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등단 사십 년, 천부적인 이야기꾼 김주영의 신작 장편소설'

이라는 문구를 보고, 꼭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이래서 띠지도 중요해!)

등단 사십 년, 대작가이건만, 나는 아직 작가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 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며 당장 책을 집어들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안 접힌 귀퉁이보다 접힌 귀퉁이가 더 많아지고 밑줄 긋느라 책장을 넘기는 손길도 자꾸 멈추어야만 했다.

아, 대작가의 글이란, 역시, 이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나.

오랜만에 대단한 보양식으로 내 몸의 피와 살을 더욱 튼실히 한 기분이다. 이 책을 만난 게 그렇게 뿌듯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늘 밖으로만 떠도는, 집에 와서는 마음 편히 쉬지도 못 하고 쫓기는 게 일인 아버지와, 말은 자못 퉁명스럽고 곰살맞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아버지를 지키는 데 있어서만은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보다도 더 훌륭한 어머니와, 어머니에게 애물단지 취급 당하며 몸과 마음 모두 '빈집'에 갇혀 지내는 '나'. 여기에 더해 나의 어머니와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며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아버지의 전처와 '나'의 배다른 언니인 수진.

이들 가족이 내 마음속 빈집으로 걸어들어와, 내 안을 일시에 왁자하게 만들어주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이들 이야기에 빠져 밤을 새워 읽고 말았다.

 

마치 의붓어머니처럼 '나'를 구박하는 모습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싫었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 어머니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지아비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거리할 때의 그 말투나, 형사 앞에서 남편을 빼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꾸미는 능청스러움이나, 이미 헤어진지 오래 된 남편의 전처를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려는 데서 설핏 엿보이는 여자로서의 질투나, 이러저러한 모습들이 내게 점점 어떠한 연민과 심지어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어머니의 모습이, 어쩐지 오래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다 읽자마자 작가의 또 다른 책을 구입했다.

웅숭깊은 느낌의 책을 읽고 싶을 때, '등단 사십 년, 천부적인 이야기꾼'인 작가의 책을 찾게 될 것 같다.

이제야 작가의 책을 만나서 유감이지만, 이제라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_ 이웃에서 스며든 저녁연기들이 노을 속으로 들어가 날개를 접었다. 고요와 적막함이 서로 엉키고 뒤섞여 이상한 안도감이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노을이 사라지면서 어둠은 땅으로부터 천천히 피어올라 허공과 하늘에 나열되어 있던 모든 것을 지워나갔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피어올랐던 어둠의 깨알 같은 파편들이 그때부턴 민들레 꽃씨처럼 하늘하늘 땅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97)

 

_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중에도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불 켜진 상점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밤중이 아니라, 멀리서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잘 보인다. (143)

 

_ 알고 보면 나도 가엾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게 내 책임이냐, 그렇다고 너 책임이냐. 아무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이 그러라고 시킨 일인데, 책임 소재가 따로 있겠나. 그렇다면 나나 너나 그렇게 훌쩍거리고 울어봤자, 모두가 남이 보면 웃을 일이다. 사주팔자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보면 어디쯤 가서는 지쳐서 끝장이 나겠지. 울지 말고 어서 일어서거라. (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