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의 피부 (리커버)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푸르고 시린 여름 안에서]
지금보다 더 나이가 적었을 때는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스함이 주는 위로에 감사할 수 있는 겨울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낳고 돌보면서 이제는 겨울보다 여름을 더 즐기게 되었습니다. 땡볕에서도 지치지 않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활기참,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 같은 것들. 여름이 뿜어내는 싱그러움과 생명력에 매료되었고, 더운 것에 지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실감에 행복을 느꼈어요. 특히 이번 여름이 더 붙잡고 싶어지는 이유는, 이제 다음 달이면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이들에게 온전히 나를 내어줄 수 없다는 아쉬움과 부담감에 흘러가는 1분 1초가 너무나 아깝고 그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붙잡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여름은 블루, 우울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가는 '여름에 주운 단어 중 하나는 나신(裸身)'이라며 그 단어를 즐기는 일을 좋아한다고 적어두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을 때 옷을 훌훌 벗고 집 안을 거니는 행위를 통해 자신에게 몸이 있음을,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도 이런 글에서조차 생명력보다는 처연함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참 이상하죠. 행위를 하는 저자 본인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 있다고 깨닫는다는데 제가 느낀 것은 깊은 우울과 생을 향한 애처로움 몸짓 같은 것이라니. 어쩌면 작가의 글을 읽는 내내 깨져버릴 듯한 섬세함과 감성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접하기 전에 계절과 관련된 에세이겠거니 생각했어요. 제가 이 여름을 붙잡는 데 그리 괴롭지 않도록, 뭔가 마음을 다독여주는 글이면 좋겠다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책은 그림에세이입니다. 게다가 작가가 저를 위로해준다기보다 어쩐지 제가 작가를 토닥여주어야 할 것 같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생각지도 못한 그림들을 만나고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로 안내받아 반가웠는데, 글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서글퍼요. 무언가 묵직한 것이 마음에 내려앉아서 차마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한 울음이 목 아래를 콱 막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에드워드 호퍼, 피에르 보나르, 던컨 한나와 에이미 베넷 등의 스물 네 명의 화가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 작가님이 소개해주신 그림 중 제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해준 작품은 피에르 본콩팽의 <태아처럼 웅크린 여인>이었습니다. 도피처가 필요할 때마다 낮잠을 자는 아이였다던 작가. 제가 그랬거든요.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한 일이 생기면 '일단 자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고 드러누웠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자기 전에는 세상 무너질 것 같던 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물론 어릴 때에 국한된 버릇입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일이 생기면 잘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수습하느라 바쁘죠. 그런데 요즘 워낙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보니 자꾸 드러눕고 싶어지는 저를 발견합니다. 도망치고 싶은 걸까요. 그래서 그런지 피에르 본콩팽의 그림 속 여성도 어쩐지 꿈 속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제 불안감이 사그라들지는 않았어요. 그대로이거나, 혹은 더 깊어진 느낌. 그런데 문득, 짐을 싸고 떠나는 것을 반복하며 그림을 들여다보는 작가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그냥그냥 이런 상태도 그리 나쁘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푸르다'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 계절을 오롯이 느끼며 지나가고 있는 듯한 기분입니다. 한밤에 스탠드 밑에서 한 자 한 자 곱씹으며 읽어내려갔던 '이상하게' 서글펐던 글들. 마지막에 페르메이르를 향한 연서는 무척 반가웠습니다!
**출판사 <푸른숲>으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