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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다린 그 사람'이 있긴 있었고, 세상 모든 유행가가 내 얘기처럼 들리지는 않더라도, 괜히 이런 말 한 마디쯤 속는 셈 치고 믿어보고 싶긴 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올까? 하는, 참, 다분히 순진(?)하고, 다분히 불순(!)한 의도로 이 책을 읽었더랬다.
(뭐 결론부터 말해서 어찌되었냐면,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기다린 그 사람'이 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 후 며칠이 지나는 동안 어쩐지 내 마음도 돌아서버렸다는, 뭐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결론.)
잠시나마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저 문장은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이다.
아름다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일. 시는 너무 짧고 장편소설은 너무 길다.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풍경은 회화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윤대녕의 책이면 좋을 것이다. 그의 책은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하염없이 날아가는 새를 닮았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어 아프고, 하릴없이 그 바람 맞으며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리다. _ 신형철(문학평론가)
정말 아름다운 평론이다. 소설 읽기에 앞서 평론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처음인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무슨 점쟁이가 사랑을 이루게 해줄 요량으로 쓴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부적이 아니고(나는 어쩌자고 저 문장을 무슨 부적처럼 믿고 잠시나마 설렜던가!),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일곱 편의 단편을 나는 수록 순서에 상관없이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부터 골라 읽었다.
가장 먼저 만나본 단편은, '여행, 여름'.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여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고, 여름이 오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계속계속 떠나고 싶어지니 여행, 여행, 여행 외치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여행, 여름'이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내 마음에 들어올 수밖에.
이어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를 읽고 그 다음은 '풀밭 위의 점심'을 읽었던가 '보리'를 읽었던가, 여튼 그런 순서로 책을 읽어나갔다.
처음에 세 편 쯤 읽었을 때는, 지인에게 추천을 하며 (아직 '부적'의 영향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정말 글에 푹 빠진 탓인지) 내 온 마음을 내어주며 읽었다.
그리고 '대설주의보'를 끝으로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일곱 편의 이야기가 모두 섞여, 하나의 이야기처럼 내 안에 저장되어 버렸다.
다 두 명의 남자가 나왔던 거 같고, 한 여자가 나왔고, 이들은 내 고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 년에 한두 번쯤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고, 각자에게 또는 어느 한 편에게는 가정이 있었고, 이런 이야기가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조금 색다르게 기억되는, 그래서 세세한 이야기가 기억 나는 작품은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한 편뿐이다.
내 곁의 누군가가 이 책을 읽겠다면 나는 한번에 읽지 말라고, 한 번에 한 편씩만 보고, 그 여운이 사라질 때쯤 또 다른 한 편을 펼쳐보고, 그렇게 읽으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러면 나처럼, 이 일곱 단편을, 하나의 장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나도 그렇게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다음 겨울에 다시 한번 펼쳐보리라 생각해 본다.
_ 세상 모든 이들이 저기 언덕 너머에 숨어 있는 달리아밭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삼가 두 손 모음.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