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
채종인 지음 / 채스(Chaes)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00쪽이 채 되지 않는 얇은 두께에 소박한 디자인의 표지.

처음에는 시집인줄 알았다.

 

이 책 속에는 책의 겉모습이 내게 준 인상만큼 소박한, 거기에 따뜻함과 감동이 함께 어우러진 짧은 이야기 다섯 편이 실려 있다.

(내게 그런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는 옛날 이야기 같은,

그런 아련함을 느끼게도 하는, 이야기들.

 

나는 여름 감기 탓인지, 더위를 먹은 것인지, 몇날 며칠을 책 읽을 기운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 기운 없는 손목으로도 잡기에 수월하고,

큼직큼직한 글씨와 시원시원한 행간이 눈에 잘 들어온 덕에, 내 품에 안긴 그날 바로 잡고 다 읽어 내렸다.

구수한 사투리도 정겨워 좋고, 잔잔한 이야기들이 가슴 따뜻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다.

 

전쟁에 끌려간 남편이 죽어 멸치가 됐다는 꿈을 꾸고 멸치 장사를 시작하게 되어, 평생을 멸치 행상을 하며 살아온 '미르치 할매'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푸진 밥상을 차려주고 싶어 눈길을 나섰던 한 남자, 그리고 생겨난 부부 고개 이야기가 담긴 '눈'

조그만 마을에서 이장님을 대신해 커다란 목청으로 온갖 동네 방송을 다 해주던 '진팔이의 마지막 안내방송'

남편과 함께 일군 땅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삶을 꾸려 나가며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가 담긴 '산'

괴팍한 성격에 허풍도 일급인 조생팔 씨가 늑대와 함께 춤을 춘 사연 '늑대와 함께 춤을'

 

이 다섯 편의 이야기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깊은 밤에 듣는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주고,

나이 든 이들에게는 그들의 어린 시절을 아련하게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들게 해줄 것 같다.

내가 읽고, 나의 어머니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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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까닭인지, 무슨 인연인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이언 매큐언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었더랬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기억도, 어딘가에서 보고 '읽어봐야지' 다짐했던 기억도 없는데,

어째서 '모르는 작가'의 책을 겁도 없이 여러 권이나 사뒀지?

지금 생각하니 참 의아하다.

 

벽쪽에 붙어 있어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쪼로록 꽂혀 있던 이언 매큐언의 책들.

어느 심란하던 날 밤, 그 중 한 권을 꺼내들었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설마,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했을라고!)

여튼, 그리하여 드디어 읽게 되었다. 이언 매큐언의 책을.

 

그러니까, 그날 나는 조금 심란했던 모양이고, 어지러운 정신을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기에는 연애 이야기가 최고다 싶어 고른 것이, 이 책이었다.

제목만 보고.

달달한 연애 소설인줄 알고.

그랬더니, 그게 아니었고.

 

이런 사랑 이야기는 처음이다. 어떤 사랑이냐고...? 그러니까, 이런 사랑...(난데없이 말장난은! 사실은, 지금 조금 졸립다...)

 

초원에서 기구 추락사고 현장에 있게 된 사람들 속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고, 그 중 한 사람이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

이상한 종교, 혹은 개인적인 어떤 종교에 심취한 듯한 이 남자는, (역시 남자인) 주인공에게 스토킹에 가까운 애정 공세를 펼친다.

주인공을 자신의 종교로 귀의시키고자 하며, 당신이 먼저 나를 사랑했다는 둥,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뱉어내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이런 사랑이다.

 

페이지에 여백이 거의 없이 빽빽히 들어찬 글씨들에 살짝 질렸던 데다,

내가 생각한 달달하거나 혹은 애틋하거나 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어서, 조금 김이 샜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리 이런 사랑,인 걸 알고 읽었더라면 그저 흥미진진하게 빠져서 읽어내릴 수 있었을 것도 같다.

이야기 전개는 굉장히 힘 있고, 긴장이 넘쳐 흐른다.

짧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하룻밤만에 모조리 읽어내렸다.

 

어떤 계기에서였든, 이언 매큐언의 책들을 여러 권 구비해놓은 건, 잘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란하다거나, 연애 이야기로 정신을 분산시키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들이 아닌,

그냥 이언 매큐언의 이야기가 그리운 날, 또 다른 책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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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여신 2016-04-19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은 지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다.

이제와서 리뷰를 쓰기에는 이미 많이 흐려진 기억이 멋쩍지만,

뭐라고 조금이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너무나 아쉬울 책이다.

엄마에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귀여운 소녀 알마와, 알마의 이름을 따온 소설인 <사랑의 역사>를 쓴 실제 저자 레오.

그 둘의 이야기가 갈마들며 흘러가는 이 책은,

나의 어휘력과 언어 표현 능력이 부족한 게 미안할 정도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운 장면도, 아름다운 말도 많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사랑한 말은, '다이 루쿠'였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방으로 널 데려가려고. 또 네바 강에서 스케이트 타는 법도 가르쳐줄게." 미샤가 말했다. "난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겠네." 미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르쳐줄게. 첫 단어는 다이(Dai)야." "다이?" "두 번째 단어는 루쿠(Ruku)." "무슨 뜻인데?" "먼저 말해 봐." "루쿠." "다이 루쿠." "다이 루쿠." "이게 무슨 뜻이야?" 미샤가 내 손을 잡았다. (197)

 

"다이 루쿠." "손을 잡아줘." 프러포즈의 의미가 담긴 말이라 한다. 다이 루쿠. 손을 잡아줘. 정말 낭만적인 프러포즈.

 

다이 루쿠,의 은은한 감동으로, 내 마음속 손을 잡아 준 책.

 

"브루노?"

"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하지 않아?"

"글쎄요,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은데요."

"너한테 뭘 팔려는 게 아니야. 나야. 들어봐. 지금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쳤어."

"누가 널 스쳤는데?"

"이봐, 들어보라니깐. 살아 있는 게 얼마나 좋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어. 살아 있어. 너한테 말해주고 싶었어.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하겠어?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야, 브루노, 아름다움과 영원한 즐거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네가 뭐라고 하건 간에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그리고 영원한 즐거움이지." 내가 말했다.

"좋아. 즐거움."

나는 기다렸다.

"영원한."

전화를 끊으려는데 브루노가 물었다. "레오?"

"왜?"

"사람의 인생을 말하는 거야?"

나는 반시간 동안 천천히 커피를 음미하며 마셨다. 소녀가 공책을 덮고 일어났고, 남자는 신문을 끝까지 다 읽고 있었다. 나는 제목들만 읽었다. 나는 나보다 더 큰 무언가에 속한 일부였다. 그래, 사람의 인생. 사람의! 인생! (110)

 

브루노는 종이를 현관문 아래로 밀어 넣었다. "인생은 아룸다워."라는 글씨가 보였다. 내가 종이를 밀어내자 그는 또다시 밀어 넣었고 나는 다시 밀어내고 그는 또다시 밀어 넣었다. 밖으로, 안으로, 밖으로, 안으로. 종이를 노려보았다. 인생은 아룸다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을 뜻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문 밖에서 브루노가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연필을 찾아서 휘갈겨 썼다. "그리고 영원한 농담." 나는 종이를 다시 문 아래로 밀어냈고, 그가 종이를 읽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브루노가 만족했는지 위층으로 올라갔다. (114)

 

단 4페이지만에, 인생이 '영원한 즐거움'에서 '영원한 농담'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생.

이라는 생각이 오래오래 나를 붙들었던, 기억에 남는 장면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며...

아름다운 이 책을 언제고 다시 펼쳐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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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미란다 줄라이 지음, 이주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이런 책이 좋다.

이런 책? 글쎄, 어떤 책을 이런 책,이라고 한 거지?

그러니까,

책 속 어딘가에 내가 자리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있는 그 일상의 이야기...?

그래, 그런 이야기들이 좋다. 비범한 사람들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혹은 평범보다는 조금 찌질한 사람들의 평범하거나 조금 찌질한 이야기가.

아니, 이 책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평범하다고 하는 걸까, 나는?

뭐, 어쨌든, 비범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영웅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들의 젠체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옮긴이의 말처럼

'미란다 줄라이의 주인공들은 키 작고 못생기고 내성적이라 아무도 관심이 없던, 기억도 안 나는 반 친구일 수도 있고, 집 앞 편의점의 고등학생 아르바이트 학생일 수도 있고, 평생 짝사랑 말고는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노처녀 고모일 수도 있고, 아무도 들어주거나 앨범을 사줄 리 없는 무명 인디밴드의 보컬일 수도 있고, 로맨스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일 수도 있다.' (나는 벌써 두 군데에 밑줄을 그었다.)

그러니, 내가 주인공일 수도 있는 책.

 

그래서, 제목을 따라 가만가만,

나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라고 생각했다.(제목이 '너'라고 말했으니까, 읽는 내게는 '나'겠지.)

 

이 책, 제목도 무척이나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제목으로 나를 유혹한 책, 하니 작년에 읽은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가 생각난다.

그 책을 들고 나갔던 날, 공교롭게도 나는 너무나 힘들고 지쳐 내 몸이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펼쳐들었던 그 책이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 인생을, 구했다. 제목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자꾸 내게 주문을 걸어왔다.

'내가 너를 구할 거야'라고.

그리고 제목이 아주 매혹적인 이 책,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를 읽으면서, 나는 정말 나만큼, 내 삶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에,

철 지난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며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두 주먹 불끈 쥐고(까지는 아니지만) 생각했다.

그래, 여기 이 자리에, 나만큼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책을 초반 몇 페이지쯤 읽고,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지인에게 재미있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좀 독특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 책,이라는 답장이 왔다.

좀 독특하다는 데에는 나도 금세 공감을 했지만, 불편하다니 어느 부분이? 하고 의아했는데, 조금 읽다보니, 끄덕끄덕 공감이 가긴 했다.

하지만 뭐, 그 불편도 어찌보면 내 안의 편견이 빚어낸 불편일 뿐,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짧은, 조금 긴, 아주 짧은, 들쭉날쭉한 길이의, 여러 사람들의 들쭉날쭉한 이야기들이 평온한 내 주말을 들쭉날쭉, 개성있게 그려주었다.

내게. 어울리는. 책,을 읽으며, 내게. 어울리는. 주말,을 보내며, 잊지 않기 위해 가만가만 기억해본다. 미란다 줄라이.

 

 

_ 나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어쩌면 누군가에게 내가 해주고 싶었거나 듣고 싶었던 단 한 마디가 있다면, 바로 이 말이었을 것이다. (19)

 

_ 인생에 대해 회의가 가득하다고요? 이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하늘을 보세요. 바로 당신 거예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세요. 그 얼굴들도 당신 거예요. 거리며, 거리 아래의 땅이며, 땅 아래 불덩어리인 지구도 모두 당신 거예요.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내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사실을 기억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을 향하세요. 그리고 하늘과,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 안에 담긴 빛을 찬미하세요. 인생이 불확실하게 느껴져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삶을 찬미하고, 찬미하고, 또 찬미하세요. (27)

 

_ 우리가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실은 누군가 죽도록 일한 결과였다. 횡단보도의 흰 줄도, 과자 한 조각도. (109)

 

_ 또 어떤 걸 할 수 있나요?

   널 사랑하는 거.

  그보다 더 신기한 건 못해요?

  못해.

  하지만 나한테만 이렇게 해주는 거죠?

  너는 우주에서 가장 사랑스러우니까.

  내가요?

  그럼. 당연하지! (186~187)

 

_ 다리 힘이 풀리더니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영어로 울부짖었고, 불어로 울부짖었고, 온갖 언어로 울부짖었는데, 눈물은 만국 공용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마치 에스페란토어처럼. (235)

 

_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그냥 쪽, 계속, 계속 밀고 나가라고. (241)

 

_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눈물을 덜 흘린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단지 여자랑 우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남자들은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볼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각자 독창적으로 우는 방식을 고안해내야 하는 거예요.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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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국 주방장 보름달문고 38
정연철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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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늦은 밤까지 이불 덮어 쓰고

 <학교는 밤마다 이상해> <난지도 하늘에 뜬 무지개> <우동 한 그릇> 같은 동화를 읽던 어린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자마자, 정든 친구들(동화책들)과 작별을 했어요.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었겠죠.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童話)는 이제 안녕,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테스>를 읽고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깊은 슬픔> 같은, 소.설.을 읽으며(<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다읽다 포기하기도 하며)

이것이 바로 소녀를 위한 책이다, 생각했을까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어언, 글쎄요, 얼마나 됐나 금방 계산이 되질 않네요.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강산이 두 번째 탈바꿈을 할 만큼의 시간이 흘러흘러, 무척 오랜만에 동화책을 만났어요.

 

그동안 동화책이라고는 읽을 생각도 안 해봤는데(청소년 소설이라면 조금 읽었더랬지만) 정말 우연한 기회로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왔어요.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었지만, 이른 아침 지하철에서 무겁고 탁한 머리로는 읽힐 것 같지 않아, 시원시원한 행간에 그림까지 있어서 술술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을 펼쳤지요. 그리고, 그냥 그대로 빠져버렸습니다. 다시 만난 동심의 세계에...

 

어려서부터 주방장이라는 확실한 꿈을 가지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예비 주방장 주병국,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다른 생김새 때문에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얻고 왕따를 당하는 '외계인', 할아버지에게서 최신 휴대폰을 얻어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애교와 착한 짓을 가증스럽게 해내는 미나, 동네가 '개벽천지'를 하며 들어선 아파트에 살고 싶어 떼를 쓰다가 아픈 이별을 맞이한 한우, 선생님을 짝사랑 하는데 자꾸만 옆에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정훈이 때문에 미칠 것 같은 혜미, 층간 소음을 원인으로 일상이 점점 팍팍하게 변해가고 있는 1605호와 1705호.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서 만난 어린 친구들의 모습이, 때로는 멋있고 듬직하고, 때로는 소름 끼칠 정도로 솔직하면서 얄밉고, 때로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도록 귀엽고, 때로는 눈물이 똑똑 떨어지게 가슴이 먹먹하고, 그랬어요. 이야기 한 편 한 편, 참 매력적이었답니다.

 

표제작인 '주병국 주방장'을 읽다가는 이런 문장 때문에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어요.

"내가 콧구멍이 두 개니까 살지, 한개였으믄 벌쎄 숨 막히 죽었을 끼라!"

아니, 이 말은!! 우리 어머니의 단골말!!! @.@

우리 엄마가 속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자주 쓰시는 말이거든요. "내가 진짜 콧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쉬고 산다!"라고요...

주병국 엄마의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요. (나중에 지인에게 들으니, 경상도에서는 흔히 쓰는 표현이라고...)

책 속에서, 내 가족의 (더군다나 '전매특허'라고 생각한) 단골말을 발견함으로 해서,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더욱 커졌어요.

 

아파트로 이사가자고 떼 쓰다가, 예상치 못하게 할머니와 작별하게 된 한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 방울을 떨어뜨리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짓궂게 밟아버린 할머니표 찐빵도 떠오르고, 한우 좋아하는 칼국수 만든다고 서둘렀을 할머니 모습도 떠오르고, 그리고 그만, 내가 좋아하는 나물 반찬을 해주시겠다고, 들로 나물 뜯으러 가던 우리 할머니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지고...

여기에서 책을 잠시 덮었네요. 자꾸만 가슴속에 떠오르는 할머니 모습 때문에, 더 이상 글자를 읽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마지막 수록작인 '쿵쿵'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싶은 이야기였어요. 이야기 속에서는 층간 소음으로 시작된 아파트 아래위 층의 오해일 뿐이지만, 사실 우리 일상에는 이런 오해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지요! 타인의 삶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내 시선으로만 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김없이 생겨나는 오해, 그리고 그로 인한 정신적 소모.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괜히 이해하려고 애 쓰다가 잘 되지 않아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고속도로에서 미친듯이 속도를 높이며 추월해 오는 차나, 얌체 같이 갓길이나 버스 전용 차로를 달리는 차를 만나면 우리 가족들은 늘 우스개처럼 말 해요. "마누라 애 낳으러 가는 갑다." 정말, 그런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 그럴 수도 있거든요. 물론, 실제로는 왜 그렇게 달리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려드렸더니, 아버지가 물어보세요.

"그래가 오해 풀고 끝났나?"

"아니. 그냥 오해 한 채로 끝나."

"그라믄 우야노. 오해를 풀고 끝나야지."

"그럼 권선징악 같은 그렇고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시시하지! 우리 삶도 어차피 그 많은 오해들 그냥 안고 가는 건데. 진짜 같은 이야기지."

 

진짜 같은 이야기. 여섯 편 모두, 내 안에 그렇게 품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난 동화책 한 권으로, 마음이 아주 포근해진 시간이었답니다.

아주 오래 떨어져 있던, 그래서 이제는 서로 잊혔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 떨어져 산 세월만큼 더 서로를 아끼고 보듬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주병국 주방장> 덕분에, 저는 동화를 다시 만납니다. 동화는, 아이들의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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