마주한 여덟 명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끝내 그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멸시키거나 영원히 연락을 취하지 않기로 약속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타협점을 찾아내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진실 앞에서 어렵게 입을 떼기도 한다. 상대방이 같은 나임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 사람? 돈?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면 공존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아노말리]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에 '인간=프로그램'이라는 가설을 내놓는다. 우리가 프로그램의 일부라면, 결국 우리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전부 그 어떤 존재에 의해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일텐데,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인간들 대부분은 아니라고,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울부짖겠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로 머리가 아프지만, 이 작품이 주는 기이한 SF적 상상력에 전율이 일었다.
작품에 푹 빠져 순식간에 읽어내려갔지만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도 있을 수 있는 법. 계속해서 똑같은 비행기와 똑같은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그 때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 중 하나도 (소설 속이지만) 살짝 엿볼 수 있다. 부디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신선한 상상력과 '아노말리'에 압도되어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