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몰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인생 모두가 비참한 쪽으로 기울지는 않았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21)

 

내가 터득한 시간 보내기의 지혜는, 언제 무엇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질문하지도 말며, 기억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 일은 질문하지 않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고행이었다.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오히려 더 생생한 기억이 나의 뇌리를 차지하고 버티는 것이었다. 가령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잊어버린다든지, 장래에 있을 희망적인 일들을 상상하지 않는다든지, 질문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나의 보잘것없는 의지력에 기댄다 해도 얼마든지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되는 것만은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기억과 나의 의지력은 그 태생과 궤적을 달리하는 전혀 다른 유기체와 같았다. 의식의 어둠을 뚫고 사나운 짐승처럼 내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그 기억이란 존재는 그래서 나에겐 크나큰 고통이었다. (25)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중에도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불 켜진 상점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밤중이 아니라, 멀리서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잘 보인다. (143)

 

알고 보면 나도 가엾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게 내 책임이냐, 그렇다고 너 책임이냐. 아무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이 그러라고 시킨 일인데, 책임 소재가 따로 있겠나. 그렇다면 나나 너나 그렇게 훌쩍거리고 울어봤자, 모두가 남이 보면 웃을 일이다. 사주팔자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보면 어디쯤 가서는 지쳐서 끝장이 나겠지. 울지 말고 어서 일어서거라. (148)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겠더라."
거짓말이라거나 무성의한 대답이 아니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생애에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갈 테지만, "왜 그랬어요"라고 무턱대고 묻는다면 열에 여덟은 어머니와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애매하기 그지없는 생애를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았든 나빴든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세상에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220)

 

뚜껑 열린 채로 넘어진 병에서 물 쏟아지듯, 한번 그립기 시작하면 더욱 간절하게 그리운 것이었다. (245)

 

그러나 그 꽃 같은 나이만 가질 수 있는 금쪽같은 세월을 허송한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후회가 가슴을 칠 때가 옵니다. (285)

 

어떤 인생도 완전하고 순탄하지는 않아요. 사람은 살다보면 누구든지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잘못 살지 않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정신병자들이지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은 지진이나 태풍뿐이지요. (285)

 

 

 

내 마음속의 빈집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허허벌판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나의 외로운 빈집.
그러나,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다 빈집이 한 채씩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