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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이 책, 연이어 두 번을 읽었다.
처음에는, 내가 뭘 읽은 건지,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아 멍하기만 했다.
앞부분부터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30년 전) 이야기를 풀어 놓는 통에 그들의 대화에서 철저히 배제된 느낌이었고,
이어서는 '김지하' 시인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이 소설은 얼만큼이 사실이고 얼만큼이 허구인가 따위를 궁금해 하느라 집중하지 못했고,
한참을 읽어나가면서는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과 '메이스케'와 '애너벨 리'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되며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하루 쉬었다가 다시 펼쳐들었다.
역시, 책은 두 번째 읽을 때부터 그 참맛을 알게 되는 것인가?
('참맛'을 알았다고까지는 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처음과 달리 무척 재미있게 읽어 나갔다!)
처음에 나를 힘들게 했던 앞부분의 어리둥절함은 이제 반가움으로 변했다. 아, 그 이야길 하고 있는 거군!
뒤죽박죽 혼동이 되어 정신을 못차리던 여러 이야기들도 머릿속에서 착착 정리가 되어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쿠라 씨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려왔다.
자신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어느 한 순간 때문에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불안하게 살아온 사쿠라.
종국에는 그녀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해도,
그녀의 인생에 짙은 어두움을 드리운 그 과거, 그녀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 그래서 더욱 두렵고 무서웠던, 피하고 싶었던 그 과거.
마거섁 교수의 블랙박스는 참으로 독특한 컬렉션이더군. 그래서 나는 사쿠라 씨에게 보여줘도 될 것과 보여주면 안 될 것들을 꼼꼼하게 선별하고 있어. 그래, 그녀가 끝까지 모르는 채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결국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여쁜 꽃장식으로 포장된 과거의 추억과 더불어 마거섁 교수가 떠난 후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146)
나는, 이 '아름다운 애너벨 리' 사쿠라 씨가 끝까지 '그것'을 모르도록, 그래서 '어여쁜 꽃장식으로 포장된 과거의 추억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한차례 '싸늘하게 죽'었다.
나 역시 고모리가 잔인하다고 저열하다고 생각하고, 왜 그녀에게 굳이 '애너벨 리 영화' 무삭제판을 보여줬는가 분노했지만,
사람은 결국 예쁘게 포장된 과거에 속아서 살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사쿠라 씨는 영영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테지.
진실을 아는 순간, 삶은 악몽보다 더한 것이 되어버릴지라도, 결국에는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진짜 삶과 대면하는 수밖에.
사쿠라 씨는 결국 '메이스케 어머니' 역을 멋지게 소화해냈을 것이다.
단풍나무 숲에 울려퍼진 그 '넋두리'는 연기가 아니고 그녀 자신의 탄식과 분노였을 테지.
그걸 뱉어내기까지 그녀는 너무 힘들었겠지만, 타인으로 인해 망칠 뻔한 자신의 진짜 삶을, 바로 그 순간, 되찾아왔다는 느낌.
우리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는 싸늘하게 죽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