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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이야기
정효구 지음, 주명덕 사진 / 작가정신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전자책 단말기를 받아 들고, 어떤 글을 읽어볼까 고심하며 책 목록을 보던 중, 이 제목이 눈에 띄었다.
책 소개를 볼 수는 없었다. 제목만 보고 구입해야 하는데, 평소에 알던 책과 작가가 아니라서 조금 망설였지만, '마당'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선택했다.
그렇게 전자책 단말기와 나의 인연을 '마당 이야기'로 열게 되었는데, 굉장히 성공적인 첫만남이었다!
역시, '마당'이라는 단어가 나를 향해 내뻗었던 유혹의 손길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집엔 손바닥만 한 시멘트 마당이 있다.
처음엔 '손바닥'만 한 게 불만이었는데, 살다보니,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흙마당이 아닌 게 더 불만스러워졌다.
마당이라면 모름지기 흙 냄새가 나야 하는데, 마당 아무 데나 파고 꽃이며 푸성귀를 가꿀 수 있어야 하는데, 비가 오면 진창에 드문드문 돌을 옮겨 놓으며 지나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가끔은 개구리 손님도 찾아오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멘트 마당은, 도무지 그런 재미라곤 없는 거다. 시멘트 마당의 아량은, 내가 수시로 자리 옮기며 가꾸는 화분 몇 개를 받아들이는 정도일뿐.
내가 너그러운 흙마당을 그리워하는 건, 청소년 시절을 보낸 시골 마을의 '운동장'만 한 흙마당이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가슴 깊이 자리잡아서 일 거다.
한창 나의 감수성이 자라던 그 시절, 내게는 그런 마당이 있었다.
할머니는 마당 귀퉁이 아무 곳이나 파서 갖가지 푸성귀를 가꾸셨고, 아버지는 마당에 널찍한 평상을 만들어 여름철의 시원한 추억을 갖게 해주셨고, 어머니는 마당 하늘을 가로지른 빨래줄의 바지랑대를 눕혔다 세웠다 하며 빨래를 널고 걷으셨고, 강아지와 고양이는 마당 구석구석을 놀이터 삼아 뛰놀았고, 우리 형제들은…… 지금 도시 아이들은 뭔지도 모를, '흙냄새'를 맡으며 발에 흙을 묻히며 흙마당에 드러누워 별을 보며, 그렇게 자랐다. 내게 마당이란, 그런 유년의 추억들이 담긴 공간이다.
어떤 아름다운 '정원'을 본데도, 내 마음속 그 흙마당이 주는 아련함과 따뜻함이 깃든 추억을 이길 수 없다.
이 책은 내게 그런 흙마당의 추억을 다시금 불러일으켰고, 마당을 향한 간절함을 절절하게 했으며, 맨발로 흙을 밟아보고 싶어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게 만들었다. 아아, 흙마당이 없는 지금의 삶이 왜 이리 퍽퍽하게 느껴지는지.
마당 없이 유년을 보내는 어린아이들에게, 마당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다. 맘껏 뛰어놀 장소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야생의 놀이터인 마당을 되돌려주고 싶다. 마당과 같은 성실함과 튼실함을 배워가야 할 아이들에게, 드넓은 마당의 꿈을 선사하고 싶다.('작가의 말' 중)
이 책을 읽으면, '마당'이란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마당'이 없는 지금 우리네 삶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혹은 모르고 사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 어린이용 책은 아니다.(아이들이 읽기에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어린 시절 마당의 추억을 간직한, 지금도 틈만 나면 마당 넓은 시골집으로 이사하고 싶어 기웃기웃거리는, 아무튼, 흙마당이 그리워 못 견디겠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많은 걸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다. 마당의 흙냄새가 그리운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_ 무심한 자는 무심하기 때문에 절대로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마당은 무심의 화신으로서 누구에게도 호객을 하는 일이 없다. 그런 마당의 영원과 같은 무심한 지대에 가까이 가려면 우리가 솔선수범하여 그를 속까지 닮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일은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다. 도저히 온전하게 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그러니 마당은 인간들에게 언제나 그릴 수는 없고, 오직 그리워할 수만 있는 대상인 것 같다. 마당이 부른 바 없는데도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며 찾아가고, 그가 위로한 바 없는데도 우리는 그에게 찾아가서 위로를 받고 돌아온다.
_ 밤의 마당에 비치는 달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심저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열게 한다. 밤 마당에 비친 달의 풍경은 단 한 번도 피하고 싶은 마음, 지루한 마음, 피로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저 우리들을 무장 해제시키며 이전보다 더욱 부드럽게, 신비롭게, 싱싱하게 할 뿐이다. 이런 정경을 마음속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스르르 녹으며, 열린다. 그런 마음과 정경 속엔 아무런 계산도, 초조도, 피로도, 긴장도 끼어들 틈이 없다.
_ 아파트나 도심의 빌딩에서는 비의 전신全身을 볼 수 없다. 그저 베란다나 창문을 통하여 출처도 없이 떨어지는 비의 옆구리나 허리께만 파편처럼 스치듯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_ 꽃밭에 꽃씨를 심어보는 일, 그 꽃들을 가꾸어보는 일, 그 꽃들에게 마음을 빼앗겨보는 일, 그런 밥이 되지 않는 허虛의 삶을 살아보는 일, 한마디로 말하여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이른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미적 사건이 우리의 삶에 자주 있어야겠다. 그래야 무겁고 지친 우리의 삶이 좀 가벼워지고 나아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