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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충 성적에 맞춰 집 근처의 한 대학, 원서를 쓸 때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이제부터 나는 '프로그래머' 같은 게 될 것인가보다,라고 생각하고 3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뜬금없이 중국어과로 편입했다. 애초에는 일본어과로 전과하려고 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편입 원서를 쓰며 1지망에 중국어과를 적어 넣었다. 중국에 어학 연수를 다녀오고 졸업을 했다. 한 회사에 상근 통역사로 출근하며, 나는 통역사로 살아가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계약직 일은 금방 끝이 났고, 어디에 취직하기는 싫고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번역에 뜻을 두고, 나는 이제 중국어 번역가의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다짐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은 한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교양 중국어 강의를 하고 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선택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온 길인 것 같다. 하고 싶지 않은 일, 견딜 수 없는 일로부터 도망친 결과 이르게 된 길. _ 강홍구
어느 것 하나, 내가 생각한 것과 맞게 돌아가는 일이 없이 30년 넘게 살아 왔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프로그래머도 되지 못 했고, 중국어 통역사도 되지 못 했고, 문학 번역가도 되지 못 한 채,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삶이 내게 왔기 때문에...?
이 책에는 물론 나와는 다르지만 이와 비슷하게 '내게 온'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아주 커다란 차이점은, 그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삶을 살고 있고, 나는 지금도 다른 삶이 내게 다가오길 꿈꾸며 호시탐탐 다른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냥 어찌어찌 굴러오니 여기였어요."
되는 대로 막 사는 사람의 말 같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식인 것 같다. 내 삶이 내게로 온 것인지, 내가 그리로 간 것인지, 내가 구른 건지, 삶이 나를 굴린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매 순간 내 의지로 결정하고 움직인 것 같아도 전체적으로 미리 정해진 운행 노선을 따른 것 같고, 계기들의 연결고리가 필연적인 양 보이다가도 수많은 가능성들을 제치고 그 하나를 선택한 내 뜻이 언뜻 보이니 말이다.
"에이, 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
이제는 나이까지 드니 내 입에서 이런 말까지 튀어나온다. 누구와 각본을 짜고 시치미를 떼고 하는 게임이라는 걸까? _ 박승숙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있는 열일곱 명의 명사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아는 이름은 소설가 공선옥밖에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 평소에 접해보지 않은 다양한 분야를 만나고, 지금의 삶을 만나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이야기는 괜히 내가 다 가슴 벅찼고, 어떤 이야기는 저자 이름에 별표를 쳐두고 나중에 꼭 저서를 찾아보리라 생각하게 만들었으며(특히 기생충 교수님의 저서!), 어떤 이야기는 꼭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 밑줄을 두 줄씩 그어 놓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는 감동에 눈물이 글썽여지기도 했다. 열일곱 편의 이야기 중 일부는 조금 지루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과 재미를 전해주었다.
아, 나는 언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그래서 여유롭게 웃으며 "이 삶이 내게 왔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쩐지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내 삶의 지도를 펼쳐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태어난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세상에 빚진 게 많다. 아주 많은 힘들의 작용과 우연의 행동을 통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웃기는 말이지만 열심히 그 빚을 갚지 않으면 언제 빚 독촉이 한꺼번에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혼자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계속해서 또 빚을 지고 무언가를 받게 된다. 어쩌면 한평생 채무자로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고마워하며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주려고 헉헉거릴지도 모르겠다. _ 박승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