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왕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레미제라블과 양들의 침묵의 조합이라니, 읽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읽는 아리아 - 스물세 편의 오페라로 본 예술의 본질
손수연 지음 / 북랩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오페라는 드라마와 음악의 결합인 동시에 무용, 무대미술, 의상 등을 포함한 당대 예술의 총체다'라고 오페라를 정의한다. 제대로 된 공연을 본 적은 없지만 오페라는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이상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예술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까. 아리아는 오페라 안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부르는 서정적인 독주성악곡을 의미하는데, 주인공의 감정이 가장 복받치는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노래다. 작곡가나 대본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오페라의 꽃.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의 아리아는 그 오페라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오페라 전체를 대중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작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여러 오페라를 명화와 연결지어 소개하면서 들릴 듯 들리지 않는 노래를 우리들의 귓가에 흘려보낸다.

 

그 처음이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리오?'다. 그리스 신화 중 오르페우스 신화를 소재로 한 오페라로, 아폴론 신과 뮤즈의 아들인 그는 리라 연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숲의 님프 에우리디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열흘 뒤 독사에 물려 그녀는 저승으로 떠나고 만다. 지하세계로 가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려 하지만 신이 내건 조건, 이승에 당도할 때까지는 절대 그녀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어겨 영원히 그녀를 잃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신화의 결말은 여기까지일텐데, 그 뒷내용이 충격적이다. 사랑하는 에우리디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다른 여성과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고 결국 남색에 빠져 동성애의 시조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결국 그에게 원한을 산 여인들이 그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오르페우스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제우스가 그의 리라를 하늘로 올려 별자리로 만든 것이 바로 거문고자리라고 한다. '에우리디체 없이 어찌 살리오?'는 그가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되는 순간 터져나오는 노래다. 비통함에 울부짖을 것 같지만 소개에 따르면 그리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우아하고 담담하게 슬픔을 노래한다니, 어쩌면 그것이 더 슬프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화가 보티첼리의 그림 <봄>과 함께,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프라고나르의 <그네>와,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은 저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와 함께 실려 있다. 여러 오페라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오페라는 푸치니의 <나비부인>. 내가 오페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작품을 통해서였는데, 이 작품은 열 다섯 어린 나이에 미국인 남편을 맞이한 쵸쵸상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리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부르는 노래 '어떤 갠 날'은 그 결말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더욱 처연하고 애달프다. 결국 미국으로 떠났던 남편이 돌아오지만 그 옆에는 미국인 아내가 당당히 곁을 차지하고 있다. 아들은 맡아준다는 그들 부부의 제안에 힘없이 동의한 쵸쵸상은 수치스럽게 사느니 명예롭게 죽겠다며 결국 자결하고 만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특히 유럽사회에 일본문화에 대해 호의적인 이미지를 선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이 발표되고 몇 년 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에 있어 일본이란 나라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이미지라니, 어떤 작품이 처음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이토록 큰 파급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오페라와 명화, 그리고 각각에 담긴 역사와 사연들까지 함께 읽다보면 환상 속 노래가 내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마치 출렁이는 물결처럼 내 마음을 잠식해 들어온다. 분량이 많지 않지만 이 안에 담긴 이야기는 그 어떤 책보다 깊고 크다는 느낌. 기회가 된다면 책에 소개된 오페라만이라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2008년 12월 21일, 호텔 근무를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몸을 실은 채 창밖을 바라보던 로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한 남자와 운명적으로 눈이 마주친다. 한 순간의 벼락과도 같은 짧은 눈맞춤이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느낀 듯 읽던 책을 덮고 버스 쪽으로 다가선 남자. 하지만 야속하게도 버스는 출발해버리고 이후 로리는 '버스보이'를 찾아 헤매며 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한 그를 향한 그리움을 키워나간다. 그 후 1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버스보이'인 그 남자, 잭이 세라의 옆에 서 있다. 로리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으로! 충격을 받은 로리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잭과 인사를 나누는데, 이상하다, 어쩐지 그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로부터 9년간 계속되는 그들의 인연. 과연 로리와 잭의 마음의 종착역은 어디가 될까.

 

우와아악! 책을 읽는 내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설렘으로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렇게 흥분되다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때문인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 책이 정말 지독하게도 재미있어서인가! 확실한 건 결혼하고 곰돌이 두 명 키우면서 무뎌진 감성으로 한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나를 이렇게 들썩이게 만든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거다. 예전에는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연애시장에서 자유로워지고보니 그런 일도 가능하겠다는 유연한 사고가 생겼다. 왜, 처음 만났는데도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고, 가까워지고 싶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런 감정이, 본인은 깨닫지 못했을 뿐 첫눈에 반했다는 증거 아닐까. 그렇게 서로에게 반했지만 얄궂게도 친구의 연인과, 연인의 친구로 만나게 된 두 사람. 진부한 설정. 그런데! 진부한데 너무 재밌다! 꺅!

 

잭에 대한 마음을 잘 숨기고 지낸다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심적을 약해진 로리는 우연히 자신들의 '첫번째' 만남에 대해 잭에게 기억하는지 묻고 만다. 사실 잭도 그의 독백을 통해 그녀를 꿈에서까지 그리워할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순간적으로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고, 감정을 못이겨 흐느끼는 로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키스한다. 그 날의 일을 계기로 어색해진 두 사람. 그리고 태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로리. 그 곳에서 만난 매력적인 오스카를 만나 인연을 맺고 결혼까지 이르지만 오스카와 로리의 사이도 순탄하지 않다. 잭과 세라의 사이도.

 

오스카와의 만남도 로맨틱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와의 러브스토리라니,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한 번쯤 그려봤을, 하지만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로맨스. 죽여주는 미남에 명예와 부를 아는 남자, 게다가 자신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이라니 나라도 홀랑 넘어갈 판이다. 로리도 '어떤 면에서는' 오스카를 사랑했고 결혼까지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 자리잡은 구멍을 메워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일이 바빠 일주일에 절반은 얼굴을 볼 수 없는, 예전 사귀었던 여자와 계속 일을 하는 오스카라니! 오마이갓! 작은 곳에서 시작된 균열은 점점 커져 걷잡을 수 없어지고, 그 균열은 로리와 오스카 뿐만 아니라 잭과 세라에게서도 감지된다.

 

거의 10년의 세월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서로만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세라가 있어 그랬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20대의 나라면, 어쩌면 30대 초반까지의 나라면 '아니, 어떻게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결혼을 하거나 다른 상대를 만날 수 있지?!' 라며 흥분해 날뛰었겠지만, 이제는 알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 누가 있든, 어쨌든 지금이라는 시간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자신만 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에도 돌고 돌아 만나게 된 두 사람.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 있다.

 

읽을수록 매력적인 소설이다. 그렇다. 나 앉은 자리에서 두 번 읽었다. 새벽에. 밤 새워가면서. 한 번 손에 잡으니 가슴이 두근거려 끝까지 읽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판타지, 어쩌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할 법한 사랑. 잠들어있던 유부녀의 연애세포를 새벽에도 날뛰게 만드는 진귀한 작품이다! 그나저나 로리도 좋지만 세라도 너무 멋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없는 살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일면식도 없던 소년에게 폭행당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이치로이 고즈에. 그녀를 습격한 범인은 근처 고등학에 다니던, 이제 열일곱이 된 소년 구츠와 기미히코였다. 그는 고즈에 뿐만 아니라 이미 의사, 초등학생, 독거노인을 살해한 전력이 있었고 고즈에는 그의 네 번째 타깃이었다. 격렬한 저항으로 살아남았지만 그가 자신을 공격하던 순간의 살의는 사건 발생 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왜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가. 자신의 기억에는 없지만 그에게 모욕을 준 일이 있었나. 구츠와는 고즈에를 공격한 직후 행방을 감춰 현재까지 오리무중이다. 고즈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과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그 동안의 고충을 사건담당 형사였던 나루토모에게 하소연한다. 그는 그녀의 괴로움에 진지하게 응답해, 미스터리 작가와 전직 형사 등이 멤버인 추리모임 <연미회>에 그녀의 사건 조사를 의뢰한다.

 

미스터리 베스트셀러 작가인 오츠카와 헤이타, 미스터리 작가 겸 에세이 작가인 야츠메 아리사, 전직 현경 출신의 사립탐정 회사를 운영하는 요보로베 야스노리, 범죄심리학 전문인 이즈미다테 유미코, 본격 미스터리 전문의 슈타라 아츠시. 나름 추리와 미스터리 쪽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 사람이 반론을 내거나 동의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설이 흥미진진하게 오가지만 범인인 구츠와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100% 확신할 수는 없다. 과연 고즈에는 이 모임에서 구츠와가 자신을 공격한 동기에 대해 알게 될까. 구츠와가 연쇄살인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다가, 마지막에 자리한 경악할만한 진실에 그만 입을 떠 벌리고 말았다.

 

구츠와의 동기, 구츠와 외의 다른 진범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로 진행되어 정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이 사람의 범행 동기는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악의 화신의 탄생이라고 해야할까.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지른 그를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됐을 지 생각하니 모든 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끈처럼 이어져 있는 것 듯한 느낌이 든다. 부디 누군가 나타나 그를 멈춰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정도. 충격적인 결말에 너무 정신이 없다. 띠지에 적힌 홍보문구처럼 이런 범죄 소설은 처음이다.

 

내용도 흥미롭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표지 이미지나 속지 이미지가 너무 아쉽다. 아프로스미디어에서 출간된 작품을 몇 번 읽었는데 가장 충격적인 표지는 츠지무라 미즈키의 [동그라미]. 츠지무라 미즈키의 완전 팬인데 이 작품의 표지를 보고는 구매의욕을 잃었다. 흥미로운 작품들 많은데 부디 표지의 알흠다움에도 신경 써주시면 좋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가끔은 수용소의 물건들이 차례로 하나씩 떠오르는 게 아니라 무더기로 나를 덮친다. 그래서 나는 안다. 물건들이 나를 찾아오는 건 내가 기억하려 해서가 아니라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임을...밤이면 물건들은 나를 추방시키려 하고, 나를 원한다.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므로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배고픔이 괴물이듯 그런 이빨빗바늘가위거울솔은 괴물이다. 배고픔이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물건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p 37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주년 특별판 시리즈의 그 첫 번째,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만났다. 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에서 러시아행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열일곱 소년이었다. 한창 랑데부, 같은 남자와의 사랑에 빠져 있던, 수용소에 갇히기 훨씬 이전부터 나라와 가족들에 대한 공포로 살아왔던 사람. 나라가 자신을 범죄자로 가두고, 가족들이 치욕으로 여겨 내쫓으리라는 공포 속에서 차라리 수용소행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소년. 가족들이 챙겨준 물건을 품에 안고 러시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루마니아를 뒤로 하고 어느 새 맞이한 러시아의 밤 속에서 그와 다른 이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성의 말살을 경험한다. 모두가 일렬로 자리해 용변을 봐야했던 그 밤. 예전의 삶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마침내 현실을 직시한다. 살고 싶어서, 살기 위해 그들은 무더기로 모여 똥을 누었다.

 

그리고 시작된 수용소 생활. 그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배고픔'이다. 배고픈 천사는 늘 따라다니며 한방울넘치는행복을 맛볼 때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일의 경중에 따라 무게가 다른 빵을 배급받았고, 빵 바꾸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아침에 받은 빵을 그 순간 다 먹지 않으려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남은 빵을 베개 밑에 숨겨놓고, 또 누군가는 그 빵을 훔쳐가고, 자체적인 징벌이 가해진 후에도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살아간다. 남의 빵을 훔칠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알기에, 누구라도 그가 될 수 있었기에, 하지만 자신들만의 도덕은 필요했으므로. '나'는 '너는 돌아올 거야' 라는 한 마디에 의지해 수용소 생활을 견뎌가고, 수용소 사람들 모두를 지탱해주는 존재는 경비원 카티로 불리는 카타리나 자이델이다. 날 때부터 천치였던 그녀를 수용소 사람들 누구도 괴롭히지 않으며 서로에게 저지르는 나쁜 짓을 그녀에게 베푸는 선행으로 용서받고자 한다. 그녀는 수용소 안에 마지막 남은 양심, 마지막 남은 휴머니즘을 상징한다.

 

단어 하나가 소제목이 되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담백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 담백함이 오히려 처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뮐러의 아버지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 돌아왔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오년간 노역했다. 나치의 몰락과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 속에서 형성된 시골마을의 강압적인 분위기. 그 분위기는 어린 뮐러에게 잊지 못할 기억과 두려움을 선사했고 , 그 때의 경험들이 그의 문학인생에 근간을 이루게 된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난 후여서인지 작품 안의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가슴이 아프다. 게다가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시를 읽는 것 같은 섬세함이 담겨 있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울림과 무게감이 담겨 있다.

'나'의 고통은 어머니가 보낸 엽서로 절정에 다다른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 태어난 동생의 존재. 그 존재는 '나'에게 전혀 기쁨도, 반가움도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죽어버리를 바랐다. 이제 자신은 가족들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 어쩌면 아무도 그가 살아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그를 더 절망으로 몰고 간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째서 그런 엽서를 보낸 것일까. 단순히 동생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그 엄마의 심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라면, 만약 엽서를 보낼 수 있다면 어떤 사진을, 어떤 문구를 보냈을까. 망설일 필요 없다. 당연히 보고싶다, 너를 기다린다, 몸이 성치 않아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달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5년이나 더 수용소에 있다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그를 꽉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누군들 놓여질 수 있을까. 그 황량하고 두려운 죽음과 삶의 길목에 서 있었던 경험에서.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떤 시간을 주고,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경험을 겪게 할까. 잊혀질 수도 있는 과거에 눈 돌리게 하는 것.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게 만드는 것. 문학이 지닌 이 힘 앞에서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