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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ㅣ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소설 뿐만 아니라 평전이나 회고록을 남겼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아닌 글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벌써 십년도 더 전에 [연민] 이라는 작품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츠바이크. 그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최신완역판으로 만났다. 총 14편의 역사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널리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세계사의 주요장면들을 마치 소설처럼 섬세하게, 눈 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한 그의 실력이 압권이다.
에피소드들은 기원전 1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룬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남성으로, <탐험가와 식민지 개척자, 기술발전의 선구자>, <작가와 작곡가들>, <전투 지휘관과 정치가>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1그룹에 속하는 발보아, 서터, 스콧과 필드, 2그룹에 속하는 헨델, 루제 드 릴, 괴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3그룹에 속하는 키케로, 메흐메 2세, 그루쉬 원수, 레닌, 윌슨 등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작가가 역사 속 다양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저절로 알 수 있다.
1그룹에 속하는 인물들은 서구 문명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는 데 힘을 보탠 사람들이다. 신대륙의 발견과 정복의 역사가 실은 약탈과 살인으로 얼룩져 있고, 첨단 장비를 동원한 스콧의 남극탐험도 대영제국의 영광에 봉사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 해저케이블의 영웅 필드의 에피소드를 통해 '자연을 통제하려는 그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려 드니 안타깝다'는 심정을 토로하는 모습에서 너무나 빠르고 추악한 진보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2그룹의 괴테에서는 말년의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마리엔바트의 비가> 탄생의 비화를 들을 수 있는데, 마치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 같은 찰나의 포착이 마음 속에 와닿는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시로, 톨스토이의 경우는 희곡으로 구성한 점도 독특하다.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서 인물들은 순간의 광기와 우연으로 각자의 운명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인물이기 때문인지 이 책에서는 유독 키케로의 일화가 마음에 와 닿았는데, 로마 문화권에서 최초로 권력을 함부로 쓰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로마 제국 최초의 휴머니스트이자 웅변의 대가, 법의 수호자였던 키케로. 적수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관용으로 사색하는 삶을 되찾았던 그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자처하지만 자신의 말은 무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로마가 곧 내전에 빠지는 것을 막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잇었지만,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12월 로마 포룸에 서서 권력을 찬탈한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연설을 열네 차례나 했다는 기술 앞에 감동이 솟아오른다. 독재자의 군대와 싸울 공화국 군대를 모집할 것을 요구하고 옥타이바누스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지만, 그의 뒤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디우스가 협상의 길에 들어서며 그의 목숨도 위협받게 된다. 삶의 마지막을 직감했지만 피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그의 모습이 하나의 영화처럼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이 에피소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려울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었지만 읽는 동안 작가의 수려한 문체에 감탄하게 된다. 단조로운 역사적 사실들의 기술이 그의 손에서 섬세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츠바이크 선집 1>이라고 되어 있는데, 과연 어떤 작품들이 이 뒤를 이어 출간될 것인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 출판사 <이화북스>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